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묵용감이 가슴을 치며 더욱 심하게 기침을 하자 깜짝 놀란 백천범이 급히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왕야, 왜 그러십니까?”
켕기는 마음에 묵용감은 힐끗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도중에 진상품을 가로챈 것은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일도 아니었다.
그저 포도 몇 송이에 불과할 뿐 그다지 중요한 물건도 아니었으니 적어도 그의 생각에는 별일 아니었다. 매년 변방의 소국小國 사신들이 특산품을 진상할 땐 수없이 많은 물건을 실은 행렬이 이어졌다.
궁 안뿐만 아니라 권신權臣들에게도 나누어 줄 만큼 많은 양이었기 때문에 권신 중에서도 가장 권력이 높은 그가 포도 몇 송이를 가져가는 것쯤은 별것 아니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이 이야기를 꺼내니 그도 조금은 난처했다.
한없이 기다렸던 말을 백천범이 꺼내자 백 귀비는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왕비가 마유 포도를? 궁에서도 구하지 못했는데 어찌 구했는지요? 어제 궁으로 진상된 토번 특산품에도 마유 포도는 없었는데……. 그만큼 아주 귀한 포도지요.”
상황을 이미 추측한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귀비의 기억이 틀렸다네. 본궁이 좋아하는 포도는 남쪽의 여지荔枝와 용안龍眼이지. 얼마 전 궁으로 많은 양이 들어와 한동안 끊임없이 먹었으니 이제 내년을 기약해야 할 걸세.”
백 귀비는 끝까지 마유 포도를 물고 늘어졌다.
“왕비, 그 포도가 어디서 난 것인지요. 본궁도 좀 구해 보려 하는 것이니 알려 주시지요.”
백천범은 단순했지만 불길한 마음에 이번만큼은 머리를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때 묵용감이 목을 몇 차례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이 일은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덤덤히 손을 내저었다.
“이미 알고 있다. 고작 포도 몇 송이일 뿐이니 그만두거라.”
백 귀비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
“초왕비가 먹은 마유 포도가 토번의 진상품이었군요. 헌데 어찌 궁에 가져오지 않은 것입니까?”
황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늘 침착했던 그녀였지만 백 귀비의 모습에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정말이지 제 아비보다 훨씬 더 간사한 인간이었다.
황제도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을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일을 백 귀비가 속속들이 캐내려는 탓에 일을 더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양도 얼마 되지 않아 궁으로 가져온다 한들 나누기 어려웠을 테니, 초왕비에게 상으로 주는 것도 나쁠 것 없지.”
황후는 불 난 집에 부채질할 기회만 노리는 백 귀비를 훑어보며 말했다.
“폐하, 이렇게 모이기도 어려운데 신첩의 궁으로 가 함께 수라를 드는 게 어떠신지요? 폐하께서도 한동안 초왕과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셨고, 신첩도 초왕비를 처음 만났으니 신첩의 궁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좋소. 셋째야, 황후가 호의를 베푼 것이니 초왕비와 함께 들렀다 가거라.”
우선은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백 귀비에게서부터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말에 따랐다.
자신만 두고 다들 떠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 귀비는 찻잔을 던져 산산조각 냈다. 공들여 만든 상황이건만 고작 이런 결과라니? 황제는 어째서 화도 내지 않고, 벌도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몇 마디 꾸지람도 없이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다니!
* * *
봉명궁에 도착한 황후는 수라를 올리라 분부했다. 황제가 발길을 했으니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이 차려졌다.
바로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백천범은 낯설기만 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투명 인간 취급에 익숙했기 때문에 너무 많은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다.
상에 차려진 음식은 하나같이 뛰어난 맛을 자랑했다. 하지만 황제와 함께 먹는 자리인지라 규율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규율을 잘 몰랐던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자신 앞에 놓인 음식만 먹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국을 먹을 때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황후의 우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니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녀는 입도 크게 벌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깨작거렸다.
황후는 밥을 조금밖에 먹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저를 내려놓았다. 궁녀들은 황후가 손을 닦을 수 있게 곧장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온 뒤, 장미 우린 물을 올렸다. 그들은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물러났다.
황후가 수저를 놓자 더 먹기 난처했던 백천범은 과실즙만 조금씩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황후가 웃으며 물었다.
“음식이 초왕비의 입맛에도 잘 맞는가?”
백천범은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기홍이 해 준 것보다는 조금 부족했다.
“예. 아주 맛있습니다.”
“맛있으면 자주 와서 들게. 나들이도 가고, 나와 이야기도 나누며 피로도 풀고. 폐하,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상석에 품위 있게 앉아 있던 황제가 황후의 말에 답했다.
“앞으로 초왕비가 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윤허하겠소. 귀비도 보고 황후도 만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겠구려.”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백천범을 묵용감이 슬쩍 꼬집었고, 그녀는 그제야 예를 갖춰 인사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리 예를 갖출 것 없다네. 앞서 말했듯이 모두 한 가족이니 왕비가 오고 싶거든 언제든지 궁에 와도 좋네. 황후와 말동무도 되어 주고 동서지간에 가까이 지내면 얼마나 좋은가.”
동서지간이란 말에 백천범은 정말 황후가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복잡한 규율만 없었다면 더욱 가까워질 텐데…….
황제는 초왕의 큰형이고, 황후는 큰형수니까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다면 서로 마음 졸일 일도 없으니 분명 더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황제는 기품 있어 보이면서도 여전히 위엄이 느껴졌지만, 황후는 그런 느낌 없이 시종일관 웃는 모습으로 상냥하게 백천범을 대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조금은 유약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백천범은 그런 그녀가 백 귀비보다 훨씬 더 좋았다.
과실즙을 다 마신 백천범은 아무도 잔을 채워 주지 않자 직접 따르기 위해 병을 들었다. 그러다 그만 댕그랑 소리를 냈고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당황한 그녀는 잔을 놓칠 뻔했지만, 묵용감이 재빨리 손을 뻗어 잔을 받쳐 들었다.
“지금도 충분히 마신 듯한데 더 마시려는 것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에이, 술도 아닌걸요.”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술은 아니지만 발효된 탓에 너무 많이 마시면 취기가 느껴질 수도 있네. 안 그래도 오늘 제법 많이 마신 듯하니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곧장 쓰러져 잠이 들지도 모르네.”
묵용감이 이 틈을 노려 황제와 황후에게 고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 왕비가 아직 사리 분별을 잘하지 못해 좀 더 마셨다간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만 데려가 보겠습니다.”
식사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인 데다 황제도 기분이 좋았는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서 데려가거라. 앞으로 궁에 왕비도 자주 보내고.”
묵용감은 백천범을 이끌고 예를 갖춘 다음 봉명궁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준비된 가마를 타고 나란히 궁궐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마에서 내렸다. 백천범은 마음이 무거운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묵용감 옆을 묵묵히 따랐다. 묵용감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백천범이 타고 온 가마는 궁 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 묵용감은 그녀를 가마에 태운 뒤 자신은 말을 타고 천천히 저택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떠난 뒤로도 황제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자 황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황후가 보기에 초왕비는 어떤 것 같소?”
“아주 재미있더군요. 저는 초왕비가 마음에 듭니다.”
“그저 재미있기만 했소?”
“폐하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지요. 초왕이 한 행동이 초왕비의 뜻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황후가 그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폐하, 포도 몇 송이 때문에 화가 나시는 것입니까?”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초왕은 늘 침착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소.”
“그저 포도 몇 송이를 가져가 왕비의 환심을 산 것뿐입니다. 이게 그리도 원망스러우십니까?”
황후가 황제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저와 폐하는 어린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저는 초왕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갑니다. 예전에 폐하께서도 신첩을 보러 한밤중에 창을 넘지 않으셨습니까. 종종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한들 그리 책망할 수는 없지요.
아직 어린 초왕비를 아끼고 달래면서 늘 기쁘게 해 주고 싶어 하는 초왕의 모습이 예전에 신첩을 대하시던 폐하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그녀의 말에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초왕을 탓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진상품을 사사로이 가로챘다는 사실은 썩 듣기 좋은 일은 아니질 않소. 만약 초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이 날아갈 일이었소.”
황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오늘 초왕이 왕비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단둘이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측비를 들이는 일은 잠시 미뤄 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럴 때 괜스레 참견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왕비에게 아이가 생긴 뒤에 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긴 시간 홀로 지내던 셋째가 어린 계집아이에게 넘어갈 줄이야. 아마 백여름도 자신의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나도 초왕비가 꽤 괜찮은 아이라 여겼소. 어서 둘의 마음이 결실을 맺길 바랄 뿐이오.”
“그럼 포도 몇 송이로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한 번 웃어 보시어요, 폐하.”
황후가 손가락으로 황제의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국 황제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춘 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눕혔다.
황후가 그런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폐하, 신첩의 몸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니 폐하께서 원하시거든… 귀비를 찾아가시지요. 귀비가 자식을 낳으면 폐하의 기반도 더 든든해지실 것입니다.”
황제가 가만히 황후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짐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곳에서 당신을 지킬 것이오.”
황후가 흐느끼며 말했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고통을 받으셔야 한단 말입니까?”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