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몇 걸음 내딛던 묵용감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가 떠날 때만 해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는데, 지금 보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극성맞게 소란을 피우긴 해도 어린 계집치고 몸은 제법 튼튼한 듯했다. 어쨌든 그날 밤 물에 빠져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초왕의 안색이 조금 나아지자 무관 하나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왕야, 방금 그분은 누구십니까?”
묵용감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본왕의 왕비다.”
그가 말하는 왕비는 백 승상의 다섯째 아가씨였다. 무관들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원수의 딸이라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초왕이 저리도 제멋대로인 왕비의 태도를 묵과하다니.
모양새 빠지게 이러쿵저러쿵 따져 물을 수도 없었기에 더 이상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백천범은 일부러 그를 모른 척한 것이었다. 그날 후원에서 자신을 못 본 척 지나친 묵용감에게 또다시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이상 이렇게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는 부엌에서 쌀 부스러기 한 보자기를 얻어 가슴에 안고 후원으로 돌아갔다. 그에 신난 노랑이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보자기에서 쌀을 한 줌 꺼내 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너는 닭이 아니라 완전 먹보야. 돌아가서 먹으면 되는 걸 이렇게 성화를 부리다니.”
노랑이는 그녀의 잔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땅을 쪼았다.
몇 발짝 걷다 땅에 쌀 뿌리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시녀와 머슴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입을 가리고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후원에 도착하니 마침 수원상과 고청접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백천범은 곧장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언니들, 어디 가요?”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왕비인 데다 자신들의 일을 망쳐 놓는 탓에 수원상과 고청접은 백천범을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면상 미소는 잃지 않았다.
“그저 함께 거니는 중입니다.”
백천범은 늘 그녀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지만 나이 차이 때문에 함께 하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두 왕비는 어려운 말을 썼기 때문에 백천범은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규율도 잘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인 자신과 두 왕비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백천범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두 왕비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따라나서지는 못했지만 속으론 자신을 불러 주기만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두 왕비는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백천범이 호의를 담아 말했다.
“언니들, 왕야께서 돌아오셨어요.”
수원상과 고청접은 그녀의 말에 기분이 들떠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냉랭하게 말했다.
“저희는 왕야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지치셨을 테니 지금은 편히 쉬셔야지요. 왕야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찾아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지만 백천범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고청접은 그녀의 뒷모습을 매섭게 흘겨보며 작게 말했다.
“왕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 죽겠습니다. 왕야께서 돌아오셨으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제가 똑똑히 지켜볼 것입니다.”
수원상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전에는 왕야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니, 다시 그리되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 모습 좀 보십시오. 우리와 견줄 수나 있는 모습입니까? 왕야께서 눈이 잘못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닌 솜털도 가시지 않은 저 어린 계집아이를 원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늘 거침없는 그녀의 말에 수원상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고청접은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왕야께서 오늘 밤 분명 형님의 처소로 가실 것입니다. 형님의 처소는 남월각과 가까우니 조심하십시오.”
수원상의 시녀 추문이 곧장 답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마마. 오늘 밤에는 소인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닭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발이라도 붙였다간 그대로 목을 비틀어 버릴 것입니다.”
고청접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자꾸 우리에게 화를 입히면 우리도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조만간 그 닭의 목을 비틀어 보자. 왕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봐야겠다.”
수원상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좋지 않은 방법인 듯합니다. 왕비가 왕야께 고하기라도 하면…….”
“형님도 참, 왕야께서 거들떠보시지도 않는데 고하긴 뭘 고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닭 한 마리일 뿐입니다.”
잠시 뒤 그녀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그날 그 닭 때문에 일을 그르쳤는데 형님께서는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잠시 망설이던 수원상이 입을 열었다.
“늘 왕비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닭을 잡는 것도 쉽진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추문이 말했다.
“어쨌든 두 처소의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다음번에 소인이 방도를 찾아 닭을 꾀어내 붙잡겠습니다.”
고청접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그리하는 게 좋겠다. 늘 남을 괴롭히는 왕비에게 당하는 맛도 보여 줘야지.”
산책을 하던 두 왕비는 어느새 회림각 입구에 다다랐다. 문 앞을 지키는 머슴은 두 왕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고청접이 물었다.
“왕야께서는 돌아오셨는가?”
머슴이 말했다.
“예. 몇몇 손님을 모시고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손님이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풀이 죽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고청접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참으로 못됐습니다. 손님이 온 걸 알면서도 말도 안 해 주고 이렇게 헛걸음을 하게 하다니요? 정말 돼먹지 못한 왕비입니다.”
수원상이 말했다.
“되었습니다. 저택에 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왕비의 본색은 좀 더 시일이 지난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지만, 아직 왕야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괜스레 심기를 건드렸다간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고청접이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계산을 해 봤더니 왕비가 저택에 온 지도 이미 세 달이나 지났습니다. 헌데 왕야께서는 아직까지도 저리 먹여 주고 재워 주며 내쫓지도 않고 돌봐 주시다니요. 왕야와 백 승상은 서로 원수가 아닙니까? 헌데 원수의 딸을 키워 주다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입니까?”
나이가 조금 더 많았던 수원상은 그녀보다 더 생각이 깊었다.
“아우님, 그리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왕야께서 왕비를 어찌 대하시는지 아직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은 말다툼을 한 상태라고 하니 언젠가는 다시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괜히 경솔하게 행동했다간 스스로를 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택에서 쫓겨나는 것은 왕비가 아닌 우리가 되겠지요.”
고청접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리될 수는 없지요. 둘의 사이가 다시 좋아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비의 자리는 형님의 것입니다. 함께 방도를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수원상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월각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 * *
묵용감은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 서재에서 서예를 했다. 붓에 먹을 묻힌 그는 서비가 문예를 비롯한 각종 기예에 능하다는 황제의 평을 떠올렸다. 그녀를 서재에 데려오면 분명 좋은 짝이 될 것이었다.
그가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벽하각으로 가 서비를 데려오거라.”
왕야의 초대에 고청접은 날아갈 듯 신이 났다. 서둘러 머리를 단장하고 연지를 찍어 바른 뒤 머슴을 따라 회림각으로 향했다.
서재에 들어선 그녀는 살갑게 인사를 올렸다.
“왕야께서 소첩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아주 예쁘오, 청접. 별일은 아니고 본왕이 서예를 할까 하는데 먹을 좀 갈아 줄 수 있겠소?”
그의 말에 그녀는 뛸 듯이 기뻤지만 단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는 묵용감 곁으로 다가와 먹을 집어 들고 벼루에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힘겹게 각종 기예를 배운 것은 훗날 더 좋은 신랑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먹을 갈며 묵용감의 붓끝을 힐끗 바라본 그녀는 그가 무엇을 쓰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왕야께서는 왕희지王羲之 선생의 <난정집서蘭亭集序> 를 쓰시는군요.”
묵용감이 담담히 말했다.
“바로 알아보겠소?”
“예. 소첩도 예전에 쓴 적 있습니다. 왕희지 선생의 행서行書 중 가장 유명한 서첩이지요. 예전에 그의 해서楷書 <황정경黃庭經>, 초서草書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초월첩初月帖>을 모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왕희지 선생은 어릴 때 숙부를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엔 위부인衛夫人에게서 서풍을 익혔지요. 위부인은 그의 이모이자 아주 유명한 서예가였습니다. 초서는 장지張芝 선생에게 배웠…….”
묵용감이 그녀의 말을 끊고 갑작스레 물었다.
“서비도 화본을 보오?”
“예?”
서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작스레 화본을 묻다니? 왕야의 생각은 널을 뛰는 듯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화본은 격이 떨어지는 서책이었다. 본 적은 있긴 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화본은 읽지 않았습니다. 소첩은 그런 속된 물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듣자 하니 나쁜 짓을 가르치는 저속한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하더군요.”
묵용감이 말했다.
“그렇군. 본왕에게 몇 권 있어 좋아하면 읽어도 좋다고 하려 했는데, 읽지 않는다니 그럼 되었소.”
고청접은 얼굴이 빨개졌다.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묵용감이 붓을 내려놓았다.
“좀 피곤하니 그만 돌아가 보시오.”
고청접은 대체 그가 왜 기분이 언짢아진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왕야, 소첩이 몇 글자 적어 보아도 될는지요?”
하지만 묵용감은 종이를 치우며 말했다.
“그저 글자를 쓰는 걸 좋아할 뿐, 남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은 관심 없소.”
고청접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허면 소첩이 왕야께 고쟁을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서왕비를 모셔다 드리거라.”
고청접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리도 언짢아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저 화본이 좋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화본은 어디다 내놓을 수도 없는 서책이었기 때문에 말실수를 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묵용감이 그만 돌아가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회림각을 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