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묵용감은 그녀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그마한 입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날의 달큼한 과일 향과 그녀 몸에서 나던 향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어쩌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아 있었고,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백천범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묵용감은 순간 손에 잡힌 물건을 집어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문진文鎭이 산산조각 났고, 방 안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바깥을 지키던 하인들은 물건이 깨지는 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 백천범이었다. 작은 옥 조각이 그녀의 손등을 베어 찌릿한 통증이 끼쳤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놀란 눈으로 묵용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묵용감도 냉기가 서린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백천범은 묵용감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아마 예전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을 것이다. 역시 초왕은 자신을 싫어했던 것이다. 죽이진 않는다 해도 곧 내쫓을 게 틀림없었다.
이럴 거면 그간 왜 그리도 잘해 주었단 말인가? 황실 동물원에도 데려가고, 그네도 만들어 주고, 진상품까지 가로채서 그녀에게 포도를 주던 묵용감의 다정함에 그녀는 경계심을 풀고 그를 가족이라 여겼다. 이곳에 머무르며 계속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 원래 모습이, 그녀를 싫어하는 그 모습이 드러나는 듯했다.
편안하게 지내던 날들도 결국엔 꿈이었던 것이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법. 실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래도 백천범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깊게 절했다.
“왕야,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곤장이든 채찍질이든, 왕야께서 노여움을 푸실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화를 계속 마음에 담아 두시면 몸이 상하실 것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다시 예전처럼 왕야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다만 왕야께서 저를 내쫓으시겠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멍하니 앉아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가슴 한편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쫓는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분명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본왕의 명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소!”
절을 하고 나가려던 백천범은 그의 호통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옷소매를 끌어당겨 손등에 난 상처를 가렸다.
그제야 그녀의 상처를 발견한 묵용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큰소리로 하인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기홍과 녹하가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의자에 앉아 있고, 한 명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서 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두 사람은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왕의 명을 기다렸다.
하인을 부르긴 했지만 묵용감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얘진 상태였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왕비의 손에 상처가 났으니 어서 치료해 주거라.”
기홍과 녹하는 곧장 대답을 올린 뒤, 백천범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왔다. 가여운 백천범은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던 나머지 다리가 저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만약 기홍과 녹하가 부축하지 않았다면 또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평관은 무수리를 불러 방을 치우라 분부한 뒤, 슬쩍 묵용감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한바탕 화를 낸 그의 얼굴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그저 욕받이가 되어 버린 왕비만 가여울 따름이었다.
* * *
백천범을 자신의 방에 데려온 기홍은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살갗만 살짝 스쳐서 난 상처인 것을 확인한 기홍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백천범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기홍을 껴안고는 목 놓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린 왕비가 상심이 크다는 것은 기홍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초왕이 화를 내면 겁에 질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틀 전에도 크게 놀란 어린 왕비가 오늘 또 이런 일을 겪었으니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기홍은 왕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
“왕비 마마, 괜찮습니다. 왕야께서 조금 무서워 보이시긴 해도 마마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신걸요.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시어요.”
백천범은 흐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전 그저 또다시 버림받은 것뿐이에요. 흑흑흑…….”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왕야께서 직접 그네도 만들어 주실 만큼 마마를 아끼신다는 거 다 아시잖아요.”
“이젠 아니에요. 왕야께서는 그저 잠시 절 데리고 놀고 싶으셨던 것뿐이에요…….”
울면 울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그녀였다. 그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망상 따윈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의 마음은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묵용감의 방에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실 그는 백천범의 우는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져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었다.
방을 나가자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묵용감은 울음소리를 따라 기홍의 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끊임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왕야께서 화를 참지 못해 절 죽이시는 줄 알았거든요. 언니는 못 봤죠? 흑흑, 왕야의 눈동자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말이에요. 정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흑흑…….”
그는 뒷짐을 진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서서 방 안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녹하는 방 안에 있는 이들에게 초왕의 존재를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묵용감의 앞이라 감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뒤이어 백천범을 달래는 기홍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는 것을 싫어하던 백천범도 서러운 감정을 서둘러 털어 버린 뒤 눈물을 닦고 기홍에게 말했다.
“언니, 그만 돌아갈래요.”
돌아가겠다는 단호한 말투와 달리 그녀의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간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홍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소인이 월향이를 시켜 왕비 마마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지만, 백천범은 마치 간식 때문에 떼를 쓰다 울던 아이처럼 곧바로 웃음을 지어 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언니밖에 없다니까요.”
하지만 밖으로 나온 백천범은 가만히 서 있는 묵용감의 모습에 또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방에서 시작된 긴장감이 이젠 복도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많은 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묵용감이 또다시 화를 낼까 봐 두려웠던 백천범은 차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두 주인이 가만히 서 있으니 하인들도 덩달아 경직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회림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지자 슬며시 고개를 든 백천범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묵용감은 그녀가 아니라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곧 커다란 기둥에 다다르려는데 뒤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본왕의 명도 없이 감히 어딜 가는 것이오?”
뒤를 돌아보니 묵용감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 담긴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백천범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학평관이 황급히 그녀를 잡아끌었다.
“마마, 어렵사리 발걸음을 하셨으니 오늘은 왕야와 함께 점심을 드시지요.”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다. 어차피 서로 입맛만 떨어져 제대로 먹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묵용감이 반대하지 않자 녹하는 기홍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시녀는 백천범을 정자로 데려갔다.
“왕비 마마, 오늘 제가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오리백숙을 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저는…….”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병어찜도 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식사를 마치시면 딸기 맛 얼음과자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귤 맛으로요.”
* * *
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는 식사 시간이었다.
맛있는 것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던 그녀였지만, 도저히 입맛이 당기질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싸늘한 분위기에 도통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애타게 얼음과자만 기다렸다. 묵용감이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자 기홍은 그녀에게 얼음과자를 가져다주었다.
얼음과자를 한 입 떠먹자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는 맛이 덜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얼음과자까지 다 먹은 뒤에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묵용감이 식사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앉아 그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며 그녀를 성가시게 했다.
결국 그녀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으로 잽싸게 모기를 잡았다. 그런데 별안간의 손뼉 소리에 묵용감을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자신을 책망할까 봐 걱정이 된 백천범은 겹친 손바닥을 재빨리 떼어 내며 이유를 설명했다.
“모기를 잡느라 그런 것입니다.”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훑고는 다시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학평관이 서둘러 하인에게 분부했다.
“어서 왕비 마마 곁에 향을 피워 드리거라.”
한참이 지나서야 묵용감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도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녹하가 차를 내어 왔다.
차만 다 마시면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백천범은 가만히 앉아 차를 들이켰지만 묵용감은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가 보겠다는 의미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학평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학평관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딴청을 피우며 먼 산만 바라보았다.
이제 믿을 사람이라고는 기홍과 녹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기홍과 녹하를 향해 또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기홍과 녹하도 그녀를 보지 못한 듯 멍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다시 묵용감을 바라보니 그가 여전히 느릿느릿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고스란히 그의 시야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