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눈치 빠른 고청접은 그런 수원상의 계획을 이미 다 꿰뚫고 있었다.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그녀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철저한 외톨이가 된 것이었다.
초왕의 발길도 점점 뜸해졌고 간혹 찾아온다 하더라도 늘 수원상과 함께였다. 한 쌍이 된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은 이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듯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측비가 되는 꿈도 헛된 희망이 될 수 있었다.
고청접의 머릿속에 백천범이 떠올랐다. 백천범은 참으로 속이기 쉬운 상대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며칠 간격으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 백천범을 찾아갔다. 백천범이 낙성각을 가려 하면 그녀와 함께 따라나섰다. 수원상도 백천범의 면전에서 고청접의 체면을 깎진 못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기이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고청접은 백천범이 늘 묵용감이 없는 시간을 골라 낙성각에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소식을 전해 주는 하인에게서 묵용감이 언제 낙성각에 오는지 보고 받은 뒤, 혼신의 힘을 다해 백천범을 구슬려 낙성각으로 향했다.
고청접에게 선물을 받은 백천범은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수원상은 백천범을 보고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지만 고청접이 뒤이어 들어오자 웃음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세 사람은 함께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이 낙성각을 찾아왔다. 그는 백천범을 보더니 얼이 조금 빠진 듯했다. 세 부인이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자 괜스레 수원상을 일으킨 그는 두 부인에게 예를 차리지 말라고 담담히 말했다.
탁자에 놓인 찻잔을 본 묵용감이 웃으며 수원상에게 물었다.
“또 좋은 차가 들어왔나 보오?”
“예. 안 그래도 왕야께 차를 드시러 오라고 청할 참이었습니다.”
수원상이 다소곳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하인을 시켜 차를 보내 주셨습니다. 운남雲南 위주도涠洲岛 지역의 차라고 들었습니다. 몸에 좋다고 하니 왕야께서도 드셔 보시지요.”
묵용감은 시녀들이 올린 찻잔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살짝 찌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펴지며 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중원中原의 차보다는 조금 쓰지만 음미하다 보면 단맛이 도는군. 위주도는 이민족이 많은 지역인데 이런 차를 즐겨 마시는 걸 보면 분명 몸이 아주 튼튼할 것이오.”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아시는 게 참으로 많으십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본왕이 가 본 적 있기 때문이오. 면적에 비해 사람은 적고 산림이 우거져 있지. 그곳 사람들은 독을 아주 잘 다루오. 독충의 독을 이용하기도 하고, 무당의 술법을 써서 사람을 해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풍경은 꽤 아름답소.”
수원상이 겁나는 표정을 지었다.
“오랑캐들은 참으로 기괴한 듯합니다.”
고청접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오랑캐 아녀자들이 빼어난 미녀라고 들었습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야에는 줄곧 백천범이 담겨 있었다.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대체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작스레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수를 다 놓지 못한 게 있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돌아섰다. 묵용감에게 인사를 올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묵용감이 방에 들어왔을 때에도 그녀는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 다들 인사를 올릴 때에도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문득 화가 치솟은 묵용감이 탁자를 치며 자리에 일어났다.
“멈추시오!”
백천범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태연하게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화를 주체할 수 없던 묵용감은 곧장 앞으로 다가가 백천범을 들어 올렸고, 자신의 팔뚝 사이에 끼워 안은 채 그대로 방을 나섰다.
갑작스런 상황에 수원상과 고청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천범의 담력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별안간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묵용감의 태도도 기이했다.
수원상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왕비 마마께서 아직 어리셔서 그런 것이니 이번 한 번만 봐주시옵소서!”
고청접도 재빨리 뒤에서 소리쳤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묵용감은 백천범을 달랑 들고 성큼성큼 남월각으로 향했다. 그는 백천범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뒤, 창문까지 모조리 닫아 버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옆구리에 끼어 있던 백천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을 밀실로 만든 묵용감은 그제야 백천범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웬일인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침대에는 요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내던져진 백천범은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워 자세를 고쳐 앉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묵용감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는 잔뜩 낙담한 모습으로 몇 걸음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나 많이 밀어내고, 피하고,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공든 탑을 스스로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한참 지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가려고 한 것이오?”
백천범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난번에 왕야께서 다시 보지 말자고 하셨으니까요. 오늘은 정말 부득이하게 그곳에 간 것입니다. 왕야께서 오셨으니 제 임무도 끝이 난 것이지요. 그래서 가려 한 것입니다.”
“임무라니?”
백천범은 말하기 난감한 듯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는 모르는 척하십시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긴다 해도 왕야께서 오시면 저는 지체 없이 자리를 뜨겠습니다.”
“그렇게 날 보기 싫은 것이오?”
“왕야께서 보지 말자고 하셨는데 제가 말을 듣지 않았다가 왕야께서 절 죽이시거나 내쫓으시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곳을 떠나기 싫은 것이오?”
“적어도 지금은 싫습니다. 조금 더 커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능력을 충분히 갖춘다면 이리 겁나진 않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묵용감이 말했다.
“지난번 이틀 연속 밤에 소란을 피운 것은 일부러 저지른 짓이오?”
백천범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왕야, 어찌 그리 생각하실 수 있으십니까? 왕야께서 새 부인을 맞이하셔서 저는 정말로 기쁩니다. 그런데 제가 훼방을 놓다니요?”
묵용감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든 게 그 혼자만의 바람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본인이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열다섯 생일에 머리도 올렸고 달거리도 시작했으니 그가 보기에 그녀는 이미 어른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단 말인가? 아직 마음에 사장풍을 품고 있는 것인가?
그가 물었다.
“사장풍은 어떤 것 같소?”
그의 말에 백천범은 골똘히 생각했다.
“괜찮은 사람인 듯합니다. 생김새도 단정하고, 능력도 좋고.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돕는 걸 보면 마음씨도 따뜻한 것 같습니다.”
묵용감이 속으로 생각했다.
‘단정하고, 능력도 좋고, 다른 이를 기꺼이 돕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나를 좋아하진 않는단 말인가?’
“만약.”
그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만약, 내가 왕비와 헤어지고 사장풍에게 시집을 보낸다면 그리 하고 싶소?”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가 원하는 일인지요? 그만 괜찮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묵용감이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퍽 내리치며 호통쳤다.
“어째서 내가 괜찮은지는 묻지 않는단 말이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백천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왕야께서 먼저 꺼내신 말씀이니까요.”
묵용감도 자신이 대체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과 머리가 모두 혼란스러웠고, 차분함과 냉정함을 잃은 지 오래였다. 짙은 안개 속을 뚫고 들어가듯 방향을 찾기 어려웠다. 왼쪽 오른쪽으로 한 발짝씩 내밀며 한참을 걸었지만 여전히 처음 그 자리를 맴도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간 심한 마음고생을 하던 그는 많은 일을 벌였다. 심지어 새 왕비를 맞이해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이 지경으로 몰아세운 꼴이 되었다.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곤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두 왕비의 처소를 찾아 밤을 보내려 했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은근한 불안과 공포가 밀려오기도 했다. 거사를 치르고 나면 이제 백천범과의 사이에는 정말 일말의 희망도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바라던 일 아니었는가?
날마다 낙성각을 찾은 이유도 그곳이 백천범의 처소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종종 처소를 들락날락하는 백천범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조경사라도 된 듯 행동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이 사실을 듣는다면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 댈 것이었다.
문 밖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 댔다. 수원상과 고청접이었다. 그들은 묵용감이 그녀를 어떻게 할까 봐 겁이 나는 듯 쉬지 않고 그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어떻게 하겠는가? 때릴 수도 없을뿐더러 몇 마디 혼쭐을 내는 것도 사실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밖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에 그는 짜증이 솟구쳤다. 여인들을 데려와 부인으로 맞았다 한들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겨우 가라앉힌 화가 또다시 치밀어 오르자 그가 문 앞으로 다가가 무섭게 호통쳤다.
“모두 썩 물러가시오. 최대한 멀리!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웠다간 곤장을 내릴 줄 아시오!”
그의 말에 밖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발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이곳은 그의 저택이니 그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은 예외였다. 사실 그녀 또한 그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아주 잘 들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나 마음을 졸이는데 그녀는 어찌 이렇게도 태연하게 군단 말인가?
그가 다시 침대 앞으로 돌아와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절 때리실 것인지요?”
그는 정말 그녀의 말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가 그리도 사람을 때릴 것처럼 보인단 말인가?
“때리지 않을 것이니 어서 오시오.”
백천범은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을 피했다.
“왕야,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와 가까워진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근래에 살이 쪘는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