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초왕의 저택으로 들어선 가마가 회림각 앞에 멈춰 섰다. 왕비를 맞이하러 나온 기홍이 발을 올렸지만 백천범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기홍이 묵용감에게 왕비가 잠이 들었다는 손짓을 해 보이자 묵용감은 깨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가마 앞으로 다가가 백천범을 품에 안고 방으로 향했다.
깊게 잠들지 못한 백천범은 그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다 온 것이에요?”
끊임없이 하품을 하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백천범의 모습에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자던 거 마저 자시오. 침대에 데려다줄 테니.”
그는 백천범을 자신의 방에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신발을 벗기고 이불도 살며시 덮어 주었다. 어린 계집은 쌔근거리다가 몸을 한 번 뒤척이더니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묵용감은 그녀 옆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유 포도 일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일을 크게 만든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백 귀비의 꿍꿍이인지 황제의 뜻인지 그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백천범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바라보니 두 뺨이 발그레해진 것도 모자라 입술까지 평소보다 더 붉었다. 열이 올라 더웠는지 발로는 끊임없이 이불을 걷어찼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니 그녀는 역시나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 그녀 허리에 감긴 띠를 풀고 겉옷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여름옷이라 얇긴 했지만, 겹겹이 입었으니 아마 제법 더웠을 것이었다.
그가 손을 대자 그녀는 잠결에도 무의식적으로 직접 옷을 벗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시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몸을 덮고 있던 비단옷이 걷히자 가느다란 그녀의 팔과 다리가 드러났다. 긴 목과 눈부시게 하얀 어깨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과실즙 향이 퍼졌고, 방 안 공기에까지 스며들었는지 희미하게 달큼한 향이 났다.
묵용감이 살짝 허리를 숙여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시야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들어오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아주 근접한 거리까지 맞닿게 됐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묵용감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입술이 백천범의 입술과 맞닿은 후였다. 자신의 기이한 행동에 놀란 그는 공중에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곧장 그녀의 곁에서 떨어졌다.
이렇게 큰 움직임에도 백천범은 잠에서 깨지 않았고, 몸을 한 번 뒤척이고는 다시 가만히 잠들었다. 역시 과실즙을 너무 많이 마셔 살짝 취기가 올라온 듯했다.
그는 충격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꿈을 꾼 건 아닌지 의심이 될 만큼 정신이 흐릿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술에는 여전히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살짝 핥으니 달큼한 과실즙의 향까지 느껴졌다.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것도 아주 확실히 백천범에게 입을 맞춘 것이었다.
당황한 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멍하니 선 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간 백천범의 곁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그 기분을 백천범 앞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그가 백천범을 여동생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동안 자신조차 속여 왔던 것이다. 그는 분명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고, 좋아하는 마음에 그녀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 사실이 믿어지지도, 믿을 수도 없었던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 말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가동과 영구가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그가 냉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두 사람은 그저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켰다.
묵용감은 쏜살같이 말에 오르더니 저택을 종횡무진하며 급히 길을 나섰다.
어찌 원수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빠르게 말을 몰아 성 밖으로 향한 그는 넓게 닦인 길을 꺾어 돌아 산길로 들어섰다.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도착한 그는 말에서 내려 산 중턱에 있는 외딴 무덤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묘지는 잡초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묘 주변으로는 작은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직사각형 모양의 묘비에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황천으로 가는 길에 꽃이 피었구나.
때마침 구름을 뚫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네.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약한 바람에 옷깃만 스치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묘비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백여름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약혼녀 황보주아의 무덤이었다.
백여름은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을 죽인 원수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그를 증오했는데 어떻게 그의 자식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그녀를 여동생처럼 대해 주기로 한 것은 그녀가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백여름이 아끼지 않는 자식인 데다 몇 해 뒤 시집을 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여동생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여인으로서 좋아하고 있었다니.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어린 계집아이를!
어찌 되었든 백천범이 백여름의 딸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몸에 백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그녀에게 더 깊이 빠질 수는 없었다. 그리되면 분명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백여름 그 늙은 작자가 백천범을 저택으로 보낼 때 이미 이런 간약한 모략을 세워 둔 게 아닐까?
정말 그가 백천범을 미끼로 자신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라면 감히 어림도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에 끊임없이 땀이 흘렀지만,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괴로워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백씨 집안의 사람에게 빠져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진상품을 가로챈 어제 일만 해도 그랬다.
황제가 그에게 죄를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그의 주의를 일깨우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제야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아차렸다.
공이 높은 신하는 군주를 위협하는 법인데, 그런 행동에 황제는 분명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땐 황제는 물론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이는 분명한 그의 과오였다. 깊게 생각하지 못한 탓에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바로 깨달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자칫했다간 크게 잘못된 길로 나아갈 뻔했다.
“주아야.”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내뱉자 가슴 부근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황보주아는 그의 약혼녀이기도 했고,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한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백여름을 끌어내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직 그 원한을 다 씻지도 못했는데 원수의 딸과 엮이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해가 서쪽으로 저물어갈 때까지 황보주아의 무덤 앞을 지키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은 멀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저택을 멍하니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을 몰았다.
묵용감이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눈치 빠른 머슴이 재빨리 대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묵용감은 넋이 나간 듯 초점 없는 두 눈으로 앞만 바라보았다. 머슴이 그에게 인사를 올렸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지나갈 뿐이었다.
회림각의 하인들은 오후 내내 불안에 떨었다. 초왕이 갑자기 뛰쳐나가는 모습에 왕비와 말다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홍이 방에 들어갔을 때 왕비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잠을 자고 있었다.
기이한 그의 행동에 하인들은 겁에 질려 있다가 초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그를 맞이하러 밖으로 나왔다.
묵용감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그들 틈에 보이지 않자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행방을 가장 먼저 물어보았겠지만 앞으로는 그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학평관은 그의 모습이 아까보다는 많이 침착해 보인 탓에 곧장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췄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식사를 마치신 뒤 남월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화가 솟구친 묵용감은 그를 걷어차며 호통쳤다.
“앞으로 왕비를 회림각에 들이지 말거라.”
묵용감은 말을 내뱉자마자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그의 말에 모든 하인들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궁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왕비를 품에 안아 조심스럽게 아껴 주던 초왕이었건만. 한나절 만에 그의 태도가 급변한 이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기홍을 비롯한 하인들은 초왕과 왕비와의 관계가 점점 친밀해지고 있다고 여겼다. 왕비가 조금 더 크면 두 사람은 진정으로 부부가 되어 자식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그의 변화에 그들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의아해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왕비에 관한 태도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성을 내지 않았고, 서재에 앉아 밤새 서예를 하다 잠을 청했다.
학평관 또한 그의 까닭 없는 행동이 의아했지만 주인의 명이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왕비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퍽 난감했다. 매일같이 회림각을 찾는 그녀를 막아야 하니 어린 왕비가 크게 상심할 게 분명했다.
결국 그는 왕비에게 직접 전하는 대신 월향을 불러 왕야의 심기가 좋지 않아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왕비를 회림각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분부했다.
월향은 학평관의 말을 들으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초왕이 왕비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왜 화를 입는단 말인가?
그녀가 다시 남월각으로 돌아왔을 때, 백천범은 노랑이와 놀고 있었다. 백천범은 돌아온 월향의 표정이 좋지 않자 궁금한 듯 물었다.
“학평관 어르신께서 왜 부르신 거야?”
월향은 혹시나 자신의 주인이 상처라도 받을까 봐 살짝 에둘러 표현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요즘 왕야의 심기가 좋지 않으셔서 걸핏하면 성을 내시니 왕비 마마께서 화를 입지 않게 당분간 왕야와 마주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심기가 안 좋아지신 거지?”
“그 이유까진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신 게 아닐까요? 왕비 마마께서 도와 드릴 수 없는 문제일 테니 당분간은 왕야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왕야께서 성을 내시면 얼마나 무서운지 왕비 마마께서도 아시잖아요.”
백천범의 기억 속에 묵용감이 화를 내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그를 잘 몰랐던 예전엔 조금 차갑고 흉악한 사람이라 여기긴 했지만, 그는 줄곧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백천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학평관 어르신께서 한 말이니 당분간 피해야겠지. 왕야의 심기가 나아지시면 찾아가야겠다.”
월향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백천범의 피하겠다는 말은 묵용감이 저택에 있을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시간이 되자, 백천범은 노랑이를 데리고 회림각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