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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8)화 (107/1,192)

제108화

깨끗이 씻은 백천범은 서둘러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학평관은 혹여 낮잠에서 깬 초왕이 왕비가 보이지 않아 또다시 화를 내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왕비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게 어떠신지요? 저녁을 드시고 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남월각에서 쉴 거예요. 저녁도 먹으러 오지 않을 거고요. 왕야께서 이미 화를 다 쏟아 내셨으니 오늘은 더 이상 화내지 않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

왕비에게 속을 다 들킨 학평관은 민망해하지도 않고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께 돌아가도 좋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가실 수 없습니다. 잠시 뒤 왕야께서 왕비 마마가 보이지 않는다며 소인을 붙잡고 화를 내시겠지요.”

생억지를 부리는 것만큼은 백천범도 학평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왕야께서 일어나시면 다시 올게요.”

“무엇 하러 그리 힘들게 고생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왕비 마마의 방이 이곳에 마련되어 있는걸요. 잠시 이곳에서 쉬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녹하가 학평관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마마.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시지요. 왕야께서 마마를 보시자마자 얼굴 가득했던 수심이 걷히는 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회림각에 더 오래 계시다 보면 조만간 왕야께서 웃는 얼굴을 보이실지도 모릅니다.”

백천범은 수심이 걷히는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둘러싸인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그때 묵용감은 낮잠을 자지 않고,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답답해진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맞은편 창으로 삐뚤어진 쪽머리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백천범일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아직 회림각에 남아 자신의 방 건너편에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는 그녀를 보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보지 못하면 마음을 뒤흔드는 화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좋은 행실이 아니란 것은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끊어 내기로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를 보지 않으면 더 화가 치밀었다.

그 또한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이렇게 복잡한 감정은 느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아와 함께 지내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함께 지냈다고 하긴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땐 너무 어리기도 했고, 서로 익숙한 사이였기 때문에 혼인이 정해졌다는 말을 들어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셋째 오라버니라고, 그는 그녀를 주아라고 불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말을 타며 시간을 보낸 그들은 한 번도 말싸움을 하거나 서로에게 화를 냈던 적이 없었다. 그녀를 만날 땐 늘 태자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어울렸다.

하지만 한순간에 그녀가 사라졌다. 모든 것들은 그대로인데 그녀만 사라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심란한 마음이 나아지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거닐었다. 백천범의 방 앞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게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잠을 청할 때도, 밖을 나갈 때도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편이었다.

발을 올려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니 어린 계집아이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터라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윤기 나 보였다. 절세미인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이목구비의 그녀가 공교롭게도 그의 마음을 흔들어 댔다.

그는 한참 동안 침대 옆에 서서 그녀의 얕은 호흡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호되게 놀란 탓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을 살며시 펴 주고 싶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을 그녀에게 가져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빛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을 향했다. 분홍색 빛을 머금은 그녀의 입술은 어딘가 모르게 살짝 뾰로통해 보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걷힌 발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백천범은 눈을 뜨고 참았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 * *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황제는 들이켰던 차를 살짝 뿜어낼 만큼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묵용감은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예를 갖춰 말했다.

“폐하께 더 이상 걱정을 끼쳐서는 안 될 것 같아 깊게 고민한 끝에 올리는 말씀입니다. 길일을 고를 것도 없이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왕비와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왕비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폐하의 말씀처럼 저 또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일전에 왕비와 헤어지겠다더니 지금 당장 그리하려는 것이냐? 옛 사람을 보내고 새 사람을 들인다?”

묵용감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가 저택에 온 지 이제 세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 왕비를 보내면 흉흉한 소문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 문제는 후에 처리할 것입니다.”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니 황후에게 일을 잘 준비하라 이르마. 지난 과오는 잘 돌려놓아야지.”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앞으로 모으고 깊게 숙여 절을 올렸다.

“폐하와 황후 마마를 번거롭게 해 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군주와 신하를 떠나 너와 난 형제가 아니더냐. 큰형과 형수가 아우의 혼사를 준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묵용감은 황제와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더 나눈 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황궁의 지붕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배수진을 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실 누구를 위해 지조를 지켰다기보단 적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더 컸다.

겨우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을 만났는데,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니.

그는 자신이 백천범을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작디작은 백천범이 어찌 그의 마음을 움직였단 말인가? 설마 너무 오래 여인을 멀리한 나머지 몸에 쌓인 화기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지난번 기방에서 열을 분출해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낯선 여인에게는 몸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예 혼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그가 들이게 될 측왕비와 서왕비는 후에 그의 자식을 낳을 수도 있으니 남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어쩌면 진왕처럼 후원에 처첩들을 들이고 아들과 딸을 낳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짧지는 않았다. 그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독과 외로움에 적응해 왔다.

하지만 갑자기 누군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렇게 돌진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런 감정이 신기했던 나머지 아마 호기심에 가져선 안 될 마음을 조금씩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여동생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젠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녀가 저택에 머무는 이상 그는 편안한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그녀가 조금 더 커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좋은 사내를 찾아 시집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는 그녀가 당당하게 시집을 갈 수 있도록 혼수에도 신경을 써 줄 참이었다.

* * *

초왕의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먼저 그를 찾아온 사람은 진왕이었다. 그는 좋은 술을 가져와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셋째 형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명주 여아홍女兒紅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 묵힌 것이지요. 형님께 축하를 드리려 가져왔습니다.”

묵용감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내가 혼사를 치른다고 굳이 그런 이름을 가진 술로 가져온 것이냐?”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대충 의미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난 혼사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요.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제게도 진정한 형수가 생기는 것인데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인들이 정자에 상을 차리는 동안 두 형제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나무에 열린 복숭아가 어느새 주먹만큼 커져 있었다.

묵용택은 복사꽃이 채 지기 전 이곳을 찾았다가 야단을 맞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어린아이가 생각났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보며 미소를 짓던 그녀를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셋째 형님, 새로운 형수님을 들이면 예전 형수님은 어찌할 계획이신지요? 백 승상에게 돌려보낼 것입니까?”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에게 돌려보냈다간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테지. 차라리 시집을 보내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초왕의 저택에서 초왕비를 시집보낸다……. 혼사 소식이 전해지면 다들 몰려와 구경하겠다면서 난리법석을 떨겠군요.”

“그때가 되면 의매義妹로 삼을 것이다. 여동생에게 성대한 혼사를 치러 주는 게 뭐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셋째 형님께서는 형수님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시면서 왜 곁에 두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내게 백여름 그 작자를 장인으로 삼으란 것이냐? 허튼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거라!”

“이미 지난 일이지 않습니까, 이리 오래 마음에 품고 계실 필요 있겠습니까?”

“주아는 나와 혼인을 치르지 못한 약혼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날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해. 응당 그녀의 원한을 갚아 주어야지.”

묵용택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형수님을 내치시겠다면 차라리 제게…….”

“꿈도 꾸지 말거라.”

묵용감은 단칼에 거절했다.

“네게 보내느니 차라리 백 승상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조금 민망했던 묵용택이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셋째 형님, 형님께 이 아우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까? 임안성 안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저를 따르고 싶어 하는데요. 적어도 저에게 보내시면 평생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낼 곳은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후원에 이미 많은 첩을 두지 않았느냐? 게다가 성격들도 하나같이 보통이 아닌 듯하던데, 그런 곳에 보내면 괴롭힘만 당할 것이다.”

“셋째 형님께서 이리도 걱정을 하시는 걸 보니 영 마음이 편치는 않으신가 봅니다.”

“진지하게 그 애를 여동생이라 여기는 것뿐이다. 그러니 좋은 신랑을 구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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