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혼자 남은 묵용감은 책꽂이 앞으로 가 화본 한 권을 꺼내 들고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좋은 짝은커녕 그녀는 오히려 근심만 더해 주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뽐내고 재잘대는 게 듣기만 해도 성가셨다.
그가 보기에 화본은 제법 재미있었다. 저속하다는 평에 비해 짜임새도 꽤나 탄탄했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은 끝끝내 결실을 이루었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져 멀리 떠나가기도 했다.
화본의 주인공들에 비해 묵용감은 만날 수 있음에도 만나지 않으며 하염없이 서글퍼할 뿐이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같이 재잘거리는데 고청접의 말은 듣기 힘들 만큼 성가셨다. 백천범이 먹을 갈던 날, 책꽂이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산만하게 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혼을 내었더니 그녀는 오히려 자신만의 논리를 펼치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는 그런 그녀의 말에는 흥미를 느꼈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학평관이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야, 이제 측비를 들이셨으니 집안일은 측왕비께 맡기시는 게 어떠신지요. 늘 소인이 관리하였지만 규율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묵용감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 측비를 데려오너라.”
학평관은 수원상을 데려올 하인을 보냈다. 학평관 또한 백천범을 안쓰럽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는 묵용감의 입장에서 더 나은 일을 제안해야만 했다. 초왕이 이미 측왕비의 처소에도 찾아간 이상 왕자라도 태어난다면 측왕비는 곧 이곳의 주인마님이 되는 것이었다.
부인과 아들이 생기면 초왕의 삶도 한층 더 안정될 것이다. 이렇게 홀로 늙는 것보다는 그에게도 옆에서 살뜰히 챙겨 주는 여인이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회림각에 도착한 수원상은 서재에 들어와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그녀에게 앉으라고 청한 뒤,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부른 이유는 저택에 관한 일에 대해 상의하기 위함이오. 왕비가 아직 나이가 어려 일을 도맡아 할 수 없으니, 본왕 생각에 집안일은 측비에게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소. 살림과 관련된 모든 일은 측비가 관리해 주길 바라오.
예전에는 늘 학평관이 관리했는데, 모든 일을 본왕에게 와서 일일이 고하니 성가시기 짝이 없었소. 이 일은 여인이 관리하는 게 더 좋을 듯한데, 어찌 생각하시오?”
수원상은 기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급히 자리에 일어나 고했다.
“소첩, 저택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왕야의 신임을 받게 되어 황송할 따름입니다. 왕야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니 소첩도 왕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잘 관리하지 못해 왕야께 누가 될까 봐 조금 염려되옵니다.”
“측비는 꼼꼼한 사람이니 일을 맡아 준다면 본왕은 마음이 놓일 것이오. 만약 어려운 게 있다면 학평관에게 물어보시오. 곳간의 물건 같은 건 그와 함께 관리하면 될 것이오. 허면 이제 집안일은 측왕비에게 맡기겠소.”
수원상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사뿐히 절을 올렸다.
“예, 왕야.”
그녀는 곧장 학평관과 함께 곳간으로 가 내부를 확인했다. 점잖은 성격인 그녀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어르신, 왕야께서 집안일을 제게 넘기셨지만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늘 자신을 ‘저’라 지칭했고 위세를 부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던 학평관도 예를 갖춰 말했다.
“측비 마마, 그리 예를 차리시다니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소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인이 온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수원상은 일부러 백천범을 언급했다.
“왕야께서 아직 왕비 마마의 나이가 어려 일을 도맡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하시더군요. 왕비 마마께서 조금 더 크시면 곧바로 이 일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집안일은 마땅히 정실께서 관리하셔야지요.”
“측비 마마, 절대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학평관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왕비 마마께서 이곳에 계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왕야께서 언젠가는 분명 내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일을 관리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혹 왕자 아기씨라도 태어나신다면 소인 생각에 주인마님의 자리는 틀림없이 측비 마마의 것이 될 것입니다.”
수원상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비 마마께서 왜 이곳을 떠난다는 것인지요? 그날 기홍 아가씨에게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사이가 아주 좋다 들었습니다. 왕야께서 직접 그네를 만들어 주실 만큼 왕비 마마를 아주 총애하신다고 하던걸요.”
“아이고. 그건 다 지난 일이지요.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삼으시고 늘 떠받들어 주셨지요. 왕비 마마께서 나이는 어리지만 아주 영리하셔서 늘 귀여움을 독차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왕야께서 갑작스레 돌변하셔서는 회림각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저 후원에 방치해 두시고 아무런 신경도 쓰시질 않는 걸 보면 조만간 왕비 마마를 내치시려는 듯합니다.”
수원상은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 * *
두 부인을 들인 뒤로 묵용감은 늘 후원으로 가 그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종종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평함을 위해 낙성각에 한 번, 벽하각에 한 번 번갈아 찾아갔지만 점차 낙성각을 찾는 일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수원상과 고청접이 그리 바라는 일은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가 후원에서 잠을 청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묵용감은 낙성각으로 향했다. 그는 정원을 살피며 수원상과 어떤 꽃을 심어야 할지, 어떻게 정돈해야 할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원상은 그가 원예와 조경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곧장 하인들에게 연못을 만들 구덩이를 판 뒤 화단을 정리하고 꽃을 심었다. 묵용감도 관심이 많은 척 적극적으로 임했다. 자신이 직접 땅을 파서 모종을 심기도 했다.
수원상은 그의 옆에서 모종을 건네거나 물을 주며 부창부수의 면모를 뽐냈다. 사실 그녀는 손에 흙을 묻히는 일을 싫어했지만, 자신의 지아비와 함께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함께 지낼수록 그녀는 묵용감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간혹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땐 한껏 집중한 표정과 깊은 눈매에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조금 차갑기도, 근엄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온화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부군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닭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하더니 대문을 넘어왔다. 노랑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챈 시녀 추문은 곧장 앞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내쫓았다.
“가! 어서 썩 나가!”
놀란 노랑이가 날개를 퍼덕댔다.
땅에 쪼그려 앉아 모종을 심고 있던 묵용감은 고개를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닭이 사람 말도 알아듣는 것이냐?”
얼굴이 붉어진 추문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랑이는 그녀가 더 이상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노랑이는 묵용감 곁으로 다가와 발밑을 몇 차례 쪼아 댔고 묵용감도 별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수원상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노랑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슴이 흙을 파내자 지렁이 몇 마리가 따라 올라왔다. 묵용감이 지렁이를 집어 노랑이 앞으로 던져 주자 노랑이는 고개를 숙이고 잽싸게 쪼아 먹었다. 가만히 노랑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수원상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왕야께서도 저 닭을 좋아하십니까?”
묵용감이 담담히 말했다.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이왕 지렁이가 나왔으니 그저 먹이로 준 것뿐이오.”
수원상이 말했다.
“이 닭은 말을 참 잘 듣는 듯합니다. 아마 왕비 마마께서 잘 가르치신 덕이겠지요. 몇 차례 이곳을 멋대로 찾았지만, 정원을 함부로 더럽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가 무엇을 가르쳤겠소?”
수원상이 그를 떠보았다.
“왕비 마마도 불러 함께 정원을 꾸미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에 몰두했다. 일을 끝마친 그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자, 노랑이도 그의 곁으로 뛰어가 발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매를 늘어뜨린 채 노랑이의 깃털을 쓰다듬는 그의 표정에서 기분을 추측해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왕비는 조만간 저택을 떠날 것이오. 그러니 왕비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수원상은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왕야, 백 승상과의 일 때문에 왕비 마마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서려 있는 냉기에 흠칫 놀란 수원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 * *
고청접은 수원상과 사이가 좋았지만, 묵용감이 늘 낙성각에만 발길을 주고 벽하각에는 오지 않는 탓에 심기가 불편했다.
묵용감이 수원상을 본처라고 여겨 친밀하게 대하는 듯하자, 낯짝이 두꺼웠던 그녀는 묵용감을 보기 위해 날마다 낙성각을 찾았다. 밥과 차를 얻어먹으며 묵용감이 떠날 때까지 그녀도 낙성각을 지켰다.
매번 이런 식이다 보니 수원상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초왕이 자신을 찾아오는데 서비가 설쳐 대다니!
백씨 집안의 아가씨가 쫓겨나면 정비의 자리는 조만간 자신이 차지하게 될 테니 초왕이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집안의 살림살이까지 주관하게 된 마당에 앞일은 안 봐도 훤했다.
처음 집안일을 넘겨받았을 때만 해도 수원상은 겸손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벌써 정실이라도 된 듯 기세등등해지기 시작했다. 고청접에게도 더 이상 예전처럼 대하지 않았고, 말투와 행동에 자신이 한층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고청접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지만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늘 그녀를 따르며 살갑게 대했다.
수원상은 고청접과 거리를 두기 위해 백천범과 가깝게 지내기로 했다. 음식이나 작은 선물을 준비해 종종 남월각에 가져다주니 백천범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수원상의 처소에 놀러 오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비록 묵용감이 백천범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지만 수원상은 그녀와 가까워지는 게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과거 묵용감과 백천범의 사이가 아무리 좋았다 한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초왕이 직접 그런 말을 내뱉은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일은 절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놀러 온 백천범과 마주친다고 한들 묵용감은 변함없이 냉랭한 태도를 취할 것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백천범도 분명 크게 낙담할 것이고,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묵용감이 있을 땐 백천범도 놀러 오는 것을 꺼려했다. 어린 계집아이지만 자신의 분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백천범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그녀와 한동안 가깝게 지내다 보니 백천범은 계략 따위를 쓸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 아이처럼 단순했다. 백천범에게 가졌던 오해가 점차 풀리자 수원상은 더더욱 고청접과 왕래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