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백천범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언니들, 재미있었어요?”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습니다. 왕비 마마와 함께 가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백천범이 광주리에 든 연방을 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조금밖에 못 딴 것이에요? 저렇게나 많은데.”
수원상이 말했다.
“아직 많으니 며칠 뒤에 또 딸 생각입니다.”
백천범은 자신에게 하나만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광주리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원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우스웠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을 것을 탐내는 왕비라니. 그녀가 광주리에서 연방 하나를 꺼내 백천범에게 건넸다.
“왕비 마마, 갓 딴 것이니 하나 드셔 보십시오.”
신이 난 백천범이 손을 뻗어 연방을 받으려고 하는데, 묵용감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도 욕심이 심해서야! 눈에 보이는 족족 다 가지려고 한단 말이오?”
그녀는 손을 떨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의 말에 더 이상 권하기 난감했던 수원상은 고청접과 함께 묵용감의 뒤를 따라 돌아갔다.
백천범은 홀로 정자에 서서 멀어지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연방 하나 먹기 되게 힘드네.”
그녀는 우울한 모습으로 남월각에 돌아갔다.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월향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맥이 풀린 모습이십니다.”
월규가 그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방금 왕야께서 측비와 서비를 데리고 회림각으로 가셨거든. 그래서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봐.”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다 같이 연방을 땄으면서 나한테는 하나도 안 주잖아.”
월향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그게 그리 울적하십니까? 소인이 조만간 따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백천범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가면 안 돼? 아직 배가 호수에 있단 말이야.”
여인이라면 대부분 배를 타며 연방을 따는 일을 즐거워했기에, 월향과 월규는 기꺼이 그녀를 따라 명호로 향했다. 배는 호숫가에 묶여 있었고, 머슴 한 명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월규가 다가가 그를 깨웠다.
“이봐, 왕비 마마께서 연방을 따고 싶으시다니까 그만 졸고 어서 노를 저어 줘.”
머슴은 눈을 비비더니 백천범이 보이자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왕비 마마, 그것이…… 좀 전에 왕야와 측비, 서비 마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배를 탈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소인이 마음대로 배를 태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감히 왕비 마마를 뵙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왕비 마마이시다.”
월규에게 혼쭐이 난 머슴이 급히 말을 이었다.
“나한테 화를 내도 소용없어. 난 그저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니까. 그렇게 따져 묻고 싶으면 학평관 어르신한테 가서 따지든가. 허락만 받아 오면 바로 태워 드릴게.”
월규는 머슴과 한바탕 싸울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백천범과 월향이 그녀를 말렸다.
백천범이 말했다.
“됐어. 왕야께서 그렇게 지시를 내리셨나 봐. 방금 전에 나를 언짢게 바라보시더라고. 괜히 머슴에게 뭐라고 하지 마.”
월규가 식식거리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대체 왜 그러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잘해 주시다가 지금은 이리도 몰인정하게 구시다니요.”
그녀의 말이 묵용감의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된 백천범은 서둘러 그녀를 끌고 갔다.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아버지는 왕야의 원수니까 나까지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적어도 날 해치지 않고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을 베푸시는 거라고. 그러니까 나도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 돼.”
월규가 한탄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남에게 얕보이기 참으로 쉬운 분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조만간 그 두 분도 분명 왕비 마마의 머리 위로 올라가려고 들 것입니다.”
백천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올라가라지, 뭐. 어쨌든 난 이곳에 얼마 있지도 못할 테니까. 나중에 기홍 언니한테 가서 너희를 다시 회림각에 보내 달라고 부탁할 거야. 너희한테도 거기가 더 좋을 테니까.”
제 몸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왕비가 시녀 걱정을 하다니! 월규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옆에 있던 월향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연방을 드시고 싶으시면 조만간 소인이 부엌 시녀를 보내 사다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슬쩍 뒤를 돌아 배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번거롭게 할 거 없어. 나도 다 방법이 있거든.”
월향은 무슨 수로 연방을 얻을 것이냐고 백천범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어젯밤, 수원상과 묵용감은 거사를 치르지 못했다. 그래도 묵용감은 공평을 기하기 위해 오늘 밤엔 고청접의 처소에 들기로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학평관을 이끌고 벽하각으로 향했다.
고청접도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이었지만, 그녀 위로 언니가 있었다. 고청접보다 외모가 훨씬 뛰어난 그녀의 언니는 가문을 빛내기 위해 입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초왕과의 혼사는 고청접이 치르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원치 않던 혼사였기에 자신의 팔자를 남몰래 한탄했지만, 어제 초왕을 보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언니는 입궁을 한다 해도 언제 황제의 간택을 받을지 불확실했다. 그저 한낱 궁녀가 될지도 모르는 삶보단 초왕의 셋째 부인인 서왕비가 되는 게 훨씬 더 나았다. 수많은 후궁을 제치고 어느 세월에 출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초왕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살랑이는 봄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에게 사랑을 받고 자식을 낳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묵용감이 자신을 찾아오자 기쁨을 감출 수 없던 그녀는 생글거리는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수원상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무관인 아버지 때문인지 그녀는 담력이 좋았다. 그녀는 어여쁜 미소로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어제처럼 잠시 담소를 나눈 뒤에 신방에 들 생각이었다.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고청접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왕야. 이만 침소로 드시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은 자신보다 더 시원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본왕도 내일 일찍 나가 봐야 하니 이만 쉬는 게 좋겠소.”
고청접이 물었다.
“내일 큰 무예 시합이 열린다지요?”
묵용감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그걸 어찌 아시오?”
“소첩의 아버지가 군기대신인지라 매년 칠월만 되면 며칠씩 무예 시합에 가셔야 했지요. 그래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군기대신은 본왕과 아주 익숙한 사이군.”
“아버지께서는 왕야의 부하이시지요. 늘 제게 왕야께서 얼마나 용맹하시고 위엄 있으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여 소첩도 마음속으로 항상 왕야를 존경했었지요.”
“허면 스스로 시집을 오겠다고 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왕야께서는 동월국의 군신이자 영웅이 아니십니까? 왕야께 시집을 온 것은 다시 태어나도 얻지 못할 행운입니다.”
그녀의 말이 싫지만은 않았던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떤 이는 강제로 본왕에게 시집을 왔는데, 스스로 오길 원했다니 참으로 기쁘오.”
고청접은 그가 말한 어떤 이가 수원상인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당돌한 질문인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실로 향했다. 고청접은 묵용감의 도포를 벗긴 뒤, 이불을 걷고는 부끄러워하며 그를 침대로 청했다.
묵용감은 짧게 미소만 지으며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로 그녀를 뒤따랐다. 스스로 옷을 벗은 고청접은 얇은 적삼과 속바지만 입은 채 얼굴을 붉히며 묵용감의 반대쪽으로 올라와 누웠다.
묵용감이 자신에게 손을 뻗지 않자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왕야.”
묵용감은 지금쯤 자연스레 더운 피가 끓어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백천범의 곁에 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청접은 분명 백천범보다 훨씬 더 빼어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풍만한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를 자랑하는 미인을 앞에 두고, 어째서 그런 통나무한테 마음이 흔들린단 말인가?
고청접은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묵용감이 아무런 미동도 없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그의 가슴에 얹고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왕야, 소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게 아니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기울여 그녀의 적삼 매듭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는 고청접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고청접은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
“아뇨, 왕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묵용감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누른 채 온 정신을 집중해 밖의 소리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자 고청접은 끝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왕야, 아무 일도 없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녀의 포옹에도 묵용감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내 자리에 앉아 인상을 찌푸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닫힌 창 너머는 명호였다. 달빛이 흐르는 이 늦은 시간에 무엇이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무예에 능했던 묵용감은 누구보다 귀가 밝았고, 호수에서 노를 젓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대체 이 시간에 누가 배를 타고 있단 말인가?
그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고청접이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본왕이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슬픔과 원망이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가로 다가간 그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어렴풋한 달빛 아래 연잎 사이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데다 빽빽한 연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게 누구냐!”
천둥소리 같은 그의 호통은 호수에 있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배 위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던 그자는 별안간의 호통 소리에 크게 놀라 비틀거렸다. 그리곤 끝내 중심을 잃곤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높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풍덩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나자 당직을 서던 머슴이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머슴이 물가에 도착했을 때쯤 또 한 차례 풍덩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벽하각 쪽에서 누군가 뛰어내린 듯했다.
고청접은 갑작스런 묵용감의 행동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다니! 그녀는 서둘러 겉옷을 걸친 뒤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왕야께서 물에 빠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