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자유분방한 그녀의 말투에 소태감은 동그래진 두 눈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다시 가마에서 잠을 청할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사리 분별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궁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말은 문 앞에 서서 대기하라는 의미였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는 일종의 궁내 규율이었다.
모든 이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니 이에 대한 반응만으로도 쉽게 그 사람의 성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부분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여유롭고 의젓하게 모든 것을 감내하는 사람과 참지 못해 함부로 행동하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초왕비는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듯 시종일관 침착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마에 들어가 잠을 청하려는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백 귀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궁녀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느릿느릿 물었다.
“초왕비는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입구를 지키는 궁녀가 밖을 염탐한 뒤 다시 백 귀비에게 고했다
“마마, 초왕비께서 보이시질 않습니다.”
백 귀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돌아갔단 말이냐?”
황제가 특별히 입궁을 지시한 것이었으니 만나지도 않고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 버린 듯했다.
궁녀는 다시 밖으로 나가 상황을 확인한 뒤 돌아와 고했다.
“마마, 초왕비께서는 지금 가마에서 잠을 청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들라 하시면 다시 오겠다고 하셨답니다.”
“…….”
어릴 때부터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더니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초왕비를 들라 하라.”
궁녀는 예를 갖춰 그녀의 명을 받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이 들어왔고,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백 귀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귀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작은 몸집에 백 귀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일어나거라.”
바닥에서 일어난 백천범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백 귀비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녀가 차를 올리자 백천범은 찻잔을 손에 쥐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그녀가 백 귀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귀비 마마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백 귀비는 여동생에게 일말의 미소도 짓지 않았다. 현격히 격이 떨어지던 백천범이 그녀와 비슷한 신분으로 상승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웠다.
예전의 그녀는 훗날 백천범과 서로 마주 앉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조회를 마친 뒤, 황제의 시선이 초왕에게 멈췄다. 하지만 이 시간만 되면 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초왕은 대신들과 함께 황제에게 절을 올린 뒤 금란정을 빠져나왔다. 황제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한참이나 허공에 손을 뻗고 있던 황제는 결국 그만두기로 단념했다.
묵용감이 오문을 지나 서쪽 측문으로 나가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영구와 초조해하는 가동의 모습이 보였다. 목을 쭉 빼고 안을 살피던 가동은 묵용감이 보이자마자 곧장 그에게 달려왔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입궁하셨습니다.”
묵용감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로 궁에 왔단 말이냐?”
“백 귀비의 명이라며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묵용감은 몸을 돌려 다시 궁 안으로 향했다. 진공작도 다시 돌려주었거늘,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 한단 말인가?
아무리 황실 귀족이라 해도 함부로 후궁 출입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황제를 찾아가야 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자 황제는 전혀 의아하지 않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돌아온 것이냐?”
황제의 눈에 담긴 장난기에 그가 서둘러 예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폐하, 귀비께서 초왕비를 궁으로 부르셨다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짐이 허락한 일인데, 당연히 알고 있지. 안 그래도 방금 전 알려 주려던 참이었는데, 어찌 그리 금방 사라진단 말이냐?”
황제가 느긋하게 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귀비가 초왕비를 괴롭힐까 걱정이라도 되는 것이냐?”
“시집을 오기 전 왕비와 귀비의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왕비인지라 귀비의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입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나이는 어려도 혼사까지 치른 몸인데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을 테지. 친정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들, 궁에서 가족을 만난 것이니 마음속 앙금은 이미 다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비가 어찌 여동생을 만나게 해 달라고 짐에게 청했겠느냐?”
황제는 고개를 들어 묵용감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알겠다. 그리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 네 왕비가 멀쩡한지 짐과 보러 가자꾸나.”
묵용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왕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 유모를 구해 규율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문을 나선 두 사람은 가마를 타고 후궁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백천범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이씨 부인의 품성을 보면 친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악독한 유모가 바늘로 백천범을 찌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악하는 그녀를 붙잡고, 무섭게 바늘을 들이대는 모습을 생각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자신도 모르게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멀리 서복궁의 용마루가 보이자 그는 당장 가마에서 내려 뛰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니 눈을 감은 채 정신 수양이라도 하는 듯 유난히도 편안한 모습이었다.
서복궁에 도착한 뒤, 황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분부했다. 그가 미소를 띤 채 묵용감에게 말했다.
“둘이 무얼 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조용히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
묵용감도 바라던 바였기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들어서니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리에는 백 귀비만이 아니라 황후까지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과실즙을 마시고 있었다.
백천범은 잔을 들고 머리를 흔들며 더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금귤이 들어 있어 많이 마시면 어지러울 수도 있다네.”
황제와 초왕의 모습을 발견한 백 귀비는 급히 일어나 예를 갖췄고 그제야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듯했다.
“모두 일어나거라. 그리 어려워할 것 없다.”
초왕은 황후와 귀비에게 예를 갖춘 뒤 한쪽으로 물러났다. 자유분방한 백천범도 황제를 보니 조금은 위축된 듯 조용히 묵용감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손에 쥐고 있던 옥잔을 그에게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왕야, 한번 드셔 보시어요. 아주 맛있어요.”
묵용감은 퍽 난감했다. 좋은 걸 그와 나누고 싶어 하는 그녀의 모습에 잔을 받아 들고 싶었지만, 황제의 앞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대답만 한 뒤 평온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모두에게 분부했다.
“다들 어서 앉으시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짐이 와서 흥을 깬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려.”
백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가져오신 과실즙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맛이 뛰어나 초왕비가 특히 좋아했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그제야 백천범에게 향했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두 눈은 까맣게 빛났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 덕분에 시종일관 웃고 있는 듯했다. 조금은 평범한 외모였지만 똘망똘망한 눈빛이 계략 따위를 품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백여름의 딸이었으니 그 속까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백여름이 왜 하필 이 계집아이를 초왕에게 보내려 한 것인지 줄곧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마 초왕이 끔찍이도 싫었거나 세간의 소문처럼 이 계집아이를 미끼 삼아 초왕을 무너뜨리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황제의 눈에 그녀는 그저 희생양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총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던 황제가 상냥한 미소로 물었다.
“초왕비는 이번이 두 번째 입궁인가?”
백천범이 급히 바닥으로 내려와 예를 갖추자 황제가 손을 저었다.
“앉아서 말하게. 오늘은 군주와 신하를 가릴 것 없이 한 가족으로 모인 것이니 편하게 말해도 좋네.”
자리에 편안하게 기대앉은 황제는 어좌에 근엄하게 앉아 있던 모습과는 달리 매우 사근사근했다.
“예. 지난번 춘계 연회 때 이후로 오늘이 두 번째 입궁입니다.”
“그래. 귀비가 궁에서 많이 외로울 텐데 앞으로 두 자매가 자주 만남을 가져 돈독한 사이로 지내길 바라네.”
마음이 내키지 않은 백천범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궁이 너무 커서 길을 잃을까 무섭습니다. 게다가 저는 궁의 규율도 잘 알지 못하니 자주 와서 언니를 성가시게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황제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 앞에서 자신을 ‘저’라고 칭하다니. 정말 규율을 하나도 모르는 듯했다.
묵용감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과실즙은 어찌 만들어야 하는지요? 돌아가 시녀들에게 한번 만들어 보라 해야겠습니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만드는 법은 쉽다고 생각하면 쉽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발효가 되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충분히 지나 잘 숙성된 것은 맛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비가 좋아하니 본궁이 잠시 뒤 사람을 불러 저택으로 보내 주겠습니다.”
백천범이 황급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앞으로 맛있는 것이 있으면 저도 마마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황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자주 들라 하시지 않았는가? 가끔씩 날 찾아와 동서지간에 이야기도 나누고 기분전환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걸세.”
백천범은 황후의 제안에는 곧장 승낙했다.
“예. 다음에 맛있는 걸 싸 들고 마마를 뵈러 오겠습니다.”
백 귀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왕비는 황후 마마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지요?”
백천범이 말했다.
“언니가 알려 주면 제가 준비해 오겠습니다.”
황제는 눈을 내리깐 채 백 귀비가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황후 마마께서는 과실즙도 좋아하시지만 포도나 살구 같은 과일도 좋아하시지요.”
백천범이 말했다.
“아, 마마께서 포도를 좋아하십니까? 저택에 심은 포도가 다 익으면 마마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백 귀비가 그녀를 훑으며 말했다.
“그런 일반 포도는 잘 드시지 않고, 토번의 마유 포도 같은 것들을 좋아하시지요…….”
흠칫 놀란 묵용감이 백천범의 입을 막으려 급히 기침을 해 댔지만, 그녀는 끝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아, 마유 포도요? 저도 어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