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요즘 들어 술을 자주 마시게 된 묵용감은 몸에 작은 병을 지니고 다녔다. 황보주아의 무덤가에 도착한 그는 돌계단에 앉아 술병을 꺼내 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삼 년이 지나니 주아의 모습도 점점 흐릿해져만 갔다. 열심히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손바닥만 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 삐뚤어진 쪽머리만 떠올랐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난 그는 주먹으로 있는 힘껏 돌계단을 내리쳤다. 화강암을 깔아 놓은 돌계단은 쇠처럼 단단했고, 그 충격이 온전히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는 스스로를 비웃듯 한차례 웃었다. 차라리 통증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주아가 생을 마감할 때 그는 피바다가 된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그녀를 찾아왔지만 이 무덤만 그를 반길 뿐이었다. 비석도 없이 그저 흙으로 대충 덮여 있던 묘지를 그가 조금씩 가꿔 놓은 덕에 지금의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가 열다섯이 되던 해, 열셋의 주아와 혼인이 정해졌다.
사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허물없이 지낸 친구 사이였다. 황보인皇甫仁은 당시 조정의 대학사이자 태자의 스승인 명문가 출신 신하였다.
그러다 선황의 병세가 위중해지면서 나라 안팎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했고, 묵용감은 먼 지방으로 보내졌다.
지방에서 수도의 소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그가 전해 받은 급서에는 그저 역모를 꾀한 태자가 황제를 끌어내린 뒤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고, 대황자가 군대를 이끌고 궁을 진압해 다시 선황의 자리를 되찾았으니 서둘러 돌아오라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
그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을 땐 이미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였다. 선황은 임종 직전 친필로 황제의 자리를 대황자에게 물려주겠다는 유서를 작성했다. 당시 대신들도 그 상황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거짓은 아니었다.
물론 태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군대를 동원해 성 안팎을 점령하며 궁을 진압할 것이라 협박했다. 묵용감은 혼란스럽던 그 시기에 목숨을 걸고 반란군과 싸워 임안성을 지켜 낸 것이었다.
태자는 잔혹했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묵용감은 병마대원사兵馬大元師로 영전하여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는 혼란이 잠잠해진 뒤에야 선황이 임종 직전에 내린 마지막 명이 황보 대학사의 가문을 몰살하라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명을 받들고 공포한 자는 백여름이었다. 묵용감은 모든 게 백여름이 꾸민 일이라고 여겼다.
대학사와 백여름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역모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백여름이 아예 황보 가문을 말살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당시의 전란을 통해 혁혁한 공을 세우며 높은 관직을 얻음과 동시에 약혼녀를 잃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고 시국까지 혼란스럽자 그는 아예 이 일을 미뤄 두고 계속해서 반란군을 진압하며 온 힘을 다해 황제의 대업을 보좌했다.
그때부터 그는 백여름을 자신의 원수라 여겼고, 그에게 맺힌 한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 * *
날이 점차 저물자 그는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말에서 내린 그에게 학평관이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왕야, 다녀오셨습니까?”
그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무심코 왕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왕비는 회림각에 와 있느냐?”
깜짝 놀란 학평관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건넨 것도 깨닫지 못한 듯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학평관은 무심코 왕비의 행방을 묻는 묵용감을 보며 아직 왕비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말은 무섭게 해도 마음속으로는 왕비를 걱정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내대장부들은 워낙 체면을 중시하니 그를 모시는 자로서 그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틀간, 회림각은 그야말로 얼음골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몸을 덜덜 떨 정도로 냉기가 돌았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했다. 그가 돌아오면 회림각 전체가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혹여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다들 입도 벙긋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평관은 내일 왕비를 회림각에 데려오는 게 어떨지 고민했다. 어린 아내이니 초왕이 그리 심한 앙심을 품고 있진 않을 것이었다.
이튿날, 그는 한달음에 남월각으로 달려가 왕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늘 깊게 고민하는 법이 없던 백천범은 회림각을 찾지 말라는 말에 남월각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학평관이 자신을 찾아오자 그녀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어르신, 오셔서 떡 좀 드세요. 월향이랑 월규랑 같이 만든 거예요.”
학평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회림각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난리인데 어린 왕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왕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학평관은 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었다.
“왕비 마마, 오늘 회림각에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기홍 아가씨가 새로운 간식을 만들어 왕비 마마께서 드시러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와, 그럼 가야죠!”
간식을 먹어 보라는 말에 백천범은 신이 나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왕야의 심기가 불편하시니까 자주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학평관은 뒤가 조금 켕겼다. 왕의 심기를 확인하기 위해 왕비를 데려다 시험해 보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결과가 괜찮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초왕이 어린 왕비에게 화를 입힐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회림각의 상황을 떠올리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
“시종일관 심기가 좋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나아지셨는지 어제는 왕비 마마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셨지요.”
“그래요?”
백천범이 다시 기뻐하며 말했다.
“제 이야기까지 꺼내셨다니, 그럼 어서 가야죠.”
* * *
조정에서 돌아온 묵용감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흠칫 놀란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왕비가 온 것이었다.
묵용감을 맞이하며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던 학평관은 잠시 편안해진 왕의 얼굴에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학평관이 알랑거리며 몇 마디 아부를 건네자 묵용감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학평관은 잰걸음으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백천범이 정원에서 제기를 차고 있었고, 녹하가 옆에서 숫자를 세어 주고 있었다.
백천범의 위로 눈부신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제기를 따라 위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높게 올린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거리는 게 참으로 우스웠다.
묵용감이 들어오자 녹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췄다. 백천범도 제기차기를 멈추고 활짝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를 보자 부아가 치미는 듯 무섭게 호통쳤다.
“누가 오라 했단 말이오? 한 번만 더 찾아왔다간 본왕이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것이니 당장 썩 꺼지시오!”
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모든 이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천범은 몸을 몇 차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매섭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너무 놀라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그를 알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심하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꼭 그녀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무섭게 소리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그녀를 보자 묵용감은 또다시 화가 치밀었고 한 번 더 호통쳤다.
“뭐 하는 것이오! 본왕이 걷어차야 사라질 것이오?”
백천범은 목숨은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도망쳤고, 두 시녀도 그녀를 따라 황급히 회림각을 떠났다.
남월각에 도착한 백천범은 여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마신 뒤에야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무섭고 끔찍했다. 초왕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 맞았다. 따뜻하기만 했던 예전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차가운 모습으로,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의 호통 소리에 간이고 쓸개고 할 것 없이 다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몇 차례나 쓰다듬으며 길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마유 포도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났단 말인가? 이렇게 화가 오래 가다니. 그녀는 묵용감의 심기가 나아지기 전까지 회림각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괜스레 그의 눈에 띄는 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었다.
* * *
백천범과 두 시녀는 도망이라도 쳤지만 회림각에 남아 있는 하인들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가장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역시 학평관이었다. 직접 왕비를 데려와 왕을 화나게 했으니 가장 먼저 벌을 받게 될 게 틀림없었다.
하인들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묵용감의 지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묵용감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백천범이 차던 제기를 집어 들고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역시나 묵용감에게 발길질을 당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학평관이 가장 기뻐했다.
그는 조심스레 묵용감의 방으로 향했다. 왕비의 제기는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고, 묵용감은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왕야, 녹하 아가씨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 하겠습니다.”
묵용감이 짧게 대답한 뒤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차를 내어 오너라.”
“예, 소인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서둘러 방을 나온 학평관은 초왕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깐 무섭게 화를 내더니 지금은 모든 분노가 사라진 듯 평온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차를 내어 오자 묵용감은 대수롭지 않은 듯 편하게 물었다.
“농촌의 수확 상태는 어떻다더냐?”
학평관이 공손히 답했다.
“올해는 날씨가 좋아 벌써 한차례 수확을 한 뒤에 모를 다시 심었는데, 아주 잘 자라고 있다 하옵니다. 분명 작년보다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별다른 대꾸 없이 차만 들이켰다. 잠시 뒤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을 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