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월향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때 깨어 있으셨던 것입니까? 헌데 왜 눈을 뜨지 않으셨습니까?”
백천범이 멋쩍은 듯 말했다.
“왕야께서 혼쭐을 내실까 봐 무서워서 그랬지.”
* * *
백천범이 물에 빠져 가장 화가 난 사람은 고청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원상의 뒤를 이어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도 옹졸한 성격인 데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백천범이 일부러 흉계를 쓴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청접의 마음속에 백천범에 대한 미움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수원상이 그녀를 찾아왔다. 기분이 좋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수원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우님, 노여움 푸시지요. 왕비께서 그런 일을 저지르시긴 했지만 자신의 목숨도 위험할 뻔했습니다. 결국은 스스로를 해하였으니 왕비께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청접은 손가락에 낀 호갑투護甲套를 만지작거리며 한탄했다.
“이번에는 물에 뛰어들었으나 다음번에는 또 무슨 계략을 꾸밀지 모를 일입니다. 형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수원상은 그때 침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면 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왕야께서 교외 군영으로 떠나셨다고 하니 며칠간은 저택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고청접이 말했다.
“그래도 며칠 뒤면 곧 돌아오실 테니 다시 우리를 찾아오시거든 이렇게 기회를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수원상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렸다.
“듣자 하니 왕야와 왕비께서 한동안 사이가 아주 좋으셨다 합니다. 황실 동물원에서 왕비 마마를 위해 공작새를 데려오기도 하고, 회림각에 있는 그네도 왕야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 합니다.”
고청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정말입니까? 헌데 지금은 왜 그리도 미움을 샀단 말입니까?”
수원상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백 승상에게 원한이 있으시니 아무리 왕비 마마와 사이가 좋다 한들, 그자를 장인으로 모시는 게 어렵지 않았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고청접이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그네를 선물하셨다는 말은 그간 왕비께서 회림각에 자주 드셨단 말이겠지요. 우리라고 못 갈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왕야께서 저택을 비우셨으니 가서 구경도 좀 하고 하인들에게 이 일을 좀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회림각의 하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요.”
꽤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 수원상이 곧장 응했다.
“그럼 한번 구경이라도 가 볼까요?”
두 사람은 함께 회림각으로 향했다. 하지만 회림각의 중문 머슴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머슴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두 왕비께서는 왕야를 찾아오셨는지요? 왕야께서는 지금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며칠 뒤에 돌아오실 것입니다.”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안 계신 건 나도 아네. 그저 들어가 구경 좀 하려는 것일세.”
머슴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아직 저택의 규율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다른 곳은 얼마든지 구경하셔도 상관없지만 이곳 회림각만큼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회림각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는 왕야의 명이 있었습니다.”
수원상이 물었다.
“허면 왕비 마마는?”
“예전에는 마음대로 드나드셨지만 지금은 조금 어렵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되었단 말인가? 왕비 마마께서 왕야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가?”
“그것이… 소인은 그저 문지기 머슴일 뿐이라 자세한 내막은 잘 모릅니다.”
수원상이 말했다.
“규율이 그리하다니, 그만 돌아가 보겠네.”
하지만 고집 센 고청접이 머슴에게 물었다.
“혹시 모르니 총 관리인에게 물어봐 주겠는가?”
머슴이 당황해하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고청접이 수원상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상관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요.”
수원상이 주저하며 말했다.
“하지만 왕야께서 책임을 물으시면…….”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계셨다면 분명 허락하셨을 테니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화도 한 번 내지 않으셨으니 아직 총애를 받는다고 할 순 없어도 상냥하게 대해 주시는 편이 아니십니까?
수원상을 설득한 그녀는 바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회림각 안으로 들어갔다.
소식을 전해 들은 학평관은 곧장 입구로 향했지만, 왕비들은 이미 대문을 넘은 상태였다. 차마 내쫓을 수 없던 학평관은 웃는 얼굴로 그녀들을 맞이하며 예를 갖췄다.
고청접도 활짝 웃으며 교태를 부렸다.
“형님과 구경 좀 하고 싶어 찾아왔는데, 괜찮겠지요?”
“예, 그럼요.”
학평관은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마음껏 구경하시지요. 혹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소인께 분부만 내리십시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가다 기홍이 빨래를 너는 모습을 보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기홍 아가씨.”
기홍은 두 왕비를 보고 급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측비 마마와 서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 없어요.”
수원상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왕야를 모시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편히 대하세요.”
기홍은 그녀들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두 왕비야말로 초왕의 진짜 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손하게 말했다.
“소인은 그저 하인일 뿐입니다. 주인을 뵐 땐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수원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를 아주 예쁘게 빗으셨군요. 여기에 이 뒤꽂이를 꽂으면 더 예쁠 듯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옥 장식 뒤꽂이를 기홍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기홍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고청접이 그녀를 붙잡았다.
“움직이지 말아요. 왕야를 위해 고생하는 아가씨를 위해 측왕비께서 주시는 마음이니깐. 저와 측왕비 모두 항상 아가씨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맞다, 녹하 아가씨는요?”
마침 방에서 나온 녹하는 두 왕비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녹하에겐 고청접이 장신구를 선물했다. 그리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녹하 아가씨는 참으로 예쁘게 생겼네요. 분명 좋은 낭군을 만날 거예요.”
녹하가 얼굴을 붉혔다.
“소인에게 혼사는 아직 먼 일입니다.”
고청접이 말했다.
“저는 열여섯에 혼사를 치르게 되었지요. 녹하 아가씨는 몇 살인지요?”
녹하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소인은 올해 열일곱입니다.”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 한 살이 많네요. 걱정 말아요. 측비께서 좋은 사내를 찾아 연을 이어 주실 테니까.”
녹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물도 주고 덕담도 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때, 녹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림각은 앞뜰 정원의 풍경이 가장 좋습니다. 그곳을 구경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고청접이 말했다.
“좋지요. 아가씨들도 별일 없으면 우리와 함께 거니는 게 어떻습니까?”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녹하와 기홍도 그들을 따라 연못가로 향했다. 항아리 옆을 지나자 녹하가 빠르게 연꽃을 훑으며 말했다.
“수련이 점점 더 예쁘게 자라네.”
수원상과 고청접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수련을 감상하며 감탄했다. 그러다 항아리 속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녹하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물고기도 기르시나 봅니다.”
“아닙니다.”
녹하가 재빨리 답했다.
“왕비 마마께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왕야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어항입니다. 특별히 이곳에 수련을 옮겨 심으라고 분부하셨지요.”
드디어 묻고 싶은 화제가 나오자 수원상이 두 시녀를 떠보기 시작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께 아주 잘해 주시나 봅니다.”
“아주 잘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기홍이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늘 회림각으로 식사를 하러 오십니다. 이곳에 왕비 마마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지요.”
그녀의 말에 수원상과 고청접이 깜짝 놀랐다. 이곳에 왕비의 방까지 있다니!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왕야께서 조금은 사납게 대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 밥을 먹을 때도 갑자기 식탁을 내리치시는 탓에 깜짝 놀랐지요.”
녹하가 말했다.
“두 분이 말다툼을 하신 듯합니다. 자주 말다툼을 하셨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좋아지실 것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아직 어리셔서 모르는 게 많아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시곤 합니다.
지난번에는 말다툼을 하시다가 왕야께 삿대질을 하면서 화를 내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일로 한동안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못 본 체하셨지요.”
고청접과 수원상은 서로를 마주 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크게 웃었다.
“왕비 마마께서 그렇게나 모르시다니요. 어찌 왕야께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흥이 떨어진 두 사람은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서둘러 회림각을 떠났다.
녹하와 기홍은 방 안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기홍이 뒤꽂이를 빼어 탁자에 올려 두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도야?”
녹하도 고청접에게 받은 장신구를 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슨 의도겠어. 정보 좀 캐내려는 거였겠지.”
기홍이 말했다.
“내일 뒤꽂이를 다시 돌려줘야겠어. 두 왕비의 밀고자가 될 순 없으니까.”
녹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하러 다시 돌려줘. 어쨌든 두 왕비는 우리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고, 우린 답을 해 줬으니 그에 대한 보수를 받은 것뿐이야. 게다가 우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 * *
묵용감은 사흘 뒤 몇몇 무관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관들은 모두 묵용감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군영에서 함께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묵용감의 저택에서 좋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난리를 쳤다.
서로 왕래가 잦은 부하들이었기 때문에 묵용감도 흔쾌히 승낙했고, 그들을 이끌고 저택에 돌아온 것이었다.
앞뜰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백천범과 마주쳤다. 자그마한 몸집을 꼿꼿이 세운 그녀의 발밑엔 신이 난 듯 뛰어다니는 노랑이가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늦추었다. 백천범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린 계집은 분명 그를 봤음에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치켜세우고 당당하게 그의 곁을 지나쳤다.
“…….”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그녀도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무거운 실망감이 마음을 움켜쥐자 그의 안색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를 당장에라도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부하들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뒤따르던 부하들도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누구시란 말인가? 시녀 차림새가 아닌 걸 보면 분명 세 명의 부인 중 한 명일 텐데, 가장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도 인사도 없이 가 버리다니……!
자그마한 몸집에 귀티라곤 없는 그녀의 모습에 다들 의아해하며 초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부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