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 왕비라?”
학평관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왕야, 측비와 서비 마마를 뵙는 게 어떠신지요?”
기홍이 아침 식사를 들라 청하자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향했다.
“왕비는 무슨 말을 했느냐?”
“왕비 마마께서는 두 분과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자주 놀러 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봉투를 주었다고 하였느냐?”
“예. 소인이 문 앞에서 봉투를 주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가 그런 것도 안단 말인가?”
“아마 시녀들이 알려 준 듯합니다. 어쨌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학평관은 묵용감의 마음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왕비가 초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기엔 초왕은 한 번에 두 명의 새로운 부인을 들였다. 이는 앞으로 왕비를 자주 보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왕비의 소식을 묻는 초왕을 보면 왕비를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저 학평관의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묵용감은 자리에 앉아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측비와 서비를 들라 하거라. 어쨌든 얼굴은 봐야 할 테니.”
학평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측비와 서비를 데려올 하인을 보냈다.
* * *
마침 남월각에서 나오던 길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측비와 서비는 곧장 회림각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월규는 그들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회림각에 놀러 가던 것은 자신의 주인이었는데, 어쩌다 새로운 사람에게 밀려 이리 서러운 꼴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월규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주인은 서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해 받은 선물을 들고 아주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은 측비와 서비가 준비한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으니 왕비에게 예를 다한 것이다.
측비는 청옥靑玉이 박힌 뒤꽂이를 선물했고, 서비는 옥으로 만든 작은 관음상을 선물했다.
백천범은 관음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옥에 감촉도 부드러웠고, 훌륭한 조각도 마음에 들었다.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관음상을 모실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월향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너무 작습니다. 그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겠지요.”
백천범이 물었다.
“관음상을 가지고 논다니?”
월향이 관음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대로 만들어진 관음상도 아닌걸요. 관음보살이 연꽃을 들고 있다니요, 원래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발밑에 연꽃 받침이며 머리 모양, 의상까지 다 맞질 않습니다. 그저 가지고 놀라고 가져온 듯합니다.”
그렇다 한들 기분이 좋았던 백천범은 관음상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럼 더 좋지. 값도 제법 나갈 것 같은데 나중에 돈으로 바꿔야겠다.”
월규가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찌 늘 나갈 생각만 하십니까?”
“조만간 그래야 할 테니까.”
백천범은 월규가 풀이 죽어 있자 곧바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좀 서운하겠지만 학평관 어르신에게 측비와 서비에게 한 명씩 보내 달라고 부탁해 볼게. 그 둘은 곧 진정한 왕비가 될 테니까 거기에 있는 게 나을 거야.”
월규가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왕비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왕야께서 직접 보내신 왕비 마마의 시녀입니다. 새로 온 왕비 마마가 아무리 좋다 한들 저희는 절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왕비 대신 마음을 졸이고 자신들의 앞길도 걱정해야 했지만, 그것만 빼면 백천범은 틀림없이 좋은 주인이었다.
콧대 높게 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일은 직접 하는 걸 더 좋아했다. 좋은 게 생기면 시녀들과 꼭 나눠 가지기도 했다. 그녀를 따르면 욕을 먹거나 벌 받을 일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런 왕비가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월향이 말했다.
“왕비 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와 월규는 왕비 마마뿐입니다.”
백천범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니면 앞으로 생활비는 셋이 똑같이 나눠 갖는 게 어때?”
월향과 월규는 서로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왕비 마마, 소인들도 생활비를 받고 있으니 왕비 마마의 것까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월규가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방금 두 마마께 얼마를 주셨습니까?”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나에게 준 선물보다는 많이 못 줬어. 그저 성의 표시만 하라기에 성의만 보였지, 뭐.”
월향이 물었다.
“얼마를 드리셨는데요?”
백천범이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너희가 맞혀 봐, 말하기 부끄러우니까.”
월규가 말했다.
“은자 세 냥을 드렸습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월향이 말했다.
“은자 세 푼을 드린 것입니까?”
백천범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두 시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무려 초왕비가 은자 세 푼도 줄 여력이 없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다들 크게 비웃을 게 틀림없었다.
백천범은 서둘러 해명했다.
“내가 너무 쩨쩨한 게 아니고 줄 만한 게 없어서 그랬어. 좋은 거라고는 비녀와 뒤꽂이밖에 없는데 그건 왕야께서 상으로 내리신 거니까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 왕야 눈에 띄기라도 하면 또 한바탕 혼이 날 테니까 말이야.
선물을 보니 두 언니 모두 부자인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지?”
* * *
학평관은 수원상과 고청접을 데리고 반월문을 들어섰다. 소매에 손을 넣은 채 복도를 가로질러 묵용감의 방 앞에 다다른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왕야, 측비와 서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방 안에서 묵용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학평관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수원상과 고청접이 사뿐사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초왕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건장한 체격과 위풍당당한 외모를 가진 그는 진홍색 평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편하게 뒤로 감아올려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그윽한 두 눈동자가 그들을 주시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측비와 서비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초왕의 외모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조정 관료였던 아버지가 유언비어라고 알려 주었지만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었으니 어느 정도는 진실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혼사를 치르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가 맺어 준 연이었기 때문에 부모들 또한 감히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가문을 위해 어찌할 도리 없던 그녀들도 크게 낙담한 채 초왕의 저택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추하기는커녕 훌륭한 용모를 가진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외모와 고귀한 분위기에 사로잡힌 그녀들은 순식간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탓에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학평관이 한쪽에서 헛기침을 하자 두 여인은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서둘러 예를 갖췄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이 상냥하게 말했다.
“앉으시오.”
묵용감이 상석에 앉자 두 새색시는 그의 양옆에 한 명씩 앉았다. 역시 대감 집 규수들이라 부끄러워하면서도 얌전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정말 미안하오. 어제는 술이 과해 찾아가지 못했소.”
묵용감은 말을 뱉으며 자신의 양옆에 앉아 있는 두 아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왼쪽에 앉아 있는 수원상은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흘렀다. 그녀는 대학사 수민의 적녀嫡女였다. 묵용감은 그녀가 교양 있고 현명하다는 황제의 평을 떠올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오른쪽의 고청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항의 셋째 적녀였고 문예를 포함해 다양한 재능을 두루 갖췄다고 전해졌다.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하다는 황제의 말처럼 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역시 황제가 신경을 써서 고른 여인들이었던 만큼 모두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묵용감은 스스로 두 여인을 흡족해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고 그들과 여생을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이었다.
그가 손에 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왕비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두 여인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왕비가 봉투를 건넸다던데?”
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묵용감이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얼마를 주었소?”
그는 백천범이 봉투를 건넸다는 학평관의 말에 왜인지는 몰라도 곧장 이 말부터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빙 돌려 말한 것이었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의외의 질문에 놀라 자신들의 시녀만 바라보았다. 이미 봉투를 시녀들에게 전한 뒤였기 때문이다.
측비의 시녀가 서둘러 봉투를 꺼내 수원상에게 건네주었다.
“마마께서 보시지요.”
수원상이 다소곳한 손동작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손바닥에 쏟았다. 손바닥에 떨어진 동전 세 닢에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묵용감은 그 상황이 우스웠는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주인이 웃자 학평관도 그를 따라 웃었고, 결국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끊임없이 웃던 묵용감이 갑작스레 웃음기를 거두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참으로 인색하구려.”
학평관이 웃으며 두 부인에게 설명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이렇게 자유분방하신 분입니다.”
고청접의 시녀도 봉투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동전 세 닢이 들어 있었다.
수원상과 고청접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초왕비가 정말 인색하다고 생각했다.
묵용감은 그들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는 식사 제안을 했다.
“식사 시간이 거의 되었으니 함께 점심을 들고 가는 게 어떻겠소? 어제 일에 대한 본왕의 사과라고 여겨 주시오.”
수원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절했다.
“왕야, 그리 예를 갖추시다니요. 저희는 첩이고 왕야께서는 가장이신데 저희에게 사과를 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야께서 기쁘신 마음에 술을 드신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입니다. 다만 몸이 상하실까 염려되오니 앞으로는 조금씩만 드시옵소서.”
수원상은 초왕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간섭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제 막 문턱을 넘어 놓고 간섭을 하려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