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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23)화 (122/1,192)

제123화

상을 물린 뒤에도 묵용감은 자리를 지켰다.

백천범은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한 번도 그가 이런 적이 없었다. 꼭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백천범은 궁금증을 못 참고 그에게 직접 물어봤다.

“왕야,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것인지요?”

묵용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왕비가 저택에 온 지 아직 세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어째 키가 좀 큰 듯하오?”

고작 이 일로 그렇게나 고민을 했다는 생각에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 예전에 제가 아직 자라는 중이라고 했잖아요. 그땐 저를 놀리시더니……. 왕야가 보기에도 조금 컸죠? 좀 전에는 살도 찐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묵용감이 그녀의 앞섶으로 시선을 내리며 놀렸다.

“어떤 부분은 아직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오.”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본 백천범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이내 몸을 돌려 앉아 식식거렸다.

“왕야,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등을 돌리고 앉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가녀린 두 어깨의 아름다운 선이 드러나자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따스하게 말했다.

“나를 큰오빠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이런 말도 못 하는 것이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에게 가볍게 기댔다. 하지만 백천범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의 말도 맞았다. 큰오빠가 집에 있을 땐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기도 했고, 정원에서 잠든 그녀를 안고 방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겨울에 그녀의 손이 꽁꽁 얼었을 땐 손을 감싸 따뜻하게 녹여 주었고, 유모가 세상을 떠나 홀로 차가운 방에서 밤새 울 땐 그녀를 찾아와 품에 안고 위로해 주기도 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오빠는 아무것도 덮지 않고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고 그대로 그의 품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와의 거리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탓에 코가 다 아플 정도로 세게 부딪혔다. 그녀가 원망이 담긴 말투로 말했다.

“왕야, 왜 이렇게 가까이 서 계시는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묵용감은 조금 떨어진 뒤 그녀의 콧등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스스로 덜렁대다 부딪혀 놓고 나를 원망하는 것이오? 이런, 이 고운 콧방울이 다 삐뚤어졌소.”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백천범은 황급히 거울 앞으로 가 코를 확인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콧방울은 멀쩡히 잘 붙어 있었다. 자신을 놀린 묵용감에게 화가 난 그녀는 그의 코를 비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왕야의 코야말로 삐뚤어졌습니다.”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무엄하오.”

묵용감이 무서운 척 엄하게 이야기하자 백천범은 자신의 본분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더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묵용감은 속으로 후회했다. 이제 막 관계를 회복했을 뿐이니, 그녀의 마음엔 아직 그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가까스로 그에게 다시 마음을 연 그녀를 또다시 움츠러들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저 장난친 것이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꼬집고 싶으면 그리하시오. 어차피 별로 힘도 없을 텐데.”

그의 말에 백천범은 다시 마음을 놓았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분명 왕야께서 꼬집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었던 묵용감은 허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알겠소.”

묵용감에게 자신의 손맛을 보여 주고 싶었던 백천범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있는 힘껏 그의 코를 비틀었다. 혹여 그가 통증을 느끼지 못할까 봐 온몸의 기를 모으듯 세게 힘을 주었다.

방심하고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손맛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약한 코뼈가 어찌 그 힘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는 정말이지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올 만큼 아팠다.

그녀가 꼬집는다고 한들 묵용감은 아파하지 않을 거라고 백천범은 생각했다. 하지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그의 모습에 백천범은 크게 놀랐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왕야,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묵용감이 코를 감싸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프오.”

“제가 호 불어 드리겠습니다. 바람을 쐬면 좀 나을 것입니다.”

예전에 그녀가 다칠 때마다 유모는 늘 입김을 불어 주었다. 따뜻한 그녀의 입김이 스치면 정말 통증이 덜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이 손을 떼자 그녀는 그에게 입김을 불어 주었다.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우스웠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넌지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그마한 입을 깜찍하게 오므린 채 입김을 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에게서 희미했지만 과일 향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순간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날 잠이 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스쳤을 땐 번개라도 맞은 듯 좀처럼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 때문에 곧장 자리를 벗어났지만, 마음속에서 사나운 파도가 끊임없이 쳐서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은 두려움은 그를 격랑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고, 결국 그 두려움에 못 이겨 배수진을 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결심이 다 사라져 버렸다. 마음속에 피어난 사랑이라는 새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르게 자라났고,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행동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가 자꾸만 마른 침을 삼키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자 백천범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왕야, 왜 자꾸 절 그리 빤히 바라보는 것인지요? 무슨 벌을 내릴지 고민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렇소. 내 코를 그리 아프게 꼬집었으니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소?”

그의 엄포에 조금 위축되었는지 그녀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알겠어요. 대신 가벼운 벌을 내려 주시어요. 저는 우는 모습이 못생겨서 울기 싫은데, 너무 아프면 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땐 절 탓하시면 안 돼요.”

그는 그녀가 한 말이 우스워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왜 이리도 재미있는지 몰랐다. 그 두 여인들과의 지루한 대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말했다.

“날 이리 아프게 했으니 나도 한 번 깨물어야겠소.”

그녀는 황급히 코를 감싸 쥐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왕야, 제 코를 물어뜯으실 작정이신지요?”

“물론 아니오.”

크게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다시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한참이나 허리를 굽히고 있어 조금 힘들었던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난 후, 그녀를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오직 자신의 코에만 정신이 팔린 그녀는 이상한 낌새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겁에 질린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시오. 코는 깨물지 않을 테니.”

그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코를 깨무는 게 싫으면 다른 곳을 골라도 좋소. 눈이라든가 입술, 귀, 뭐든 얼굴에 있는 것이라면 상관없으니 알아서 골라 보시오.”

그녀는 질겁하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럼 귀로 할게요. 귀는 아프지 않을 테니까요.”

묵용감은 살짝 실망했다. 어째서 입술을 고르지 않은 걸까. 그는 속뜻을 품고 빙빙 돌려 말하는 자신이 싫었다. 평소 떳떳한 품행을 자랑하는 그가 이런 일에 수를 따져 가며 머리를 굴리다니! 정말이지 체면이 서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에게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댔다. 묵용감은 그녀가 아플까 봐 입술을 살짝 벌려 지그시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입술이 아니라고 한탄한 것도 잠시, 그의 심장이 미칠 듯 두근거렸다. 작고 보드라운 귓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자극을 주었다.

그의 마음속이 환희로 가득 차다 못해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는 손이 조금씩 떨릴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몸 어딘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갑작스레 그를 밀쳐내더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깨물려면 그냥 깨무시면 되지, 왜 이리 간지럽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녀의 표정에 묵용감은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배 아래의 변화를 확인한 그가 재빨리 그쪽을 손으로 가렸다. 동월국 최고의 군신인 그가 오늘은 완전히 체면을 구겼다.

아직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한 그녀는 그의 행동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의 마음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왕비의 귓불이 너무 얇아 깨물면 곧바로 떨어질 것 같아 그저 몇 차례 머금었을 뿐인데, 그것도 그리 기분이 나쁘오?”

그의 거짓말에 그녀는 깜빡 속아 미안해하며 말했다.

“제가 오해를 했네요. 송구합니다, 왕야.”

정말 속이기 쉬운 계집아이였다. 그는 그녀가 백 승상의 집에서 어떻게 버텨 왔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이 눈치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 * *

묵용감과 백천범이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저녁상을 물린 뒤에도 초왕은 왕비를 방으로 데려가 한참이나 나오질 않았다. 문 앞을 지키던 월향과 월규는 방 안의 사정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늦었는데도 아직도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설마 오늘 밤 이곳에서 묵으려 하는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뻤다. 두 시녀는 세심히 시중을 들 수 있게 서둘러 따뜻한 물을 준비하러 갔다.

이전에 회림각에서 일했던 적 있던 두 시녀는 묵용감의 목욕 습관을 훤히 꿰고 있었다. 이곳의 목욕통은 그에게 너무 작았기 때문에 회림각으로 사람을 보내 그의 목욕통을 가져와야 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되었다.

추문은 낙성각 정원에 서서 목을 빼꼼히 내밀고 남월각을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간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초왕은 아직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남월각 무수리 말에 의하면, 식사를 할 때 서로 담소를 나누며 웃음을 보였다고 하니 왕비를 벌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었다. 아직까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설마 남월각에서 묵으려 한단 말인가?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원상에게 왔던 기회를 모조리 망쳐 놓고, 왕비가 다시 초왕을 꿰차다니. 만약 왕비가 먼저 왕자를 낳는 날엔 백천범의 자리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그녀 곁에 가녀린 그림자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수원상이었다.

수원상이 조용히 물었다.

“왕야께서는 아직이시냐?”

추문은 주인의 얼굴에 슬픔이 서려 있자 함께 슬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원을 잠시 거닐던 수원상은 묵용감이 완성하지 못한 정원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꽃을 다 심지 못했으니 초왕은 분명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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