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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7)화 (106/1,192)

제107화

밥도 먹고 차까지 마셨는데도 보내 주질 않으니 백천범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이런 무서운 곳에 두 번 다시 발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백천범은 용기를 내어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조용히 말했다.

“왕야,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왕야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묵용감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고, 정원의 복숭아나무만 쳐다볼 뿐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백천범은 그의 반응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치맛자락만 꽉 움켜쥐었다.

묵용감은 한참 뒤에야 알겠다고 대답했다. 백천범은 감옥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듯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내 황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쏜살같이 달리고 있으면서도 발바닥에 바퀴를 달 수 없는 게 한스럽게 느껴졌다.

어찌나 빠르게 뛰어가는지 그녀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묵용감은 그녀가 사라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학평관은 잔뜩 긴장한 채 유심히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주름진 그의 미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편안한 표정을 되찾은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학평관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왕비는 왕야의 화풀이 대상이 분명했던 것이다. 백천범이 왔다 가기만 하면 묵용감의 화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왕비를 데려오지 말라고 명한 적 없었으니 내일도, 모레도 왕비를 데려와 왕의 화를 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회림각의 상황도 훨씬 더 나아질 것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학평관이 나타나자 귀를 틀어막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듣지 않았다.

학평관은 어쩔 수 없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돌아갔다. 오늘은 틀림없이 봉변을 당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학평관이 홀로 돌아오자 묵용감의 안색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초왕에게 전할 말이 있어 방에 들어갔던 가동은 괜스레 말 몇 마디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걷어차인 뒤 내쫓겼다.

다리를 절며 방에서 나오는 가동의 모습에 학평관도 덩달아 겁에 질렸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총 관리인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평소보다는 거리를 두고 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결국 묵용감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어야 했다. 오늘은 화를 풀 대상이 없으니 고스란히 그 화를 몸에 쌓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는 화를 쏟은 뒤 비가 갠 듯 평온을 되찾았다면, 오늘은 폭우에 천둥번개까지 내리치는 듯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분노가 커져만 갔다.

사흗날이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던 학평관은 왕비를 회림각으로 데려오기 위해 힘 센 시녀 두 명을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시녀들이 자신을 끌고 나오려 하자 백천범이 복도 기둥을 붙잡고 소리쳤다.

“안 가요. 죽어도 안 갈 거예요! 그제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니 이제 더 이상은 왕야 눈에 띄기 싫어요. 어차피 왕야도 날 싫어하는데 왜 자꾸 데려가려는 거예요!

예전처럼 왕야는 왕야대로, 나는 나대로 살 거란 말이에요. 혼자 사는 것쯤은 어렵지도 않으니까 하인들도 전부 다시 데려가도 좋아요!”

학평관이 옆에서 백천범을 달랬다.

“아이고, 왕비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체 높으신 왕비 마마께서 시중을 드는 이도 없이 지내시다니요. 실은 그제도 상황이 꽤 나아진 편이었습니다. 왕야와 식사도 하시고 차까지 드셨으니 말입니다. 앞으로 조금씩 더 좋아질 것입니다.”

백천범이 문진 파편에 다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아지긴 뭐가 좋아졌다는 거예요1 이것 좀 보세요. 저한테 물건까지 집어던지셨다고요. 땅에 떨어졌으니 다행이지 만약 머리에 맞았으면 곧바로 황천길로 갈 뻔했어요. 괜히 또 찾아갔다가 다칠 게 뻔해요, 뻔해.”

“왕비 마마, 왕야께서 마음에 화가 쌓여서 그런 것입니다. 화를 다 내시면 바로 괜찮아지시지 않으십니까? 헌데 어제는 마마께서 곁에 계시질 않으니 화를 내셔도 전혀 나아지시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이러다간 회림각 하인들이 크게 다칠 것입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학평관의 속마음을 알아챈 백천범이 소리쳤다.

“결국에는 저를 왕야의 화풀이 상대로 만들려는 것이었군요! 내 뒤에 숨어서 화를 피하려고!”

이미 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학평관도 더는 숨기지 않았다.

“왕비 마마께서 왕야께 꾸지람을 들으시는 것은 회림각의 모든 하인들을 살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마마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하인들은 죽습니다.

어제는 가동을 발로 차고, 저에게 마구 욕을 하셨지요. 이러다간 그 화가 기홍과 녹하 아가씨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기홍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지 않습니까? 그런 기홍 아가씨가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이 백천범의 정곡을 찔렀다. 백천범은 그녀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 했다. 그녀가 잠시 망설이던 찰나, 학평관이 두 시녀들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시녀들은 백천범을 회림각까지 끌고 갔다.

결국 회림각에 끌려온 백천범은 기홍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때, 머슴이 달려와 묵용감이 집에서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백천범은 너무 기뻤던 나머지 껑충껑충 뛰고 박수를 치며 기홍에게 말했다.

“언니, 오늘 병어찜이랑 족발, 오리백숙 그리고 완자도 먹고 싶어요.”

기홍이 말했다.

“오리백숙과 병어찜은 그제 드셨으니 오늘은 다른 요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제는 왕야 때문에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단 말이에요.”

백천범이 애교를 떨며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언니, 오늘도 해 주면 안 돼요? 네?”

“알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그렇게 드시고 싶어 하시니 해 드려야지요.”

기홍도 백천범이 가여웠다. 좋은 시절을 얼마 보내지도 못하고, 다시 예전의 딱한 처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평관에게 끌려와 날마다 왕야의 화를 견뎌야 하다니. 왕비가 오면 하인들이야 편하게 지낼 수는 있었지만, 기홍은 그런 그녀가 너무 가여웠다.

기홍은 어린 왕비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 덕분에 초왕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초왕은 왕비가 곁에 없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한 기운이 뻗쳐 있는 듯했다.

학평관의 말이 맞았다. 어린 왕비는 초왕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만병통치약이었다.

* * *

묵용감이 없으니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 백천범은 자신의 앞에 차려진 음식을 내키는 대로 맘껏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노랑이가 생각났는지 월향이를 불렀다.

“오늘은 왕야께서 안 계시니까 노랑이랑 산책하고 싶어, 그동안 통 산책을 못 했거든.”

월향은 그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 노랑이를 데리러 후원으로 돌아갔다.

백천범은 식사를 마치고 얼음과자까지 먹은 뒤, 빵빵하게 나온 배를 내밀고 노랑이와 산책을 하러 갔다.

오랜만에 기홍의 요리를 맛본 그녀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사실 기홍의 요리가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매번 올 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탓에 차마 찾아올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묵용감이 매일 저택 밖에서 바쁘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매일 회림각에 와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트림을 한 차례 하고는 노랑이를 데리고 대나무 숲에 벌레를 찾으러 갔다. 손에 쥔 호미로 땅에 쌓인 낙엽을 치우면 종종 지렁이가 튀어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노랑아! 이리 와 봐, 여기 한 마리 있어.”

백천범과 노랑이는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그녀의 부름에 곧장 달려온 노랑이는 지렁이를 날카로운 부리로 정확하게 쪼아 집어삼켰다. 그렇게 백천범과 노랑이는 숲에서 벌레를 찾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노랑이가 배불리 먹자 백천범은 노랑이를 데리고 다시 정원으로 돌아왔다. 그때, 정원 한쪽에 서 있는 묵용감을 발견했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다행히 묵용감은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서둘러 그 틈을 타 회림각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비 마마, 산책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역시 학평관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오늘도 초왕의 욕받이가 되어야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다시 몸을 돌리자 묵용감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은 더러워진 그녀의 신발과 진흙투성이 치마, 손에 쥔 호미를 보더니 곧장 눈썹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게 다 무슨 꼴이란 말이오!”

백천범은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지만 마음속으로는 곧 이어질 더 큰 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묵용감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깨끗하게 씻기거라.”

학평관은 알겠다고 대답을 올리고는 자리를 떴다.

백천범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상황인지 알 턱이 없는 노랑이는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처럼 좋다고 착각했는지 묵용감 곁으로 다가가 신발을 마구 쪼아 댔다.

그 모습에 백천범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조용히 노랑이를 불렀다.

“노랑아, 어서 돌아와. 어서!”

몇 번을 쪼아도 묵용감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노랑이는 고개를 들어 갸웃거렸다. 너무 약하게 쪼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더욱 세게 쪼기 시작했다.

묵용감이 다리를 들자 백천범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곧장 묵용감에게 달려든 그녀는 그의 다리를 꽉 껴안고 소리쳤다.

“왕야, 밟으시면 안 됩니다. 밟으시려거든 저를 밟으십시오!”

묵용감은 그저 발을 옮기고 싶었을 뿐, 노랑이를 밟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백천범이 달려드는 바람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그가 백천범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백천범의 관심사는 오직 노랑이뿐이었다. 노랑이가 무탈하자 마음을 놓은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얼마나 심하게 바닥에 엎드렸는지 먼지투성이 된 얼굴이 참으로 우스웠다.

묵용감은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뒤이어 밖으로 나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기홍은 초왕이 왕비를 이 꼴로 만들었다고 착각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왕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뒤, 그녀를 달랬다.

“이제 괜찮습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화를 내시면 바로 괜찮아지시니까요.”

백천범은 조금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이것도 화를 내신 거예요?”

기홍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마를 땅에 밀치시기까지 했는데 이것도 화를 내신 거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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