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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7)화 (116/1,192)

제117화

학평관은 그녀의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합방을 하러 들어간 왕야가 대체 왜 물에 빠지셨단 말인가?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크게 소리쳤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자들은 당장 호수로 가거라. 왕야께서 물에 빠지셨다, 어서!”

순식간에 사방에서 등불이 켜졌다. 하인들은 우르르 고청접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고, 묵용감이 뛰어내린 창문으로 똑같이 뛰어내려 그를 찾았다. 호숫가에선 횃불을 켠 배 몇 척이 호수 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명호 주변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소식이 회림각에도 전해지자 영구와 가동도 친위병을 이끌고 황급히 명호로 달려왔다.

호수를 따라 둥글게 횃불을 놓았지만, 연잎이 워낙 빽빽해 빛이 잘 닿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에 잎이 마구 흔들려 물속에서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순간 물속에서 머리 하나가 튀어 올라오더니 크게 소리쳤다.

“여기는 없습니다!”

하인들의 외침이 점점 더 잦아지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하나같이 찾지 못했다는 말뿐이었다.

초조해진 가동과 영구가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누군가 조용히 그들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옆에 있던 머슴에게서 횃불을 뺏어 든 영구가 자세히 살피더니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왕야를 찾았다!”

묵용감이 뭍에 다다라서야 하인들은 그의 품에 누군가 안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그마한 머리만 겨우 물 밖으로 나와 있었고, 옷자락은 물살이 움직이는 대로 둥둥 떠다녔다.

하인들이 재빨리 묵용감을 끌어 올렸다.

영구는 그의 품 안에 있던 이를 받아 들려고 했지만, 묵용감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흘길 뿐이었다. 곧 묵용감이 침착하게 분부했다.

“남월각으로 의원을 부르거라.”

영구와 가동은 그제야 품 안에 있는 사람이 백천범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머리를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묵용감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니 기절한 듯했다.

묵용감은 남월각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학평관이 그를 따르며 권유했다.

“왕비 마마는 소인들이 모실 테니 왕야께서는 어서 회림각으로 드셔서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젖은 옷차림으로 계시다간 병이 나실지도 모릅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백천범이 쓰러진 채 돌아오자 남월각에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묵용감은 서둘러 백천범을 침대로 옮긴 뒤, 월향과 월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너희는 무얼 하고 있었길래 왕비를 혼자 호수에 보낸 것이냐?”

월향과 월규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지만, 감히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었을 뿐더러 그들 또한 왕비의 처참한 모습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 시녀는 그저 자신을 탓하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학평관이 또 한 차례 묵용감에게 간언했다.

“왕야, 옷부터 갈아입는 게 어떠신지요? 병이 날까 염려되옵니다.”

묵용감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영구가 입을 열었다.

“소인이 이미 차씨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옷을 가져오면 잠시 짬을 내어 갈아입으시지요.”

묵용감은 침대 옆에 앉아 백천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는 누구보다 크게 놀랐다. 그녀의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회림각 연못에 빠지고도 며칠이나 앓았던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어두운 밤에 수심이 깊은 명호에 빠진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는 그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무작정 헤엄쳤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는 대책도 없이 물속으로 직접 내려가 손으로 더듬거리며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옷이 손에 닿았고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 올렸다.

그때만 해도 백천범은 의식이 있었다. 그를 발견한 그녀가 무어라 말한 듯했지만 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어렴풋이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고개를 늘어뜨리며 정신을 잃었다.

월향과 월규는 백천범의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새 옷을 가지러 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묵용감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감히 묵용감을 내쫓을 수 없었던 월향과 월규는 조심스럽게 백천범의 옷을 갈아입힌 뒤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짜냈다. 그때, 기홍과 녹하가 묵용감의 옷을 가지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묵용감은 그제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옆방으로 향했다.

잠시 뒤, 그가 다시 백천범의 방으로 돌아왔을 땐 의원 유일첩이 백천범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맥을 짚고 입 안을 살핀 뒤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다행히 무탈하십니다. 그저 기력이 달려 쓰러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물에 빠지시면서 물을 많이 드신 듯하니 그 물을 게워 내야 할 것입니다. 소인이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묵용감이 물었다.

“구토를 해야 하는 것이오?”

유일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을 많이 삼키신 듯합니다. 이럴 땐 반드시 그 물을 게워 내야 합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안아 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는 그녀의 등 몇 곳을 꾹꾹 눌렀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백천범이 물을 토해 냈다.

묵용감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유일첩에게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하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유일첩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절한 뒤 처방전을 작성했고, 학평관은 약을 가져올 하인을 붙여 유일첩을 배웅했다.

묵용감은 그제야 월향과 월규에게 물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왕비는 대체 무엇 하러 명호에 갔단 말이냐?”

월향은 두려움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나마 조금 더 대담했던 월규가 고개를 숙인 채 고했다.

“오늘 왕야와 측비, 서비 마마께서 배를 타고 연방을 따시는 모습을 보시고는 왕비 마마께서 무척이나 부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배를 지키는 머슴이 상부의 분부라며 왕야와 측비, 서비 마마 외에 다른 사람은 배를 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인 추측으로는 왕비 마마께서 밤에 몰래 타러 가신 듯합니다.”

“너희에게 말도 없이 가 버렸단 말이냐?”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만약 말씀하셨다면 소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비 마마를 막았을 것입니다.”

월향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이리 되신 것은 모두 소인들 탓입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월규도 무릎을 꿇고 자신의 탓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묵용감은 두 시녀를 내버려 둔 채 다시 침대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왕비를 잘 보살피거라. 만약 또다시 이런 실수를 범했다간 벌로 곤장을 내릴 것이다. 왕비가 언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지 지켜보는 눈이 많다. 하지만 본왕은 절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떼 지어 있던 하인들도 모두 초왕의 뒤를 따랐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던 남월각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월향과 월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가 백천범 곁을 지켰다.

월향은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연신 가슴을 두드렸다.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왕야께서 벌을 내리셨으면 목숨이 반쯤은 날아갔을 거야.”

월규가 말했다.

“왕야께서도 벌을 내리실 수 없었을 거야. 우리가 곤장을 맞으면 누가 왕비 마마를 모시겠어.”

“저택에 시녀가 얼마나 많은데, 학평관 어르신이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만이지.”

“누가 우리보다 왕비 마마를 더 잘 모시겠어? 우리야 진심을 다해 왕비 마마를 모시지만 다른 사람도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지.”

월향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왕야께서 아직 왕비 마마께 정이 남으신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까지 마음 졸이시진 않으실 텐데 말이야.”

“글쎄. 아까 왕야께서 그러셨잖아. 바깥사람들은 왕비 마마께서 언제 돌아가시는지만 기다린다고. 정말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으신 것뿐인지도 모르지. 왕비 마마의 목숨만은 살려 두시려고 말이야.”

* * *

이틀 연속 백천범이 큰 소란을 일으킨 탓에 후원에는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왕야의 총애를 잃은 백천범이 일부러 왕야와 두 왕비 사이를 방해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은 점점 무성해져 학평관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차씨에게 물었다.

“정말 그리 말하는 사람이 있더냐?”

“그렇다니까요. 후원에는 이미 자자합니다.”

학평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차씨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아직 어린 차씨는 짐짓 어른인 척을 하며 이야기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여인들은 다들 질투심이 많으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하필 이틀 밤 연속으로 그리 큰 소동을 피우신 것도 참 교묘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목숨을 거실 만큼 중한 일이란 말이냐?”

“그게 바로 왕비 마마께서 큰일을 하실 분이란 걸 증명하는 셈이지요!”

학평관이 그의 머리를 손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허튼소리도 작작 해야지! 이 소문은 네 입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 회림각까지 퍼지는 날엔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

차씨가 억울해하며 말했다.

“사부님, 회림각에는 저 말고도 밖을 자주 나다니는 이들이 많은데 그자들이 퍼뜨린 것도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까?”

학평관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너처럼 이렇게 입이 가볍지 않다!”

* * *

묵용감은 백천범을 구해 준 뒤로 그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하인에게 남월각으로 연방 한 광주리를 보내라고 분부하며 한마디 덧붙일 뿐이었다.

“한 번만 더 마음대로 배를 탔다간 물에 빠져 죽거나 곤장을 맞고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전하거라.”

백천범은 연방을 받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가 전한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열매를 꺼내 두 시녀와 나눠 먹었다.

두 시녀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할 뿐이었다.

월향이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거든 꼭 소인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소인들이 왕비 마마와 함께 가겠습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까지 일에 휘말릴까 봐 일부러 말 안 한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혼자 책임지면 되니깐.”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마.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와 월향은 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왕비 마마와 함께 묻히겠지요. 그날 마마께서 왕야의 표정을 못 보셔서 그렇지, 의원께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하셨다면 당장이라도 저와 월향의 목을 벨 것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백천범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도 알아. 왕야께서 내가 죽는 것까지는 원치 않으셔서 그러신 거야. 우리 아버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시려고. 어제 왕야가 하는 말은 나도 다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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