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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24)화 (123/1,192)

제124화

묵용감은 아직도 회림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옆에 있는 백천범은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다. 묵용감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수틀을 집어 들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만드는 것이오?”

“기홍 언니와 녹하 언니에게 주려고 합니다. 제게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저도 예쁘게 수를 놓아 선물해야지요.”

묵용감이 물었다.

“나는 왕비에게 잘 못해 주오?”

백천범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떨 땐 잘해 주시지만 어떨 땐 아닙니다.”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요 근래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했으니 마음이 차가워질 법도 했다.

결국 참지 못한 백천범이 하품을 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왕야께서도 어서 돌아가 쉬시어요. 내일 조정에 안 가십니까?”

묵용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자 둑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그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린 계집아이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가 그녀에게 잘해 주는 모습에 환히 웃어 보였을 뿐, 다른 것은 모두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피곤한 표정은 물론 하품도 몇 차례나 했다.

그가 말했다.

“너무 늦어서 나도 피곤하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야겠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시든가요. 옆에 빈방이 있으니 월향에게 시중을 들어 달라고 하십시오.”

그는 남몰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그의 말은 전혀 놀랍지 않은 듯했다.

“그저 농이었소. 그럼 난 이만 가 보리다.”

그녀가 그를 배웅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왕야.”

문 앞을 지키던 월향과 월규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묵을 줄 알았건만, 초왕은 회림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왕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했다. 몸을 돌려 그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서더니 따뜻한 어투로 말했다.

“나올 것 없소. 눈도 잘 뜨지 못하니 어서 가서 잠을 청하는 게 좋겠소.”

백천범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을 참지 못하는 그녀가 이렇게 오랜 시간 버텼으니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묵용감은 문 앞에 서서 침대로 향하는 백천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촛불에 그녀의 그림자가 병풍에 드리워졌고 이내 옷을 벗는 움직임이 비쳤다.

묵용감이 몸을 돌려 월향과 월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희는 주인을 이런 식으로 모시느냐?”

월규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고 월향이 그에게 말했다.

“왕야, 대문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어서 네 주인에게 가 보거라.”

그의 말에 월향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병풍에 드리워졌지만 그는 한눈에 백천범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고, 월향과 월규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두 시녀가 병풍을 돌아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묵용감이 재빨리 돌아서더니, 금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한편, 수원상은 이미 침소에 들었다. 하지만 그 시녀 추문은 꿋꿋이 정원에서 남월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월각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한 아무도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의 모습이 보였다. 곁에는 등불을 밝히는 머슴만 있을 뿐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른거리는 등불이 그의 앞을 은은히 비추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그리 밝지 않은 불빛 속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백천범이 오늘 밤 초왕의 총애를 받은 것인지 아닌지 추문도 조금 헷갈렸다. 남월각에서 잠을 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렀으니 그런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날 밤 어떤 이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고, 어떤 이는 밤새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서 서예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자 단잠을 잔 사람은 자연스레 활기가 넘쳤고, 잠을 설친 사람은 얼굴이 수척해졌다.

하지만 묵용감은 예외였다. 비록 얼마 자지 못했지만 제시간에 일어나 정원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기분이 상쾌한 게 당장 소라도 한 마리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자신을 결박하던 족쇄를 과감히 벗어 던지니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가뿐했고 기분도 좋았다. 아침을 먹을 때에는 기홍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음식 솜씨가 이리도 뛰어난 너에게 누가 장가를 올진 몰라도, 필시 그 사내는 행운아가 틀림없다.”

기홍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왕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시집을 가지 않고 평생 왕야를 모실 것입니다.”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좋지만 널 그리도 좋아하는 왕비는 동의하지 않을 듯하구나.”

기홍은 그의 말이 의아했다. 갑작스레 왜 왕비를 언급하는 것일까? 녹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묵용감이 떠난 뒤 기홍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 웃음은 무슨 의미야?”

녹하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 기홍 아가씨는 가끔 너무 순진해서 탈이라니까. 어젯밤 왕야께서 남월각에 가셨다는 거 몰라?”

“알아, 나도 들었어.”

“삼경三更 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겠어? 오후에 남월각에 가신 왕야께서 왕비 마마와 식사까지 하시고 오랜 시간 함께 보냈다는 건 다시 화해하셨다는 의미겠지.”

기홍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그럼 왕비 마마께서 다시 회림각에 오실 수 있는 거야? 오늘은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 드려야겠다.”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거봐, 내가 말했지? 그저 말다툼을 하신 것뿐이니 금방 화해하실 거라고 말이야. 이제 측왕비와 서왕비께서도 흥이 떨어지시겠네.”

기홍이 조금 씁쓸해하며 말했다.

“아직 제대로 합방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계속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지도 불분명해졌네.”

“내가 볼 땐 떠나는 게 더 나아. 부인은 여러 명인데 부군은 한 명이면 늘 말썽이 생긴다니까. 나도 시집을 가게 된다면 첩을 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갈 거야.”

기홍이 놀리며 말했다.

“가동 호위무사가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그에게 시집갈 거야?”

늘 시원시원하던 녹하였지만 그녀가 가동을 언급하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일개 호위무사가 날 넘보는 게 가당키나 해?”

“우리도 한낱 시녀잖아. 그래도 가동은 호위무사고.”

“시녀긴 하지만 그래도 무려 초왕을 모시는 회림각 최고 시녀잖아. 총 관리인 어르신도 늘 내게 웃으며 예를 갖춰 주시는데, 걔는? 어림도 없지!”

녹하는 눈을 번득이며 하늘만 쳐다보았다.

기홍은 정리한 물건을 손에 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시군요, 최고 시녀 아가씨. 그럼 저는 왕비 마마께 드릴 음식을 준비해야 해서 이만.”

* * *

수원상은 이른 아침 남월각을 찾아 왕비에게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청했고, 백천범은 흔쾌히 응했다. 홀로 외롭게 자라 온 그녀는 자신과 친해지려는 사람이 생기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월향과 월규는 저택에서 오랜 기간 지냈기 때문에 수원상이 찾아온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웃는 얼굴로 맞이하긴 했지만 사실 경멸스러웠다. 어제 일을 물어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다니,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날 백천범의 아침 식사로는 죽 한 그릇과 야채 만두 두 개가 차려졌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모두 약삭빨랐기 때문에 늘 묵용감의 태도를 기준으로 행동했다. 하인들은 백천범이 그의 총애를 받을 땐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그녀를 대했고, 멀리서 마주쳐도 곧장 뛰어와 예를 갖췄다.

음식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고기만두, 찐빵, 물만두 등 종류별로 차려진 만두와 죽, 두유, 계란찜, 식혜 등 그녀가 골라 먹을 수 있게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가 초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그들은 태도를 돌변해 차갑게만 대했다.

마침 수원상이 자신의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찐빵, 물만두, 계란찜, 두유 등 두세 사람이 먹어도 될 만한 양이었다. 대갓집 규수였던 수원상은 소식을 중시했기 때문에 찐빵을 몇 입 뜯어 먹고, 계란찜을 조금 먹은 뒤 수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그녀는 식욕도 왕성했고 음식이 아깝게 남겨지는 걸 참지 못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이 먹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 정도 양은 그녀에게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다.

신나게 음식을 먹는 그녀를 보고 수원상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듣자 하니 왕야께서 어제 이곳 남월각에서 식사를 하셨다던데요.”

“네.”

백천범은 물만두를 입 안 가득 넣고는 조금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제가 그간 왕야의 처소에서 밥을 얻어먹은 적이 많았거든요. 왕야께서 이제 그걸 갚으라고 하셨어요.”

물만두를 삼킨 그녀가 갑작스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은 제가 더 이득이에요. 회림각의 음식은 앞뜰 부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맛있으니까요.”

수원상은 요점을 놓치지 않았다.

“왕야께서 갚으라고 하셨다는 것은 이곳에서 며칠간 계속 식사를 하시겠다는 뜻인지요?”

“설마요.”

백천범은 두유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그저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겠죠. 기홍 언니가 만든 음식을 놔두고 왜 이곳까지 와서 드시겠어요? 말도 안 돼요.”

수원상은 그녀를 떠보며 물었다.

“왕비 마마, 왕야와 화해는 하셨습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께서 그러시겠대요. 근데 또 며칠이나 가실지 모르겠어요. 언니는 아직 모르시겠지만 왕야께서는 조금 변덕이 심하시거든요.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시면서요.

저는 상관없어요. 제게 잘해 주시면 좋겠지만, 잘해 주지 않으셔도 참아야죠. 어쨌든 언젠간 이곳을 나가게 될 테니까요.”

수원상은 백천범의 태도에 크게 놀랐다. 그녀는 초왕에게 별 마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해를 하셨는데도 나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당연하죠. 저희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으시니 왕야께서 절 오래 거두어 주시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저와 헤어질 때 제게 신랑감도 구해 주신댔어요.”

수원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왕야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정말이에요. 왕야께서 제게 잘해 주실 땐, 절 여동생처럼 여기시거든요.”

“잘해 주지 않으실 때는요?”

“그땐 원수처럼 대하시죠.”

수원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태연하십니다, 왕비 마마.”

“어쩔 수 없죠. 여긴 초왕의 저택이니까 모든 게 다 왕야 마음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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