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예?”
자그마한 그녀는 그의 손안에서 가볍게 흔들거렸다. 그녀를 업어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안아 올리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품에 와락 끌어안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간격을 두고 들어 올린 뒤 위아래로 움직이며 무게를 가늠했다.
“조금 찐 듯하군.”
백천범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왕야, 이렇게 해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으십니까?”
“대략은 할 수 있소.”
그는 그녀를 내려놓은 뒤 가볍게 숨을 돌렸다.
“왕비는…….”
조금 겸연쩍었는지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예전처럼 왕비에게 잘해 주길 원하오?”
백천범은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언제까지 잘해 주실 수 있으신데요? 왕야께서 기간을 정해 주십시오.”
그는 또다시 화를 내고 싶었지만 최대한 참아내며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백천범이 눈을 내리깔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왕야께서 제게 잘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랬다면 마음이 아플 일도 없고, 실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미어진 그는 결국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번만큼은 다른 걸 고민할 겨를도 없이 품 안에 꽉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오. 날 한 번만 더 믿어 줄 수 있겠소?”
백천범은 잠시 주저하더니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저는 늘 왕야를 큰오빠라고 생각한걸요. 왕야께서 절 속이시는 것만 아니라면 전 왕야를 믿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큰오빠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녀가 크게 놀라 도망갈 것 같았다. 어쨌든 아직은 그녀가 잘 자랄 수 있게 돌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속일 일 없소. 맹세하지!”
할 말도 다 끝냈겠다, 백천범은 이제 그만 밖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다시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백천범은 아직 그가 조금은 무서웠다.
사실 조금 전 그가 연이어 두 차례나 손을 내리쳤을 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의 다른 점은 다 좋아해도 그의 심한 변덕은 못마땅했다. 매섭게 화를 낸 뒤에야 사탕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정말 믿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수많은 위협을 당하며 성장해 왔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으면 자연스레 경계심이 생겨났는데 묵용감에게는 더욱 그랬다.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그를 꿰뚫어 보기 어려웠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가 조금 침울해졌다. 백천범이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왕야, 안 나가십니까?”
그녀의 말에 묵용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왕비는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것이오?”
백천범은 묵용감이 참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한 마디 뱉은 걸 저렇게 이해하다니……. 그녀가 웅얼거리며 해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저…….”
그저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조금 민망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묵용감이 삐뚤어진 그녀의 머리 모양을 바라보았다.
“시녀가 있는데도 왜 머리는 아직도 그 모양이오?”
“이게 편해서요. 시녀들이 머리를 빗어 주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어요.”
묵용감이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화장대 앞에 강제로 앉혔다.
“내가 빗겨 줄 테니 앉아 있기 힘들어도 참으시오.”
한동안 백천범의 머리를 빗어 주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빠르게 머리를 양쪽으로 말아 올렸고,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까지 세심히 빗어 내렸다.
묵용감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왕야, 지난 달 머리를 올린 것 잊으셨습니까? 이제는 이마를 보여야 합니다.”
“뭐 어떻소, 아무리 봐도 열넷도 채 되어 보이질 않는데.”
묵용감이 물었다.
“내가 준 장신구는 다 어디 있소?”
백천범이 보석함에서 장신구를 꺼내 묵용감에게 건넸다. 그는 곧장 장신구 두 개를 꺼내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꽂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돌려 유심히 살핀 뒤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민속화 속 여자아이와 정말 똑같군.”
그가 웃음을 지어 보이자 백천범의 배짱이 두둑해졌다.
“왕야, 회림각에 가서 기홍 언니, 녹하 언니랑 놀아도 돼요?”
묵용감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기홍과 녹하에겐 뻔질나게 찾아가면서 어째서 자신을 찾아오진 않는단 말인가?
그의 얼굴이 굳어지자 백천범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실 저도 그다지…….”
“좋소.”
묵용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한 번 꼬집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다 해도 좋소.”
백천범은 고개를 비틀어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웬일인지 아프진 않았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다른 쪽 볼도 꼬집었다. 그가 별로 아프게 꼬집지 않자 백천범은 가만히 있었는데, 순간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원망스럽게 그를 올려보자 묵용감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내 앞에서 얕은수를 썼다간 쓴맛을 보게 될 것이오. 알겠소?”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 시간이 늦었습니다. 회림각에 돌아가셔서 식사를 하실 것인지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대답했다.
“그간 회림각에서 왕비에게 수도 없이 많은 식사를 대접했으니 오늘은 나도 이곳에서 먹어 봐야겠소.”
“이곳은 앞뜰 부엌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어야 해서 기홍 언니가 해 준 것만큼 맛있진 않습니다.”
“왕비도 먹는데 나라고 못 먹겠소?”
백천범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드시지요.”
묵용감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괜스레 심통이 났다.
“하루로는 안 되지. 왕비가 그간 회림각에서 먹었던 만큼 나도 이곳에서 먹어야겠으니 잘 계산해 보시오.”
백천범은 두 손을 펼치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제 돈을 쓰는 것도 아닌걸요.”
정말 그의 마음을 알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천범의 모습에 묵용감은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만약 새로 들인 두 왕비였더라면 자신의 말에 분명 뛸 듯이 좋아했을 것이다.
회림각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그는 방 안을 살펴보는 척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장식품과 장난감 몇 개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어디에서 난 것이오?”
백천범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언니들이 준 것입니다.”
“왕비에게 잘해 주나 보오?”
“처음에는 좀 낯설었지만 지금은 아주 잘해 줍니다. 언니들이 왕야를 아주 좋아합니다.”
묵용감이 헛기침을 하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허면 왕비도 내가 좋소?”
“왕야께서 제게 잘해 주시니 저도 좋습니다.”
그녀의 말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묵용감은 이를 악물고 꾹꾹 참았다. 그녀가 조금 더 크면 조만간 알 수 있을 것이다.
묵용감은 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을 지키던 월향과 월규는 한참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시녀는 곧장 백천범을 살폈다. 멀쩡한 그녀의 모습과 미소 짓는 묵용감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녀들은 마음을 놓았다.
묵용감이 이곳에서 식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두 시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긴 시간 애를 태웠는데 드디어 왕비가 다시 왕야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었다.
월규가 직접 음식을 받아 와 한쪽 마루에 상을 차렸다. 평소보다 더 많은 요리 가짓수에 백천범이 의아해하자 월규가 설명했다.
“왕야께서 오늘 이곳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말에 부엌에서 특별히 더 많은 요리를 해 준 것입니다.”
그 말에 신이 난 백천범은 헤헤 웃으며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앞으로 자주 놀러 오시어요. 덕분에 저도 먹을 복이 많아졌습니다.”
묵용감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를 원하는 이유가 더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니.
그래도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한 탓에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게다가 백천범은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선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묵용감은 생각했다.
두 주인이 밥을 먹는 동안 월규와 월향은 흐뭇한 표정으로 시중을 들었다.
앞뜰 부엌에서 가져오는 음식은 확실히 기홍이 해 주는 것보다 맛이 떨어졌다. 묵용감은 낙성각에서 식사를 할 때도 대충 몇 술 든 뒤 수저를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백천범과 함께 밥을 먹으니 무얼 먹어도 맛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밥 한 그릇을 비웠다. 그녀가 밥을 더 먹자 그도 다시 밥 한 공기를 가득 채워 식사를 이어갔다.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그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 * *
수원상은 혹여 묵용감이 백천범을 어떻게 할까 봐 줄곧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더 걱정되었던 것은 단둘이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문을 걸어 잠근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추문이 그녀에게 남월각에서 초왕이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를 짚고 의자에 앉았다.
“왕야의 심기는 어떠하시더냐? 아직도 화가 나신 듯하더냐?”
“아닙니다. 웃고 계셨습니다.”
추문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미움받는 왕비라더니 어찌 함께 식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식사는 편히 하신다더냐?”
“안 그래도 소인이 물어봤더니 밥을 두 공기나 드셨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실 땐 얼마 드시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으시더니 그곳 밥맛이 좋으신가 봅니다.”
수원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녹하는 두 분이 말다툼을 해서 사이가 안 좋은 것이라 했다. 그럼 설마 화해라도 하신 것이란 말이냐? 오늘 보니 왕비께서 심히 무엄하게 행동하시긴 했다. 왕야가 화를 내도 들은 척 않고 가다니. 왕야께서 화를 참지 못해 곤장을 내리실지도 모르는데 전혀 두렵지 않은 듯하더구나.”
추문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그러하다면 무슨 대책을 세우셔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왕비가 저택을 나가지 않는다면 마마께서는 측왕비의 지위로 평생 백씨 아가씨의 밑에 계실 것입니다.”
수원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에 낀 가락지만 만지작거렸다. 초조한 눈빛이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