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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5)화 (114/1,192)

제115화

흥을 잃은 묵용감은 회림각으로 돌아와 한바탕 성질을 부려 댔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녹하와 기홍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초왕이 잠자리에 든 뒤 두 시녀는 방으로 돌아왔다.

녹하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왕비 마마도 참!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으시네.”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가 그럴 분은 아니지. 오늘밤 일은 그저 우연이었을 거야. 왕야께서 마음이 있으시면 날마다 후원을 찾으실 텐데, 왕비 마마께서 그걸 다 막을 수 있으시겠어?”

녹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차라리 그런 마음이라도 좀 품으시면 좋겠건만……. 왕야께서 그렇게나 잘해 주셨는데 갑자기 꼴이 이게 뭐냐고. 근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속상한 내색도 없으시고, 저번에 다 같이 식사를 하실 땐 진짜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이더라니까.”

“아직 어리시니까 남녀 간의 일은 잘 모르시는 거겠지.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두시지도 않는 거고. 그렇지만 우리 왕야께서는…….”

기홍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왜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어.”

녹하가 말했다.

“관두자. 왕야의 마음은 우리가 백날 고민해도 알 수 없을 거야. 어서 자, 난 당직 서러 갈 테니까.”

문 앞으로 다가가던 녹하가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잠꼬대라도 하신다면 무슨 마음인지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 * *

간밤의 일은 워낙 떠들썩했기 때문에 다음날이 되자 후원의 모든 사람들이 어제 일을 알게 되었다. 고청접이 일찌감치 수원상을 찾아왔다.

“형님, 오늘도 왕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까요?”

수원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진짜 왕비도 아닌데 안 가도 그만이겠지요.”

마침 학평관이 차씨를 보내 왕야의 말을 전했다. 앞으로 측비와 서비는 왕비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갈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차씨가 돌아가자 고청접이 곧장 웃으며 말했다.

“형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일찍 알았더라면 선물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동전 세 닢을 돌려받자고 선물을 보내다니, 정말 우습지도 않습니다.”

수원상이 말했다.

“어쨌든 초왕비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으니 체면상 적당한 관계는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초왕비는 아직 나이가 어려 이런 규율은 잘 모르는 듯합니다.”

고청접이 허리춤에 걸린 술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배포는 큰가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어젯밤 일을 꾸몄겠습니까?”

어제 일을 꺼내자 수원상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제 일은 우연이었겠지요.”

고청접이 코웃음을 쳤다.

“우연이긴요, 제가 보기에는 일부러 일을 망치러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지요. 왕야께서 새장가를 드셨으니 저희를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어찌 매번 훼방을 놓겠습니까?”

방금 전 고청접의 말은 그리 교양 있는 말은 아니었다. 가만두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수원상은 얼굴이 다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녀가 고청접을 놀리듯 말했다.

“아우님은 걱정 마십시오. 아우님의 처소는 멀리 있으니 왕비 마마의 노랑이가 거기까지 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청접은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화제를 바꾸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호수에 핀 연꽃을 보셨는지요? 아주 예쁘게 활짝 피었습니다. 괜찮으시면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바람을 쐬러 가고 싶던 수원상이 곧장 승낙했다.

“좋지요. 저도 아우님의 처소를 구경하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고청접의 벽하각은 명호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창을 열면 호수 가득 핀 연꽃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명호로 향했다. 아침햇살을 받은 연꽃은 유독 더 붉은 빛을 자랑했다. 살랑대는 바람이 불어오자 푸른 물결이 일렁이며 연꽃을 흔들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고청접이 호수 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보십시오. 연방이 있습니다.”

수원상도 즐거운 마음에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배를 타고 연방을 따는 게 어떻습니까? 강남의 수향水鄕 여인들처럼 배를 타고 연꽃 사이를 지나면서 말입니다.”

고청접은 그녀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배를 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녀 자초紫俏를 학평관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초가 활짝 웃으며 돌아왔다.

“왕야께서 두 마마님이 배를 타신다는 걸 아시고는 이쪽으로 오셔서 함께 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크게 기뻐하며 정자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잠시 뒤 묵용감이 도착했다. 가동과 영구, 학평관과 머슴 몇 명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본왕도 이곳에 배를 타러 오고 싶었는데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았소. 마침 오늘 측비, 서비와 함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어 기쁘오.”

한쪽에서는 학평관이 머슴들을 지휘해 배를 초왕 가까이로 옮겼다. 그리 큰 배는 아니었지만 길이가 꽤 길었다. 배의 양쪽 끝은 높게 솟아 있었고, 화려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머슴 두 명이 각각 선수와 선미에서 노를 저어 호수 가장자리로 배를 몰아갔다.

묵용감은 배에 먼저 올라탄 뒤 몸을 돌려 수원상과 고청접이 탈 수 있게 도왔다. 이렇게 작은 배에 처음 타 본 두 왕비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고, 묵용감의 팔을 하나씩 꼭 붙잡은 채 그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눈을 게슴츠레 뜬 학평관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동은 그 모습이 속상하기만 했다. 어린 왕비에게는 며칠 동안 계속 화만 내 놓고 얼마나 지났다고 다른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다니?

세상 사내들은 역시나 싫증을 잘 내고 새로운 여인밖에 몰랐다. 이토록 오래 녹하 한 사람만 바라보는 자신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영구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살짝 틀어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동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둥 옆에 서 있는 백천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옷을 입고 삐뚤어진 쪽머리를 한 그녀는 자그마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하염없이 배만 바라보았다. 조금은 침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엾은 왕비 마마……”

영구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가엾은 분은 왕야이십니다.”

가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왕야께서는 양쪽에 한 명씩 여인을 끌어안고 제대로 즐기시는데 가엾긴 뭐가 가여워. 그리 귀한 대접을 받으시다가 한순간에 차갑게 돌변해서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왕비 마마야말로 딱하지.

아무리 여동생처럼 여기셨다 해도 새장가를 가셨다고 이렇게 여동생을 까맣게 잊는 오라버니가 어디 있어?”

영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가동이 그런 영구에게 캐물었다.

“이봐, 그 심오한 말은 무슨 뜻인데? 설명 좀 해 봐. 왜 왕야가 가엾다는 거야?

영구는 가늠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 녹하 아가씨의 마음을 얻어 낸다면 형님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동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야께서 가여운 게 내가 녹하를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설마 왕야께서 녹하를…….”

영구는 가동을 한 번 흘겨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가동이 말했다.

“똑바로 얘기해 봐, 왕야께서 녹하에게 무슨 마음이라도 있으신 거야? 빨리, 나 미쳐 죽는 꼴 보고 싶어?”

영구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해 줘도 모르십니다. 그저 왕야께서는 녹하 아가씨에게 아무 마음 없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작은 배는 연잎 사이를 유유히 스쳐 갔다. 묵용감은 배 위에 서서 연꽃이 나부끼는 모습만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들뜬 얼굴로 연꽃을 감상했다. 그들은 묵용감 옆에서 수줍게 웃으며 연방을 따 광주리에 담았다. 유난히 탐스러운 연꽃도 한두 송이 따서 배 안에 놓았다.

묵용감이 예상했던 것은 이렇게 조용한 뱃놀이가 아니었다. 왁자지껄 떠들며 연방을 따는 것은 기본이고, 신발을 벗어 물에 발을 담그거나 서로 물을 뿌리면서 즐길 줄 알았더니. 하지만 두 여인은 다소곳한 손동작으로 꽃이나 연방을 따는 게 다였다.

커다란 연잎을 지나치자 정자에 서 있는 하얀색 형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자그마한 몸집은 그 누구보다 익숙했다. 백천범이었다.

그녀는 기둥에 가만히 기대어 그가 있는 곳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먼 거리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부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머슴이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향하자 정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역시나 그녀는 부러운 눈빛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허리를 숙여 꽃 한 송이를 집어 든 뒤 수원상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하지만 머리에 꽂기에는 꽃이 너무 컸던 탓에 수원상의 머리 모양이 차츰 망가지고 있었다. 신경 써서 꽂아 주고 싶은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있는 힘껏 꽂아 넣는 바람에 줄기가 수원상의 두피를 찔렀다. 그 통증이 상당했지만 수원상은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왕야.”

묵용감은 자신의 감각에 심취해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곁눈질로 정자를 바라보니 암울한 표정의 백천범이 보였다. 그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고, 다시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고청접의 머리에도 똑같이 꽂아 주었다.

고청접은 수원상처럼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힘주어 꽃을 꽂자 작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묵용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억척스럽게 줄기를 머리 사이로 찔러 넣었다.

한바탕 일을 치른 뒤 묵용감이 머슴에게 분부했다.

“정자 근처에 배를 대거라.”

수원상과 고청접은 반도 채워지지 않은 광주리를 바라보며 서로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연방은 몇 개 따지도 못했는데 벌써 배를 대다니…….

정자에 가까워지자 수원상은 그제야 백천범을 발견했다.

“저쪽에 왕비 마마가 계십니다.”

고청접은 일부러 묵용감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왕야, 왕비 마마도 모셔 와 함께 배를 타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이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이미 탈 만큼 탔는데 무엇 하러 왕비를 부른단 말이오.”

정자 근처에 배를 정박하자 학평관이 하인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백천범은 직접 배 앞으로 다가가 수원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니, 제 손을 잡고 내리세요.”

수원상은 내키지 않았지만 묵용감이 곁에 있었기에 할 수 없이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럼 왕비 마마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

몸집은 작았지만 힘이 셌던 백천범은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수원상을 끌어당겼다. 뒤이어 고청접에게도 손을 내민 그녀는 수원상보다 작은 고청접을 한결 수월하게 끌어올렸다. 고청접 또한 백천범에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배 안에 있던 묵용감은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기 위해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어린 계집은 두 왕비를 내려 주고는 그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묵용감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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