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이튿날 아침, 월향과 월규는 백천범을 침대에서 끌어내리다시피 깨우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를 치장했다.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고 얼굴에 분을 칠한 다음 귀한 장신구로 머리를 화려하게 꾸몄다.
아직 졸린 백천범은 끊임없이 하품만 해 댔다. 그녀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야?”
어젯밤 축하 연회에 극단을 초청해 여러 공연을 선보인 터라 밤늦게까지 앞뜰에서 구경을 하다 이경二更(오후 9시부터 11시)이 되어서야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이른 기상에 눈도 제대로 뜨질 못했다.
월규는 그녀의 태도가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마마, 측비와 서비가 곧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올 것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침대에 누워 계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무 생각 없던 백천범은 초왕의 혼사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문안 인사를 오다니?
“난 진짜 왕비도 아닌데 오지 말라고 하지.”
“진짜 왕비가 아니라니요, 마마께서는 왕야의 정실 왕비이십니다. 측비와 서비가 어찌 왕비 마마를 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천범은 높게 틀어 올린 머리와 잔뜩 꽂힌 화려한 장신구를 거울에 비춰 보며 울상을 지었다.
“너무 무거워서 목이 끊어질 것 같아.”
“소인들이 힘들게 빗어 드린 것이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다 왕비 마마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마마께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셔야 그분들이 왕비 마마를 얕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을 테니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데, 언니들이 문안 인사를 온다니 조금…….”
“마마, 규율을 지키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더 어리시긴 해도 지위는 가장 높으십니다. 순서에 따라 마마보다 늦게 저택에 온 사람이 응당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규율은 백천범도 알고 있었다. 백 승상의 저택에서는 주인마님이었던 이씨 부인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정실과 첩의 경계는 뚜렷했고, 대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천범은 그저 자신의 가짜 지위에 가슴이 조금 찔릴 뿐이었다.
무거운 머리로 아침밥을 먹는 것은 정말 곤욕이었다. 백천범은 빨리 머리를 풀 수 있게 측비와 서비가 왔다 가기만 바랐다.
상을 물리자 마침내 문 앞에서 머슴의 외침이 들려왔다.
“왕비 마마, 측비와 서비께서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백천범은 기쁜 마음에 머리를 단정히 매만지며 서둘러 말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이니 어서 드시라고 해.”
월규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왕비 마마, 체통을 지키십시오. 이렇게 가볍게 행동하시면 우스운 꼴이 될 것입니다.”
백천범이 대답했다.
“아이참, 알겠어.”
그녀는 곧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제법 그럴싸하게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뒤, 측비 수원상修元霜과 서비 고청접顧靑蝶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높은 의자에 화려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왕비를 향해 절을 올렸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난생 처음 다른 사람에게 절을 받은 백천범은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하마터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뻔했지만, 월규가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백천범이 목을 한 차례 가다듬고 말했다.
“다들 일어나세요.”
그녀의 앳된 목소리에 수원상과 고청접은 살짝 놀란 낌새였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인은 고개를 들어 왕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초왕비가 백 승상의 딸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그들은 명문가의 규수가 늘 그러하듯 단정하고 품위 넘치는 여인을 상상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어린 계집아이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잔뜩 치장을 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른스럽게 보이려 한껏 굳힌 표정은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월향이 차가 든 쟁반을 들고 왔다.
“왕비 마마께 올릴 차입니다.”
초왕비가 이렇게 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측비와 서비는 잠시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했다. 그러다 이내 수원상이 쟁반을 받아 들고 다시 한번 깊게 절을 올린 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 왕비 마마께 차를 올립니다.”
백천범은 손을 뻗어 찻잔을 집어 들고는 작게 한 모금 마신 뒤, 미리 준비해 둔 붉은 봉투를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언니.”
그녀 옆에 서 있던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왕비를 바라보았다. 어린 왕비 때문에 호칭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고청접도 차를 올렸고 붉은 봉투를 받은 뒤에야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수다를 즐기는 듯 보였지만 이렇게 격식을 갖추고 앉아 있으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했다.
왕비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자 측비와 서비는 더욱 입을 열지 못했고 방 안에는 적막한 기운만 감돌았다.
월향과 월규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두 시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왕비가 아무리 어려도 절대 만만하게 대하진 못할 것이었다. 걱정과 달리 어린 왕비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백천범은 어쨌든 자신에게 문안 인사를 온 것이니 몇 마디 담소라도 나눈 뒤에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앉아 있다간 더 난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언니들께서는 닭을 기르시는지요?”
월향과 월규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할 말이 없어도 제 발등을 찍는 소릴 하다니?
수원상보다 나이가 조금 더 어렸던 고청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닭을 기르십니까?”
“네.”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노랑이고 말을 아주 잘 들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노랑이가 유유히 방으로 들어왔다. 노랑이는 좌우를 살피더니 이내 백천범의 곁으로 걸어왔다. 백천범이 손을 뻗어 노랑이를 품에 안고 말했다.
“얘가 노랑이에요, 예쁘죠?”
“네, 너무 곱습니다.”
사실 측비와 서비의 말은 거짓이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닭이 곱다니.
하지만 백천범 눈에는 노랑이가 세상의 모든 닭 중 단연 으뜸이었다. 어찌나 잘 먹였는지 볏은 붉게 빛났고 깃털은 기름을 칠한 듯 반들거렸다.
월규가 노랑이를 받아 들고는 조용히 말했다.
“왕비 마마,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언니는 처소가 어디신지요?”
수원상이 먼저 대답했다.
“소첩은 낙성각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고청접이 뒤이어 대답했다.
“소첩은 벽하각에서 지냅니다.”
“그렇군요. 가까운 거리니까 앞으로 자주 놀러 오면 좋겠네요. 언니들이 오기 전에는 넓은 후원에서 홀로 지내느라 정말 심심했거든요.”
백천범은 간식을 나눠 주며 말을 이었다.
“이건 기홍 언니가 만든 간식인데 맛있으니까 드셔 보세요. 저택 전체를 통틀어서 기홍 언니의 음식 솜씨가 제일 훌륭하거든요. 아쉽게도 이제 회림각에 갈 수 없…….”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월규가 그녀의 등을 찔렀다. 왕야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소리를 자기 입으로 하는 왕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모습에 수원상은 속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 어느 왕비가 말을 할 때 시녀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초왕과 백 승상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초왕이 백 승상의 딸을 들인다기에 중간에 낀 백 승상의 딸이 참 힘들게 지낼 거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제법 편안한 삶을 누리는 듯했다.
시집을 올 때 수원상의 아버지가 몰래 해 준 말이 있었다. 초왕비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초왕을 잘 받들어 자식을 낳게 되면 초왕비가 쫓겨난 뒤 그 자리를 차지해 당당한 정실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말이었다.
명문가 규수였던 그녀는 처와 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는 한 명밖에 없지만 첩은 무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많이 들일 수 있었다. 처는 집안의 여주인이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대로 스스로의 본분을 다해 왕을 모시다 하루빨리 자식을 낳고 싶었다. 자식을 낳고, 자신이 초왕비의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게 다 평온할 것이 분명했다.
* * *
혼사를 치른 초왕을 생각해 황제는 특별히 이틀간의 휴가를 내렸다. 이틀 뒤에 치러질 무예 시합을 초왕이 지휘해야 했기에 그전까지 푹 쉬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제 과음을 한 탓에 묵용감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자신이 어제 두 명의 부인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가 넋을 놓고 침대를 바라봤다. 오늘은 손바닥만 한 얼굴의 그녀가 이곳에 누워 있을 리도 없었고, 뻔뻔하게 두려워 말라고 얘기할 리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스웠다.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가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와 만난 지 석 달이 지나 있었다. 그 석 달 동안 그의 삶 모든 곳에 백천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들였으니 다행히도 그의 삶에 더 이상 그녀가 있을 곳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진정한 부인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 부인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보질 못했다. 새신랑이라니,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신분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마자 밖에서 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일어나셨습니까? 소인이 들어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홍과 녹하가 세면도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두 시녀는 그의 환복을 도운 뒤 입을 헹굴 잔과 솔, 장미수를 건네고 물기를 짠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다음 화장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그의 머리까지 단정히 빗겨 주었다.
조정에 가지 않는 날에는 관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편하게 둘둘 감아 머리 뒤로 고정시켜 놓았다. 그러자 그에게서 여유로운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문발 밖으로 누군가의 발이 보이자 그가 물었다.
“밖에 누가 있는 것이냐?”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학평관 어르신이십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들라 하라.”
기홍이 학평관에게 간 사이 녹하가 아침밥을 어디에 차릴지 물었다. 묵용감은 조금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으니 방에서 편히 먹는 게 좋겠다.”
녹하는 그리 준비하겠다고 대답한 뒤 방을 나섰다.
학평관이 발을 걷고 들어왔다. 그는 늙은 얼굴을 환히 웃어 보이며 묵용감의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절을 올렸다.
“경하드립니다, 왕야. 소인 왕야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묵용감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할 말이 있거든 어서 하거라.”
“예.”
학평관은 몸을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측비와 서비 마마께서 왕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차를 올리셨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봉투를 하사하셨지요. 왕야께서도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새로 오신 두 왕비 마마를 뵙는 게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