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학평관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날마다 늘 차가운 얼굴을 하던 그가 오늘은 조금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학평관은 이 변화가 분명 어린 왕비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회림각을 찾자 화를 내긴 했지만, 하인들에게까지 죄를 묻진 않았다. 상황이 정리된 뒤에는 비가 갠 듯 평온함을 되찾았으니 하인들에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이후로도 그의 안색을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 평소와 달리 안정적이고, 평온한 심기를 유지했다. 밥을 먹을 땐 평소보다 더 많이 먹기도 했고 기홍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학평관의 뇌리에 문득 묘안 하나가 스쳤다.
만약 어린 왕비가 정말 초왕의 분풀이 상대라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화가 쌓이면 몸이 상하는 법. 화를 너무 오래 참아 분출하지 못하면 초왕의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회림각의 노비들까지 고려했을 때 왕비를 회림각으로 불러 초왕이 화를 식힐 수 있게 해야 했다.
* * *
다음 날, 조정에서 돌아온 묵용감은 어제의 평온했던 모습과는 달리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듯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림각의 하인들은 휴식 같았던 짧은 하루를 보낸 뒤, 다시 살얼음판에 선 듯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한참 고민하던 학평관은 결국 이 일의 원인이 어린 왕비에게 있는 것은 변함없으니 그녀가 와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학평관은 염치불고하고 다시 한번 남월각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학평관의 청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가요. 왕야께서 한 번만 더 오면 제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하신걸요.”
학평관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그날은 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줄곧 화를 내시다간 왕야의 몸이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왕비 마마, 그간 왕야께서 진심을 다해 왕비 마마를 보살펴 드렸으니 부디 이번만큼은 마마께서 왕야의 화를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천범이 물었다.
“왕야께서 대체 왜 화가 나신 것인데요? 제가 왕야를 화나게 한 것이에요?”
학평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장본인도 모르는 일을 제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빙긋 웃으며 어린 왕비를 어르고 달랬다.
“왕야께서 매일 정무로 바쁘시니 조금씩 화가 쌓이시겠지요. 아마 그 화가 쌓이고 쌓여 이렇게 되신 듯합니다.”
그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마음씨가 따뜻하신 분이니 왕야께서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내게 하실 수는 없으시겠지요. 마마께서 왕야를 다독여 주시면 분명 왕야의 마음이 풀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백천범은 무섭게 화를 내던 묵용감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왕야께서 저 때문에 황제 폐하께 꾸중을 듣긴 했지만, 그 일은 시일이 많이 흘렀으니 분명 화가 풀리셨을 거예요. 지금은 왕야께서 절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깐 안 가는 게 좋겠어요. 절 보면 더 화를 내실 게 분명해요.”
“왕비 마마, 부디 이 늙은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왕비가 재차 거절하자 학평관은 하는 수 없이 절을 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역시나 백천범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러지 마시어요. 실은 저도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그동안 왕야께서 잘 보살펴 주셔서 이제는 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왕야께서 절 싫어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내쫓으시는 게 나을 텐데 말이에요.”
“아이고, 왕비 마마. 부디 그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내쫓으시다니요. 머지않아 왕야의 심기가 나아지시면 다시 예전처럼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늘 이러시는 거예요? 좋았다가 나빴다가……. 그러면 하인들은 어떻게 지내라고요?”
학평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왕야께서 자주 이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화가 많이 쌓이시는 듯합니다.
저희는 왕야의 노비이니 주인의 걱정을 함께 짊어지고 있습니다. 바깥일은 도울 수 없으나 저택에 돌아오셨을 때만이라도 왕야가 편히 지내실 수 있게 도와드려야 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왕비 마마?”
백천범이 망설이며 말했다.
“왕야께서 정말 제 다리를 부러뜨리진 않으시겠지요?”
“왕비 마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학평관은 가슴을 몇 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끔찍이 생각하십니다. 다만 요 근래에 쌓인 화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지신 듯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왕야의 눈에 자주 띄시고,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 주시면 왕야께서도 다시 예전처럼 대해 주실 것입니다.”
백천범은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을 끔찍이 아껴 주었던 지난날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잘 다독여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다 마유 포도에 관한 일도 얘기해야 했다. 자신 때문에 황제에게 미움을 사다니, 정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회림각에 오긴 왔지만 두려운 마음까지는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기홍이 새로 만든 간식을 가져다주자 그녀는 지난날의 두려움을 새까맣게 잊었다. 그녀는 나무 그늘에 앉아 수련이 얼마나 자랐는지 바라보며 간식을 맛있게 먹었다.
옆에 서 있던 녹하가 말했다.
“왕비 마마, 그네는 안 타십니까? 왕야께서 마마를 위해 만들어 주셨는데, 몇 번도 채 타지 않으셨습니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포도 시렁에 데려갔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과 온화한 말투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깃털이며 끈 장식, 방울과 그네 판 모두 그가 하나하나 정성 들여 만든 것이었다.
그땐 그녀의 시중을 들어 주는 것처럼 보일 만큼 참 잘해 주었는데……. 그런 그의 심경에 문제가 생겼으니 그녀가 마땅히 그를 위로해 주어야 했다.
그네에 앉자 포도 덩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더운 건 아니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그네를 탔다. 그네가 움직이면 들려오는 맑은 방울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막 반월문을 지나치던 묵용감은 희미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에 흠칫했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무성한 포도 덩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어떤 계집이 감히 겁도 없이 그네를 타고 있단 말인가?
학평관이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핀 뒤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그네를 타고 계십니다.”
묵용감은 그날처럼 크게 화를 내진 않았고 덤덤히 그에게 물었다.
“여긴 무엇 하러 왔단 말이냐?”
“왕비 마마께서 한동안 왕야를 뵙지 못하셨으니 염려가 되어 찾아오신 듯합니다.”
그랬단 말인가? 묵용감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서워서 벌벌 떨던 그날의 기억은 까맣게 잊고 또다시 찾아왔다고?
그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기둥 앞에 섰다. 그곳에서는 백천범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너무 큰 그네를 만든지라 그 위에 앉아 있는 어린 계집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만 잠시 스칠 뿐이었다.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는 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지켜보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학평관은 줄곧 두근거리던 가슴을 그제야 조금 안정시켰다. 왕비에게 썩 꺼지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시작이 좋은 편이었다.
백천범은 몸을 틀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가동과 영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있다는 것은 묵용감이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심장이 조금씩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찾아가야 할까? 괜스레 찾아갔다 그가 호통을 치는 건 아닐까? 정말 다리를 부러뜨리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자신이 이곳에 온 사실을 그가 아직 모를 때, 조용히 달아나는 게 상책일 듯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으니 그네를 탈 마음도 사라졌다. 묵용감이 방울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네에서 내려와 쏜살같이 정원으로 달려갔다.
월향을 불러 같이 남월각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녀를 발견한 학평관이 황급히 앞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들어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백천범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
“그냥 관두는 게 좋겠어요. 왕야께서 절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마음이 급해진 학평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마마, 소인이 드린 말씀은 다 잊으신 것입니까? 들어가셔서 왕야와 말씀을 나눠 보시지요. 마마께서 위로해 주시면 분명 왕야의 화도 풀리실 것입니다. 왕야의 심기가 다시 좋아지시면 마마께서 날마다 숨어 지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기홍과 녹하도 옆에서 그를 거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법. 그들이 보기에는 왕비 때문에 왕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분명했으니, 왕비가 그의 화를 풀어 주는 게 옳았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꾸물거리며 문 앞으로 향했다. 가동은 그녀를 대신해 직접 발을 걷어 주었고,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힘.내.십.시.오!”
백천범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묵용감은 밖에서 멀쩡하다가도 집에만 돌아오면 혼자 멍하니 앉아 있게 되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틈만 나면 화가 치솟아 손에 있는 물건을 깨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네에서 울려 퍼진 방울 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오늘은 그리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습관처럼 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자그마한 체구가 천천히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그는 매섭게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어딜 들어오는 것이오!”
안 그래도 심장이 쿵쾅거리던 백천범은 그의 호통에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야, 저 때문에 화나신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제게 호통을 치셔도 좋아요. 이렇게 화를 쌓아 두시면 몸이 상할 거예요.”
알긴 무엇을! 묵용감은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무모하군. 요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오?”
백천범은 이곳까지 왔으니 할 말은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요동치며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야, 마유 포도 일로 이러시는 것이죠? 진상품인 줄도 모르고 무심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어요.
폐하께서 왕야를 혼내신 것이에요? 화가 나시면 저한테 다 풀어 버리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날 마유 포도 얘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왕야께서 진상품을 가져와 제게 주실 일은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