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03)화 (102/1,192)

제103화

월향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왕비 마마, 당분간 피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말씀하시고도 잊어버린 것입니까?”

회림각에서 무수리로 지냈던 월향은 묵용감이 화를 낼 때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학평관이 특별히 그녀를 불러 이 말을 전한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겨 초왕이 벌을 내린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어차피 왕야도 안 계신데 겁낼 게 뭐 있어? 기홍 언니를 만나러 갈래.”

“그러다 갑자기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왕야께서 언제쯤 오시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 전에만 오면 돼.”

회림각에 가기로 마음먹은 그녀를 당해 낼 재간이 없던 월향은 힘으로 막아설 수도 없었기에 그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회림각에 도착하자 역시나 학평관은 눈을 부릅뜨며 월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서둘러 학평관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는 줄곧 콧방귀만 뀌며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지었다. 억울했던 월향은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왔다.

사실 백천범은 묵용감의 심기가 왜 좋지 않은지 알고 싶어 회림각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기홍과 녹하에게 물어도 두 사람 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학평관은 횡설수설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백천범은 어제 궁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서복궁에서 묵용감이 갑작스레 수상한 기침을 했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백 귀비는 줄곧 모든 걸 알면서도 묵용감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꾀를 내는 듯했고, 황후는 그런 백 귀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황제는 긍정도, 부정도 않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어제의 일을 하나하나 연결해 본 백천범은 그제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깨달았다.

묵용감은 그녀에게 주기 위해 진상품이었던 마유 포도를 중간에 가로챘고, 황제가 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비록 어제는 초왕을 책망하지 않았다 한들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다 멍청한 자신 때문이었다. 백 귀비의 계략에 빠져 아주 쉽게 그녀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내뱉은 것이다. 역시 백 귀비가 그녀를 궁에 들라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백 승상의 집이든 황궁이든 계략과 음모를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비교하자면 황궁이 좀 더 살벌했다. 잠시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초왕은 이 일 때문에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백천범은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황후와 귀비도 먹지 못한 포도를 자신이 하인들과 나눠 먹었다니. 그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크게 성을 낼 것이었다.

학평관은 이따금씩 모래시계를 확인하며 초왕이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했다. 허둥대는 게 꼭 뜨거운 솥을 기어가는 개미 같아 보일 정도였다. 만약 오늘도 그에게 발길질을 당했다간 뼛조각이 땅에 나뒹굴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비에게 돌아가라고 청해야 했던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가왔다.

“왕비 마마, 월향이 소인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인지요? 왕야께서 요즘…….”

“왕야께서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백천범은 죄책감이 드는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 저 때문이에요.”

‘그걸 알면 제발 서둘러 돌아가시란 말입니다!’

그는 제 생각을 삼키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왕야께서 보셨다간…….”

“왕야를 기다릴 거예요.”

“예?”

학평관은 왕비의 말에 놀라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왕비 마마, 그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왕야의 화가 다 풀린 뒤에 왕야를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왕비 마마, 부디 소인을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울상을 지으며 애원하는 늙은 하인에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그의 간청을 승낙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갈게요. 왕야께서 기분이 나아지시면 그때 다시 올게요.”

학평관은 크게 기뻐하며 쇠뿔도 단김에 빼려는 듯 서둘러 그녀를 배웅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왕비 마마.”

그는 백천범이 시녀들과 노랑이를 이끌고 반월문으로 나서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대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묵용감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위험할 뻔했구나.”

묵용감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 멀어지는 백천범의 뒷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어린 계집은 언제나처럼 빠른 걸음걸이로 처마를 따라 걷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어제 굳은 다짐을 한 그였지만 조금은 무기력해졌다. 그녀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녀가 보고 싶었다.

설마 방금 회림각에 다녀간 것인가? 자신을 찾으러? 회림각에 들지 말라는 명을 듣고 그 이유를 따져 물으러 온 것이란 말인가?

말에서 내린 그는 고삐를 머슴에게 넘긴 뒤, 축 늘어진 채 천천히 안으로 향했다. 학평관이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왕야,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녹하 아가씨에게 목욕물을 받으라 분부할까요?”

묵용감은 그리하라고 짧게 대답한 뒤, 갑작스럽게 멈춰 서서 무엇인가를 물으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왔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겁이 난 학평관은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두방망이질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학평관은 심호흡을 하며 속을 달랬다.

‘아이고, 간 떨어질 뻔했네!’

* * *

묵용감은 스스로 결정을 내린 일은 온 힘을 다해 완수할 만큼 자신을 잘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감정과 이성이 서로 얽혀 힘들긴 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온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폭풍전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회림각의 하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유독 불안해하던 기홍이 녹하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대체 왜 저러시지? 왕비 마마의 회림각 출입도 불허하시고 말이야.”

녹하도 그런 그가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왕비 마마를 못 오게 하셨지만, 정작 왕야께서도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두 분이 싸우시는 것도 본 적 없는데 말이야!”

녹하가 문 앞으로 다가가 슬쩍 밖을 내다봤다. 묵용감이 있는 서재 앞을 가동과 영구가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문을 나섰다.

그녀는 가동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뒤가 꽉 막힌 영구에게 묻는다 한들 자신의 주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들을 향해 다가가던 녹하가 가동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동은 곧장 쫄래쫄래 그녀 앞으로 달려왔다.

“녹하야, 무슨 일 있어?”

녹하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 왕야께서 요즘 왜 그러시는 거야? 왕비 마마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가동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

녹하가 몸을 휙 돌려 돌아가려고 하자 가동이 급히 말을 바꾸었다.

“혹시…….”

녹하가 다시 가동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혹시 뭐?”

잠시 고민하던 가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에서 왕비 마마를 데리고 돌아오셨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왕야가 갑작스럽게 뛰쳐나가셨잖아. 나랑 영구가 따라오지도 못하게 하시고 말이야. 기홍 아가씨가 방에 들어가 보니 왕비 마마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고 하니 두 분이 다툰 것도 아닐 테고……. 그렇게 되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뭔데, 어서 말해 봐!”

가동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께서 실성을 하신 게 아닐까?”

“너야말로 미친 거 아니야?”

녹하가 경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감히 왕야를 욕보이다니, 왕야께 다 말씀드릴 테니까 두고 봐.”

가동은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와 더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해서는 안 될 말을 섣불리 내뱉은 것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녹하야, 그저 농담일 뿐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줘.”

녹하가 그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냥 말만 하면 되지, 왜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그녀가 몸을 돌리자 가동이 또다시 그녀 앞을 막아섰다.

“녹하야, 주머니는 언제 만들어 줄 거야?”

녹하가 언짢다는 듯 말했다.

“누가 만들어 준대?”

가동이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녹하야, 그러지 말고 하나만, 응? 사내대장부가 이런 주머니를 가지고 다닌다고 다들 얼마나 비웃는데.”

녹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 마마의 마음이 담긴 거니까 계속 차고 다녀.”

“왕비 마마께서도 이제 신경 안 쓰신단 말이야. 녹하야, 그러지 말고 하나만 만들어 주라, 응?”

끈질기게 부탁하는 가동의 모습에 녹하는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 설마 왕비가 가동에게는 수를 놓아 주머니를 선물하고, 왕야에게는 주지 않은 일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설사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가동의 허리춤을 흘겨본 녹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안 어울리긴 하네. 내일 새로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그만 차고 다녀.”

“야호!”

가동은 그녀의 대답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날마다 밖에 나가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사다 줄게.”

이렇게 계속 왕래를 이어 나가다 보면 그의 뜻이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녹하는 여전히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없어.”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그녀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가동은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가 푼수처럼 웃으며 서재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서재 안을 힐끔 들여다보니 묵용감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책상에는 공문을 잔뜩 쌓아 놓은 채였고, 두 눈엔 초점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뒤, 그가 서재를 나왔다. 가동과 영구는 묵용감을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잠시 나갔다 오려는 것이니 따라올 필요 없다.”

가동이 말했다.

“왕야, 그래도 어디에 가시려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묵용감이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거의 탄식을 내뱉는 듯한 말투였다.

“주아의 기일이 다가오니 가서 보고 오려는 것이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영구와 가동은 가만히 묵용감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가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께서도 참, 황보 아가씨께서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마음을 쓰시다니. 정말 정이 깊으신 분이야.”

영구는 무표정으로 가동을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동이 물었다.

“뭐야, 왜 웃어?”

영구는 대꾸도 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행동했다.

이렇게 정이 깊은 사람이라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원수의 딸을 좋아하게 되니 황보주아에게 미안했을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