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기쁩니다.”
백천범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는 제가 제멋대로 다리를 놓아 드리려다 일을 그르쳤지만, 이번에는 왕야께서 직접 고른 여인이니 분명 훌륭할 것입니다.”
묵용감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와도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기쁘오?”
“정말 기쁩니다.”
편안해 보이는 백천범의 표정에서 어색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묵용감이 재차 물었다.
“정말 기쁘단 말이오?”
백천범이 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야, 왕야. 손이 너무 아픕니다.”
백천범의 입에서 답이 나오지 않자 찌푸려진 묵용감의 미간이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 천천히 손에 힘을 뺀 그는 백천범의 포동포동한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손을 본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백천범은 조금 억울한 듯 자신의 손등을 가볍게 문질렀고 묵용감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 말했다.
“그만 가 보시오.”
* * *
이튿날, 초왕이 측비와 서비를 맞는다는 소식이 온 저택에 퍼지자 기뻐하는 사람과 걱정하는 사람으로 반응이 나뉘었다.
기홍은 물론 걱정하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초왕이 조정에 가자 기홍은 잔뜩 속이 상한 얼굴로 녹하에게 말했다.
“왕야께서 측비를 들이시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마음은 너무 불안하네…….”
녹하가 놀리듯 말했다.
“왕야께서 새장가를 가시면 널 안 아껴 주실까 봐?”
“얘가 뭐라는 거야, 정말.”
기홍이 눈을 부릅뜨고는 녹하를 책망했다.
“내 말을 왕비 마마가 걱정된다는 거지. 그렇게 잘 지내시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제 남월각으로 돌아가실 때 왕비 마마의 손을 봤더니 새빨갛게 자국이 남았더라고. 분명 왕야께서 그러셨을 테지. 가여워서 볼 수가 없을 정도라니까.
왕야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난 정말 모르겠어. 좋을 땐 그렇게 뼛속까지 아껴 주시더니, 이제는 마음이 식으신 건지 걸핏하면 때리고 화내시고 말이야.”
“그러니깐 왕비 마마한텐 더 잘된 일이지. 새로운 처가 생기면 더 이상 왕비 마마께 화를 안 내실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왕비 마마께 너무 분한 일이잖아.”
“분할 게 뭐 있어.”
녹하가 초연하게 말했다.
“다 자신의 팔자가 있는 법이지. 왕비 마마는 팔자가 사나운 것뿐이야. 백 승상 댁에서 태어나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
기홍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오실 측비와 서비가 어떤 분일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한 번에 두 분이나 맞으신다니. 둘이 힘을 합쳐서 왕비 마마를 괴롭히면 어떡해. 죽기 살기로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그리고 우리 왕비 마마께서 얼마나 민첩한데. 질 것 같으면 바로 도망가시겠지! 그리고 이젠 월향이랑 월규도 있잖아. 더 이상 고생하실 일은 없을 거야.”
“저택 규율만 아니면 자주 가서 왕비 마마를 보고 오는 건데.”
“충고하는데, 그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왕야께서 앞으로 왕비 마마를 어떻게 하실지도 모르는데, 네가 몰래 가서 보는 걸 아시면 가만 안 두실 테니까.”
* * *
남월각의 분위기는 암담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던 백천범이 월향에게 물었다.
“오늘은 안 삐뚤어진 것 같지?”
월향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대로 괜찮은 듯합니다. 아니면 소인이 예쁜 머리로 빗어 드릴까요?”
“아니, 나도 잘 빗을 수 있어.”
백천범은 손을 들어 올려 비녀로 머리끝을 열심히 고정했다. 그녀는 머리를 빗는 일 정도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누가 시중을 들어 주면 좋긴 하지만, 아쉽게도 머지않아 그녀 홀로 모든 걸 감당해야 할 테니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월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측비를 들이신다는데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백천범은 조금 이상했다.
“걱정할 게 뭐 있어? 나한테 장가를 오시는 것도 아닌데.”
월규는 화를 내고 싶을 정도였다. 시중을 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천범의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은 가장 손해를 보기 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야께서 측비를 들이신다는 것은 이제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시겠다는 뜻인데. 가만히 참고만 계시다니요?”
백천범은 더욱 의아해하며 말했다.
“왕야의 마음속에 나는 애초에 없었는걸.”
월규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자 월향에게 눈짓을 보냈다. 월향이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측비와 서비가 혹여 함께 왕비 마마를 괴롭히기라도 하신다면 어찌…….”
백천범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 왕야께서 직접 고르신 여인들이니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마마께서는 마음씨가 참으로 넓으십니다. 하나 왕야께서 그걸 어찌 아신단 말씀이십니까? 그저 외모나 사주 같은 것들만 보셨겠죠.”
“우리 유모 말이 세상에는 그래도 착한 사람이 더 많대. 난 지금까지 악한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으니까 앞으로는 분명 좋은 사람만 만나게 될 거야.”
백천범은 거울에 제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 보더니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후원에 사람이 많아지면 서로의 처소에 놀러 갈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
월향과 월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렵사리 왕비를 모시는 시녀가 된 두 사람은 더 창창한 앞일을 고대하고 있었다. 왕비의 도움을 받아 좋은 남편까지 얻으면 이번 생에는 더 바랄 게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높은 지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왕비를 보니 안타깝지만 두 시녀의 앞길도 그리 밝진 않을 듯했다…….
* * *
유월의 열여덟째 되는 날은 초왕이 혼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초왕비를 맞을 때만큼 성대한 혼례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초왕이 직접 말을 타고 신부를 맞이하러 갔다.
길가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그의 모습을 지켜봤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초왕이 또 장가를 드는가? 지난번 그 혼사는 어쩌고? 얼마나 지났다고, 참으로 딱하구먼그래.”
“이번에 둘이나 들인다던데, 이게 죄악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난번엔 진왕이 대신 신부를 데리러 가더니 이번엔 또 어느 집 나리랍니까? 제법 반반하긴 한데 조금 무뚝뚝하게 생겼군요.”
“아무튼 초왕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초왕 본인만은 아닐 걸세.”
묵용감은 귀가 밝았던지라 대부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백성들에게 자신이 어떤 인상인지는 이미 백천범을 통해 들었다. 대체 백성들이 말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잡귀를 몰아내려 문에 붙여 놓는 문신도 아니고!
그를 둘러싼 유언비어 덕분에 여인들은 지독하리만큼 그를 피했고, 중매를 서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어 그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그의 조용한 삶도 막을 내렸다. 한 번에 두 명의 부인을 맞이하는 것만큼 시끄러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평관은 일찌감치 후원을 정돈하고 남월각과 가까운 낙성각을 측왕비의 처소로, 조금 거리가 있는 벽하각碧荷閣을 서왕비의 처소로 정해 두었다.
첩을 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가 가족들에게 절을 올리는 배례 의식은 필요 없었지만,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일인 만큼 묵용감이 직접 앞뜰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후원에는 시녀들이 신부의 시중을 들고 있었고, 그들은 앞뜰에서의 연회가 끝나길 속으로 간절히 기다렸다. 연회가 끝나고 초왕이 후원으로 와 신부와 합방을 하면 무사히 혼사를 치른 것이었다.
혼사를 치르는 두 신부는 평범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한 명은 대학사 수민, 한 명은 군기대신軍機大臣 고항顧恒의 딸이었다.
그런 만큼 친척도 많았고, 찾아오는 동료도 많아 지난 혼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연회 상을 세 차례나 새로 차렸지만, 아직 자리에도 앉지 못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넘쳐났다.
황제와 황후까지 직접 찾아와 축하 인사를 전할 정도였으니 묵용감도 감히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첫 번째 연회석이 끝났다. 황제와 황후도 돌아갔다.
맥이 다 빠진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손님들 대접을 후하게 하라 이른 뒤, 술에 취했다는 핑계를 대며 홀로 회림각에 돌아갔다.
술을 제법 마시긴 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던 그는 스스로 퇴로를 막은 이상 앞으로 괴로울 일은 없을 것이라 위안했다.
어떤 일들은 인연이나 운명이 따라야 했다. 그는 백천범과 인연이었다 할지라도 운명은 아니었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일은 억지로 좌지우지할 수도 없었다.
기홍이 차를 가져와 조심스레 그의 손 옆에 두었다.
“왕야, 차가 뜨겁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묵용감이 물었다.
“왜 앞뜰에 있지 않고?”
기홍이 답했다.
“앞뜰에서 일을 돕다 왕야께서 홀로 돌아가시기에 시중이 필요할 듯하여 돌아왔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그래, 몸이 피곤하니 물을 받아 놓거라. 목욕을 하고 쉬어야겠다.”
기홍이 주저하며 물었다.
“왕야, 오늘 밤은 어디에서 묵으실 것입니까?”
“어디에서 묵긴, 이곳에서 묵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신방에 화촉이 밝혀져 있습니다. 왕야께서 드시지 않으면 측비께서 상심이 크실 것입니다.”
묵용감은 눈을 깜빡이며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신부를 데려온 뒤, 신방에 들어야 혼사를 마치는 것이었다. 규율대로라면 오늘 밤은 측비, 내일 밤은 서비와 합방을 해야 했고, 그 후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묵고 싶은 처소를 고를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묵용감은 조금 얼이 빠져 있는 듯했다.
“피곤한데 내일 들면 안 되겠느냐?”
기홍은 난감했다. 술을 과하게 마신 듯한 그의 모습에 그녀가 좋게 타일렀다.
“왕야, 그렇다 한들 얼굴이라도 비치셔야 합니다. 면사포를 올려 주시고 합환주合歡酒만큼은 함께 드셔야지요.”
묵용감이 말했다.
“왕비와 혼사를 치를 땐 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기홍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혼사는 그때와 조금 다르질 않습니까, 왕야.”
이번에는 진정한 혼례였으니 규율에 따라 격식을 차려야 했다.
취기가 오른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거리며 안으로 향했다.
“다른 게 뭐가 있느냐, 내가 보기에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