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월규가 탄식했다.
“왕야께서 안 보셨더라도 왕비 마마께서 먼저 인사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계속 지금처럼 하시다간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정말 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다 날 내쫓는 것까지 잊어버리시지 않을까?”
월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 마마, 꿈 깨십시오. 초왕비라는 칭호를 가지신 분의 존재까지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월규의 추측은 틀렸다. 묵용감은 벽하각이 아닌 명호로 향했다. 긴 다리를 건너 호수 위에 세워진 정자에 다다른 그는 가만히 서서 연꽃을 감상했다.
연못에는 연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호수 가득 채운 연꽃은 대부분 꽃망울을 터뜨려 붉은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활기가 넘쳤고 밥공기만 한 연방이 연잎 사이사이로 귀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묵용감은 마음이 싱숭생숭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연꽃이 피면 백천범을 데리고 이곳에서 연꽃을 구경하고 싶었다. 연꽃은 만개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이렇게나 달라져 있었다.
* * *
밤이 되자 그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낙성각으로 향했다.
그는 어쨌든 새로운 부인을 맞았으니 자신의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혼삿날 밤 합방 일로 측비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그 마음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자 수원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초왕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좋은 지아비라고 생각하며 수줍게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뒤 장삼의 자락을 젖히고 의자에 앉았다. 시녀는 그에게 차를 올리고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묵용감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시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차를 마시며 수원상과 대화를 시도했다.
“측비는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오?”
수원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부끄러운 듯 답했다.
“소첩에게는 오라버니 한 명과 남동생 한 명, 여동생 한 명이 있습니다.”
“오라버니는 어느 곳에서 관직을 맡고 있소?”
“오라버니는 이부吏部의 원외랑員外郞입니다.”
묵용감이 살짝 놀라며 말했다.
“오, 대학사의 동료였군.”
그가 다시 물었다.
“여동생은 시집을 갔소?”
“열다섯밖에 되지 않아 아직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집들은 딸이 나이가 열다섯이 되어도 아직 어리다며 품에 데리고 있었지만, 백천범은 그보다 어린 나이부터 꽃가마를 타고 이곳으로 보내졌다. 같은 나이였지만 참으로 다른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수원상은 초왕이 더 이상 말이 없자 조심스레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그녀도 생각과는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왕야, 차를 조금 더 드릴까요?”
묵용감이 말했다.
“좋소. 한 잔 더 주시오.”
사실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걸 일깨우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한 잔 더 마시겠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시녀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묵용감은 새로 올린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차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수원상은 차에 대해서도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묵용감의 질문에 그녀가 대부분 답하자 이야기는 계속 길어졌고, 결국 묵용감은 또 한 잔을 더 마시며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정원은 마음에 드는지 등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들던 수원상은 결국 참지 못해 하품을 했다. 묵용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소.”
그의 말은 조금 모호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던 수원상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왕야, 소첩이 모시겠습니다.”
묵용감도 그러려던 생각이었기 때문에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녀를 따라 침실로 향했다. 수원상이 그의 도포 매듭을 풀기 위해 손을 올리자 묵용감이 그녀를 막아섰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돌아올 테니.”
차를 세 잔이나 마신 탓에 배가 제법 빵빵해진 그는 측간에서 볼일을 본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수원상은 겉옷을 벗고 얇은 치마만 입고 있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낸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수원상은 곧장 그의 옷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 몸에서 나는 옅은 계화꽃 향까지 맡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하얀 목을 드러내자 묵용감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몸을 살짝 떨고 있던 수원상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의 첫날밤을 같이 보내게 될 사람이 이 여인일 줄이야! 아마 그녀는 자신의 첫 아이의 모친이 될 것이었다.
수원상은 조금 긴장했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매듭을 풀었고 도포를 벗긴 뒤 옷장에 걸었다.
도포 안에 홑바지와 적삼을 입고 있던 그는 침대에 앉아 손으로 옆자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측비.”
수원상은 부끄러우면서 조금 두려운 듯했다.
“왕야, 소첩의 이름을 부르시는 게 어떠신지요?”
새로 맞은 두 부인과 좋은 관계를 갖기로 마음먹은 묵용감은 그녀들에게 측비와 서비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소. 앞으로는 원상이라 부르겠소.”
수원상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원래는 어제 이루어져야 했을 합방이었지만 차라리 오늘이 더 나았다.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이 온전한 초왕이 맑은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묵용감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갑작스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꼭 ‘꼬꼬’하고 들리기도 하고 ‘삐악’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수원상에게 물었다.
“방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수원상이 눈썹에 힘을 주며 밖의 소리를 자세히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첩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묵용감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수원상을 감싸 안은 채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허리에 묶인 매듭을 풀려는데 또다시 ‘꼬꼬, 삐악, 꼬꼬, 삐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저주라도 되는 듯 반복되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듭을 풀었는데,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밟아 넘어진 듯한 소리였다.
화가 솟구친 묵용감은 자리에 앉아 큰 소리로 호통쳤다.
“대체 밖에 누가 있는 것이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학평관은 초왕의 호통 소리에 곧장 답했다.
“소인이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수원상은 침대에 누운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묵용감의 뒤태를 바라보았다. 얇은 적삼 뒤로 그의 탄탄한 몸이 비쳤다.
시집을 오기 전 모친에게 합방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자 부끄러움이 밀려와 이불 속으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잠시 뒤, 학평관이 헐떡이며 문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노랑이를 찾고 계십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왕비가 노랑이를 찾는다? 노랑이가 제 발로 이곳을 찾아왔단 말이냐?”
“왕비 마마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노랑이가 이곳으로 들어온 걸 직접 보셨다고…….”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포를 걸치고 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일부러 호사를 망치려는 수작인 듯하구나. 불을 켜 노랑이를 찾아보거라. 만약 없다면 뭐라 변명하는지 봐야겠다.”
묵용감이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수원상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저리 나가 버리다니!
정원에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백천범이 가만히 서 있었다. 축 처진 눈꼬리로 허리춤에 묶인 치마끈만 만지작거리며 죄를 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방에 등불을 비추자 정원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하인들은 조심스럽게 노랑이라고 불리는 닭을 찾기 시작했다.
묵용감이 성난 얼굴로 다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본왕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있었소?”
백천범은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몰랐습니다.”
“노랑이가 낙성각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예. 이곳으로 들어오는 걸 봤습니다.”
묵용감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이를 갈며 묻고 있는데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홀가분하게 들렸다.
“좋소. 찾으면 다행이지만 못 찾았다간 곤장을 내릴 것이오!”
백천범은 깜짝 놀라 말했다.
“왕야, 그것은 불공평합니다. 노랑이는 여기저기 뛰어다닐 수 있으니까 지금쯤 낙성각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노랑이를 못 찾으면 곤장 맞을 준비나 하고 있으시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백천범은 그저 서둘러 노랑이를 찾길 간절히 기도했다.
한바탕 난리법석을 치며 찾은 끝에 수풀 속에서 노랑이가 튀어나왔다.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지 노랑이는 백천범의 곁으로 그대로 돌진했다.
하인들은 노랑이를 포위한 채 길을 막았다. 겁먹은 노랑이는 방향을 바꿔 또다시 뛰어갔다. 하인들이 노랑이를 발로 밟을까 봐 걱정이 된 백천범은 그들 사이에 합류했다.
무리에는 수원상이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 주인의 일을 망친 백천범에게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보는 눈이 없는 틈을 타 그녀의 발을 걸었고, 백천범은 그대로 땅에 고꾸라져 버렸다.
크게 웃을 수 없던 하인들은 몰래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때 묵용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되었다! 그만 쫓거라.”
소란스럽던 상황이 한순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노랑이는 다행히 다친 데 없이 가만히 백천범의 곁으로 다가왔다.
심하게 넘어진 백천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팔을 한두 차례 흔들더니 한 손에는 노랑이를 안고,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 묵용감에게 예를 갖추고 인사했다. 그리곤 몸에 풀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홀연히 떠났다.
묵용감도 굳은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 * *
수원상은 한참이나 묵용감을 기다렸지만, 방에 돌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시녀 추문秋紋이었다. 추문이 침대 앞에 서서 고했다.
“마마, 왕야께서 회림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깜짝 놀란 수원상은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아 추문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가 버리셨단 말이냐?”
추문은 그저 울상만 지을 뿐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탄식했다.
“이게 다 왕비 마마 때문입니다. 잘되고 있었는데 왕비 마마께서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자신의 시녀 앞이니 수원상도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악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분명 그녀가 백천범에 대한 앙심을 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천범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오늘 밤 회임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초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