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기홍이 정자에 상을 차리자 묵용감은 두 부인을 이끌고 정자로 향했다. 포도 시렁을 지나는데 눈썰미가 좋았던 고청접이 그네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네가 아주 예쁩니다. 왕야께서 휴식을 취하실 때 타시는 것인지요?”
묵용감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같은 대장부가 그네를 타겠소?”
고청접은 혀를 깨물어 보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뒤 수원상이 슬쩍 떠보듯 물었다.
“왕비 마마를 모셔와 함께 드는 것이 어떠신지요?”
묵용감은 깊은 생각에 빠지듯 손만 쥐락펴락했다.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듯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미 왕비에게 선을 긋기로 결심한 만큼 다시는 보지 말자는 생각. 아니면, 왕비를 불러 그가 새 부인들에게 얼마나 자상하게 대하는지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비교를 하지 않으면 상처도 줄 수 없었다. 다만 왜 이렇게까지 상처를 주려 하는지는 그도 잘 알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이렇게 다 모이기도 어려우니 가서 왕비를 불러오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학평관은 주먹을 쥐었다 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학평관은 서둘러 명을 받잡고는 남월각으로 사람을 보냈다.
학평관의 청이었다면 죽어도 가지 않았겠지만, 왕야의 부름이라는 차씨의 말에 백천범은 조금 난감했다. 그녀가 월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 가면 안 될까?”
월향이 고개를 저었다.
“왕야께서 부르신 것이니 다녀오십시오. 안 가셨다가는 왕야의 기분이 또 나빠지실 것입니다.”
월규도 옆에서 거들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어서 가시지요.”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잔뜩 울상을 진 채 두 시녀를 이끌고 차씨를 따랐다.
백천범이 정자에 도착하자 수원상과 고청접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용감 왼쪽에 앉아 있던 수원상은 곧장 왕비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묵용감이 느릿느릿 말했다.
“왕비는 저쪽에 앉으면 되니 신경 쓸 것 없소.”
묵용감이 가리킨 자리는 백천범이 늘 앉던 그의 맞은편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백천범은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패가 되어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듯한 모습이 적잖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묵용감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자꾸만 그의 가슴을 찌르는 탓에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목소리를 잔뜩 깔고 물었다.
“왕비는 기쁘지 않소? 우리와 식사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오?”
대충 먹는 시늉만 하고 곧장 돌아가려던 백천범은 갑작스런 묵용감의 질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아니면 되었소.”
묵용감이 기홍을 불렀다.
“왕비는 먹는 속도가 빠르니 네가 옆에서 지켜보거라.”
수원상과 고청접은 초왕과 초왕비의 기이한 대화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를 갖춰 존중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싫어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니 역시나 소문 그대로였다. 초왕과 백 승상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왕비까지 미움을 받는 것이 틀림없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자상하게 보이고 싶던 묵용감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물론 수원상과 고청접에게만 다정하게 대할 뿐 백천범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모습에 수원상과 고청접은 마음을 열고 자발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적극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권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소개까지 마쳤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그녀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청접이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음식도 하실 줄 아십니까?”
백천범이 부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먹기만 할 줄 알지요. 하지만 주방에서 기홍 언니가 만드는 모습을 자주 봐서 어떻게 만드는지는 조금 압니다.”
두 부인은 시녀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왕비의 모습에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초왕을 보니 정말 밖에서 듣던 대로 어지간히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왕비인 듯했다.
어쩌면 오늘 이 식사 자리도 새로운 부인들의 체면을 봐서 억지로 왕비를 불러온 것인지도 몰랐다.
수원상은 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그녀가 앉은 초왕의 왼쪽 자리는 원래 정비의 자리였다. 어쩌면 초왕도 그녀를 정비로 맞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백천범을 대하는 초왕의 태도를 보니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내칠 게 분명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두 부인은 조금씩 백천범을 얕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자그마한 아이에게 초왕비라는 칭호가 말이 된단 말인가? 두 부인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새로 부인을 들인 사실이 진심으로 기뻤는지 두 부인에게 상냥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맑은 그녀의 눈망울에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자 묵용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백천범이 기홍에게 음식을 담아 달라고 접시를 내미는데 묵용감이 갑작스레 그릇을 힘껏 내려쳤다. 놀란 그녀는 곧장 손을 거두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거리는 게 억울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저 음식을 집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저렇게 화를 내다니?
깜짝 놀라기는 수원상과 고청접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자상하기만 했던 초왕이 갑작스레 저리 성을 내다니. 두 사람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검게 빛나는 그의 차가운 눈망울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두려움에 떨었다.
출중한 용모를 지닌 초왕이었지만 난폭한 성격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서웠다.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묵용감은 백천범뿐만 아니라 새 부인들까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표정을 풀고 다시 온화한 말투를 되찾았다.
“본왕이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많이 놀랐나 보오. 이제 괜찮으니 어서들 드시오.”
주변의 몇몇 하인들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초왕이 이렇게 빠르게 안색을 바꾸었던 적이 있단 말인가?
백천범은 덜덜 떨며 다시는 멀리 있는 음식을 집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서둘러 밥을 먹어 치운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묵용감이 또다시 화를 낼까 봐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묵용감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부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라고 오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묵용감은 풀이 죽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또다시 화가 났다. 이 몸과 밥 한 끼 먹는 게 그리도 싫단 말인가?
그녀가 눈에 거슬렸던 묵용감이 차갑게 말했다.
“왕비는 다 먹었으면 그만 가 보시오.”
백천범은 사면이라도 받은 듯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찌나 빠르게 걸어가는지 시녀들이 잰걸음으로 뛰어야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복도를 가로질러 반월문을 지나고 나서야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 끼 식사였을 뿐인데 묵용감은 단맛부터 쓴맛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백천범이 자리에 없으니 더 이상 연기도 할 필요 없었기에 그는 다시 평소처럼 담담하게 행동했다.
눈치 빠른 수원상과 고청접은 밥을 다 먹은 뒤 서둘러 인사를 올리고 후원으로 돌아갔다.
함께 시집을 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편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고청접이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신 듯합니다.”
수원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어딜 봐서 왕비 마마인 줄 알겠습니까, 왕야께서도 꽤 오랜 시간 참으신 듯합니다.”
고청접이 말했다.
“백씨 가문의 왕비 마마는 머지않아 쫓겨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형님께서 정비가 되실 것입니다.”
수원상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우님도 참, 그리 쉽게 말하다니요. 왕야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왕비를 들이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던 고청접이 말을 이었다.
“그저 형님께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시길 바라는 마음에 드린 말씀입니다. 그리된다면 저도 측비가 될 수 있겠지요.”
정비 자리를 노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수원상은 마음을 놓았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고청접이 자리를 탐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내비쳤으니 앞으로는 왕의 총애를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였다.
* * *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묵용감은 조금 무료했다. 휴가를 얻는 일이 흔치 않았으니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후원으로 향했다.
저 멀리 백천범이 연꽃 한 송이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랑이도 그녀 곁을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어린 계집아이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꽃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노랑이에게 말을 건네느라 앞에서 사람이 걸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발견했을 땐 이미 너무 가까워진 뒤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던 얼굴을 거두고는 예를 갖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설마 자신을 보지 못한 걸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서글퍼졌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싫어하다니. 그의 모습에 지나간 시간이 떠오른 그녀는 코끝이 찡해지자 고개를 휙 돌렸다.
예전 일은 더 이상 떠올리면 안 되었다. 행복했던 지난 시간은 그저 하룻밤 꿈일 뿐이니 더 이상 그리워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잠시 뒤 상심한 마음을 털어 버린 그녀는 연꽃을 들고 남월각을 들어서며 월향에게 말했다.
“이것 좀 봐! 내가 딴 거야. 예쁘지?”
월향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연꽃을 따러 가신 것이었습니까? 그곳은 수심이 아주 깊어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엔 소인에게 말씀하십시오. 소인이 따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들은 배를 타고 들어가서 따야 하지만 이건 그냥 가장자리에 핀 걸 손만 뻗어서 꺾어 온 거야.”
백천범은 중요한 일이 생각났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월향아, 나 연방도 봤다! 이렇게 커다랗던데.”
그녀는 손짓을 해 보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언제 연방 따러 가자. 난 아직 연밥도 못 먹어 봤단 말이야.”
월규가 밖에서 들어오며 한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늘 먹는 것밖에 모르십니다. 방금 전 왕야께서 벽하각에 드셨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나도 봤어. 왕야께서는 날 쳐다보지도 않으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