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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9)화 (108/1,192)

제109화

묵용택이 깜짝 놀라 물었다.

“늘 저택에만 있는데 누구를 맘에 들어 한단 말입니까? 설마 형님의 호위무사입니까? 가동입니까, 영구입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구문제독 사장풍이다. 지난번 납치되었을 때 내가 구하러 가지 않아 가동이 사장풍에게 그녀를 구해 오라 부탁을 했다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니 그때 그자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묵용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열심히 기억을 되짚었다.

“사장풍이라면 저도 기억납니다. 뛰어난 인재가 아닙니까? 아직 어린데 구문제독의 자리에 올랐으니 앞으로 형님과 힘을 합치면 앞길이 그야말로 탄탄대로일 것입니다. 왕비께서 좋은 아이를 고르셨군요. 안목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묵용감은 콧방귀를 뀐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왕이 찾아온 덕분에 묵용감은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마음껏 술을 마셨다. 얼굴에는 살짝 웃음기가 감돌기도 했다. 두 형제는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여아홍 한 병을 비운 묵용감은 아직 부족했는지 서강西康 지역의 옥주玉酒를 내오라 분부했다. 서강옥주 또한 이름난 명주였다. 그윽한 향에 맛있는 음식까지 더해지자 두 사람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진왕이 술에 잔뜩 취하자 학평관은 마차에 그를 태워 돌려보냈다. 초왕도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비를 불러오라며 목청껏 소리쳤다.

학평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낮에 왕비를 찾아가 회림각에 와 달라 간절히 청했지만, 거절만 당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밤이 늦은 데다가 초왕도 술에 잔뜩 취했으니 분명 더더욱 오지 않겠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는 초왕이 술주정을 하는 것이라 여기고 멍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하지만 묵용감은 한 손으로 학평관의 옷깃을 쥐며 그를 들어 올렸다. 그는 붉게 충혈된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왕비는 어디 있는 것이냐?”

왕비를 데려오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 예감한 학평관은 재빨리 그를 달랬다.

“왕야께서 놓아주셔야 왕비 마마를 모시러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곧장 모셔오겠습니다.”

묵용감이 손을 놓자 땅으로 떨어진 학평관은 서둘러 남월각으로 뛰어갔다.

남월각에 도착하니 백천범은 막 저녁을 먹고 노랑이와 복도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학평관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서둘러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학평관이 황급히 그녀를 쫓았다.

“왕비 마마, 뛰지 마십시오. 우선 제 말씀을 들어 보시지요. 마마, 왕비 마마…….”

누구보다 빨랐던 백천범은 소리가 들리자마자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학평관이 도착했을 땐 이미 창문까지 꼭꼭 걸어 잠근 뒤였다.

학평관은 울상을 지은 채 문을 두드렸다.

“왕비 마마, 문 좀 열어 보십시오.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시녀들은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월규가 그에게 말했다.

“어르신, 왕비 마마를 회림각으로 데려가시려는 거면, 그만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왕비 마마는 절대 가시지 않으실 테니까요.”

월향이 거들었다.

“어르신, 이렇게 늦었는데 가더라도 내일 가는 게 좋겠습니다. 늦은 밤까지 저희 마마께서 왕야의 화를 들어야 한다니요, 너무 몰인정하십니다.”

학평관도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라고 이러고 싶을까? 왕비가 가지 않으면 술까지 취한 초왕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만약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이라도 들어 그에게 휘두른다면 이보다 더한 개죽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황보주아가 죽던 해,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초왕이 칼을 들어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오늘 역시 왕비가 가지 않으면 초왕이 어찌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해의 일을 떠올린 그는 더욱 힘을 실어 문을 두드렸다.

“왕비 마마,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왕야께서 술을 드셔서 회림각이 난리가 났습니다. 곧 죽어도 왕비 마마를 보시겠다고 끊임없이 소리를 치고 계십니다. 왕비 마마께서 다녀가시면 왕야께서도 다시 잠잠해지실 것입니다.”

안에서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더더욱 가지 않을 거예요. 맨 정신에도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시는데, 술에 취했다면 절 정말 어떻게 하실지도 모르잖아요.”

학평관이 속으로 생각했다.

‘왕비 마마를 어찌하지 않으시면 저희를 어찌하실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때, 차씨가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어르신, 왕비 마마를 모시고 오지 않아 왕야께서 크게 성을 내고 계십니다. 검을 뽑아 여기저기 휘두르시느라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구가 칼을 뺏으려다 해를 당할 뻔했습니다. 당장 모시고 가지 않으면 정말 누구 하나 죽게 생겼습니다!”

세상에나! 학평관은 체면도 신경 쓸 새 없이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씨도 그를 따라 바닥에 꿇어앉았다. 놀란 시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학평관은 감정을 잡고 눈물을 쥐어짜려 했지만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차씨를 한 번 꼬집었다. 눈치 빠른 차씨는 곧장 대성통곡하며 소리쳤다.

“아이고, 왕비 마마! 제발 좀 나와 보십시오. 왕야께서 사람을 죽이려 하십니다. 지금은 부모 형제도 못 알아보시고, 왕비 마마만 찾으신단 말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안 가시면 회림각의 노비들이 전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더 늦었다간 그야말로 피바다가 될 것입니다… 왕비 마마!”

문이 쾅 열리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백천범의 모습이 드러났다.

“갈 테니까 그만 우세요.”

월향과 월규가 깜짝 놀라 말했다.

“마마, 조심하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절대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야 해. 무슨 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학평관을 일으켰다.

“어르신, 어서 가요.”

하지만 서둘러 회림각에 도착하니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 그냥 돌아갈래요.”

학평관은 서둘러 그녀를 막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 이왕 오셨으니 잠시 둘러보고 가시지요. 왕야께서 괜찮으신지 확인한 뒤에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한 백천범은 그의 말대로 다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용감은 자신의 침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녹하와 기홍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학평관이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들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백천범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얼굴은 낮에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눈까지 새빨개져 있었고, 가만히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꼭 몸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백천범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너희는 다들 나가 있거라.”

하인들이 한순간에 밖으로 나가자 백천범은 더욱 긴장했다. 사람들을 내보낸 걸 보면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게 아닐까?

불안함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묵용감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이 말했다.

“예?”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그의 표정에 그녀는 감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리 오라니까.”

인내심을 잃었는지 그가 언성을 높였다.

깜짝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던 백천범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감히 그에게 손을 건네지는 못했다.

묵용감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무섭소?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백천범은 마른 침을 삼키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왕야, 절 때리지 마시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우스울 뿐이었다.

“때리지 않을 것이오.”

그가 터무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자 백천범은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묵용감이 있는 힘껏 그녀의 손을 쥐는 탓에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 왕야, 때리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살짝 힘을 빼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쥔 묵용감은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평평한 그녀의 가슴에 시선이 닿자 그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어린 계집이 뭐라고 그렇게나 마음이 흔들렸단 말인가? 그래서도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여름 이 늙은 작자가 감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욕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백천범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왕야, 저희 아버지를 욕하지 마십시오.”

“왜 욕을 할 수 없단 말이오?”

“아버지가 요 근래 왕야께 죄를 짓기라도 했는지요?”

“아주 큰 죄를 지었지. 그것도 두 가지나. 첫째는 주아를 죽인 죄. 둘째는 당신을 나에게 보낸 죄.”

백천범이 시선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저는 이곳을 떠나면 되니 두 번째 죄는 용서하실 수 있겠네요.”

“걱정 마시오. 안 그래도 내보낼 것이니. 백씨 집안의 딸이 어찌 본왕의 곁에 있을 수 있겠소.”

아무 말도 않던 묵용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시오.”

백천범이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이 서려 있는 까만 두 눈에 묵용감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잡아먹을 일 없으니 그리 무서워할 것 없소. 지난번 당신이 했던 말을 나도 한참이나 고민했소. 당신은 남월각에, 나는 회림각에서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예전처럼 지내자는 말 말이오. 그 말에 나도 동의하오. 이 말을 전하려고 부른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말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걱정 없이 편안히 남월각에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다시 쓸쓸하고 외로운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상심이 컸던 것이다.

“월향이와 월규는…….”

“그 애들은 당신의 노비가 아니오? 초왕비가 시중을 드는 이도 없이 지낸다는 소문이 나면 나만 우스운 꼴이 될 것이오. 예전처럼 지낸다고는 해도 괴롭히는 노비는 없으니 예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오. 혹여 무슨 일이 있거든 학평관이 해결해 줄 테니 그를 찾으시오. 나는…….”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합시다.”

그의 말에 백천범은 심장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했던 시간들이 정말 꿈이었다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힘껏 쥐면서 말했다.

“그리고 해 줄 말이 하나 더 있소. 조만간 혼사를 치러 측비와 서비를 맞을 것이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기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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