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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9)화 (98/1,192)

제99화

그 이야기에 백 귀비가 눈을 번뜩였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예. 소인이 은량을 주어 캐낸 정보입니다. 초왕야께서 성 밖으로 마중을 나가셔서 마유 포도 상자를 가져가는 바람에 결국 목록에서도 지워졌다 하옵니다.”

백 귀비가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참 잘하였구나.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해 주어야지.”

그녀가 난지에게 말했다.

“상으로 금자를 주거라.”

약삭빠른 마육은 곧장 머리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올렸다.

궁 안의 환관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서복궁에 배정되면 백 귀비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주인과 걱정을 나누는 것 또한 그들의 중요한 임무였다.

귀비라는 높은 신분을 가진 데다 황후의 몸이 병약하니 나중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백 귀비의 옷자락에라도 매달려 그녀 편에 서는 게 분명 옳은 선택일 것이라 믿었다.

백 귀비는 고민에 빠졌다. 황제에게 고자질을 할 때마다 늘 황후가 초왕을 감싸 주니 이번에는 반드시 황제와 단독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녀는 하인에게 시원한 오매탕烏梅湯을 준비하라 이른 뒤, 양심전養心殿으로 향했다. 마침 밖으로 나온 황제와 마주친 그녀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췄다.

“신첩,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예를 갖출 것 없소.”

백 귀비에게 늘 예의 있게 대하던 황제는 이번에도 직접 그녀를 일으켰다.

“귀비가 무슨 일로 짐을 찾은 것이오?”

백 귀비가 옅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방금 폐하께서 하사해 주신 상을 받았습니다. 하여 신첩이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오매탕을 달여 왔습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드시면 금방 열이 가실 것입니다.”

“잘 받아 보았다니 다행이구려. 보기 어려운 것들이니 제법 눈요기가 될 것이오.”

백 귀비가 물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렇소. 황후의 몸이 좋지 않으니 짐이 가서 살펴야지.”

“신첩도 아침에 문안 인사를 올렸습니다. 기분이 좋으신지 다 같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토번의 진상품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것보다도 마유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지요. 때마침 진상품을 나누어 주셨으니 지금쯤 마마께서 포도를 드시고 계시겠군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마유 포도가 진상되지 않아 황후가 실망을 하겠구려.”

백 귀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진상되지 않았단 말씀이십니까? 분명 네 가지 품종이 진상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첩에게 세 종류가 보내졌기에 마유 포도는 전부 황후 마마께 보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귀비에게 네 품종이 올라왔다고 한 것이오?”

백 귀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폐하, 부디 신첩을 책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진상품을 전하는 사람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에 신첩이 곧장 사람을 보내 물은 것입니다. 포도와 참외, 대추, 살구 모두 네 가지 품종을 가져왔다 하였습니다. 과일 종류만 물은 것이라 다른 것은 신첩도 알지 못하옵니다.”

황제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예를 갖춰 진상할 땐 짝수로 맞추는 법인데, 올해는 포도만 홀수로 보냈다. 네 가지를 보냈다면서 어찌 궁에 온 것은 세 가지란 말인가?

백 귀비는 말을 아꼈다. 지금 바로 초왕의 얘기를 꺼낸다면 그녀의 의도가 뻔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난지와 함께 서복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들뜬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황제는 다른 건 몰라도 황후만큼은 끔찍이 여겼다. 그런 황후가 좋아하는 과일을 훔쳐 갔으니, 아무리 초왕이라도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의기양양한 그녀의 표정에 난지가 입을 열었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확인해 보실까요?”

백 귀비가 미인지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며 말했다.

“분명 그러실 테지. 초왕비가 폐하의 호랑이를 독살한 일이 있고 나서 이제 겨우 마음을 추스르셨을 텐데. 이번에는 황후 마마가 드시고 싶어 하시던 마유 포도를 훔쳐 갔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사람이시니 죄까지 묻진 않으셔도, 분명 마음에는 담아 두실 것이다. 그러니 마육에게 무슨 소식이 있거든 즉시 나에게 전하라고 이르거라. 본궁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난지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조정에서 힘쓰시고, 마마께서는 궁 안에서 힘을 쓰시니 초왕이 아무리 고고한 군신이라 한들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승상의 입지가 공고해지실수록 마마님의 지위도 높아질 테니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실지라도 마마님의 체면을 깎진 못하시겠지요.”

백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황제 폐하께서 초왕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 여기느냐? 신하의 공이 너무 크면 군주를 위협하는 법이지. 두고 보아라. 폐하께서 조만간 초왕을 벌하실 것이다.”

백 귀비의 추측대로였다. 백 귀비가 떠난 뒤 황제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승해를 불렀고, 비밀리에 무엇인가를 분부한 후에 봉명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음흉하게 눈속임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던 초왕은 모든 일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그가 토번 사절을 맞이하며 포도를 가져간 것 역시 지켜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돈 몇 푼에 금방 귀띔을 해 주는 사람이 나올 만큼 그날의 사실을 파헤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승해가 황제에게 자신이 들은 사실을 고했다.

“황제 폐하, 애초에 네 가지 품종의 포도를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성 밖에서 초왕이 마유 포도가 든 상자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어좌御座에 앉아 손가락에 낀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던 황제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한참 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가져갔다고 하더냐?”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다른 것은 없고 포도만 가져갔다고 합니다.”

초왕이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어린 왕비에게 먹이려 한 것이겠지. 허나 그날은 그녀와 헤어질 것이라고 말한 그가 그녀에게 주려고 진상품까지 가로챘다?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초왕의 속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알았으니 초왕비에게 귀비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입궁을 하라 이르거라. 왕비가 입궁하거든 함께 모일 자리를 만들거라.”

지난번 연회에서 초왕비를 자세히 보지 못한 황제는 그저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녀와 관련된 소동이 생기자 문득 단순한 어린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누군가 그녀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초왕의 충심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만약 누군가 배후에서 악행을 저지르게 하여 타락의 길로 이끈다면 그가 일깨워 주지 않을 수 없었다.

* * *

이튿날, 궁에서 백천범을 데려갈 인부가 저택에 도착하자 학평관은 초조함에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입궁을 하라니!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 귀비의 명이었다. 어린 왕비와 사이가 좋을 리 없는 백 귀비가 입궁을 명한 것은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황제 폐하가 비준한 사항이라는 점이었다. 황제까지 왕비의 입궁을 알고 있으니, 감히 왕비를 해하진 못할 것이었다.

그는 인부를 맞이하면서 서둘러 궁에 사람을 보내 가동과 영구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어린 왕비가 입궁을 하는 사실을 어떻게든 초왕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대 앞에 앉은 백천범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번 다시 백 귀비를 만나고 싶지 않던 그녀는 월향과 월규가 자신을 치장해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지 않을 방법은 없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피할 길은 없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가마에 올라탔고, 월향과 월규가 가마 곁을 지키며 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몸종은 궁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마만 궁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들과 떨어지자 더욱 불안해진 백천범은 두 시녀가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만 슬피 바라볼 뿐이었다.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외롭고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초왕이 늘 그녀를 지켜 주었으니 그의 등 뒤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그녀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잠시 동요하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다져 온 기본기가 탄탄했던 탓인지 누구보다 적응력이 빠르게 발휘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초왕비였다. 백 귀비가 그녀의 목숨을 해하려는 것만 아니면 다른 것들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백천범이 입궁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백 귀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제가 벌인 판 위에서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황궁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백천범을 태운 가마는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편안하게 기대 눈을 껌벅거리던 그녀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가마가 땅에 놓이자 초왕비를 맞이하기 위해 소태감이 발을 걷어 올렸다. 그때, 그녀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당황한 하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 시선만 교환할 뿐이었다. 이렇게 대담한 사람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궁은 살얼음 위를 걷듯 쩔쩔매거나 벌벌 떨 만큼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잠이 들다니!

잠시 기다린 끝에 한 소태감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왕비 마마, 일어나십시오. 궁에 도착하셨습니다.”

잠귀가 밝은 백천범은 소태감의 목소리에 바로 잠에서 깼고, 눈을 비비며 가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자신 앞에 놓인 높다란 궁전 입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판에는 ‘서복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색 바탕에 황금색으로 적힌 커다란 글씨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녀는 마치 처음으로 전쟁을 치르러 가는 사병이라도 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소태감은 그녀의 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늘 사뿐사뿐 거닐며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는 마마들의 걸음걸이만 봐 왔던 그는 초왕비처럼 용맹하게 걷는 여인은 처음 본 탓이었다.

누가 초왕의 왕비 아니랄까 봐 씩씩하고 늠름한 기세가 초왕과 꼭 닮아 있었다. 하인들은 종종걸음으로 겨우 그녀의 뒤를 따라잡았다.

초왕비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보고했지만, 안에서는 귀비 마마가 잠이 들었으니 잠시 기다리는 답변이 돌아왔다.

백천범은 아무 상관없었다. 백 귀비가 자신을 괴롭히려는 것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 아마 일종의 기선제압일 것이었다. 그녀는 옛일을 되새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만 뜨거운 날씨에 겹겹이 차려입은 탓에 온몸에 땀이 나서 불편했다.

그녀가 소태감에게 물었다.

“가마는요?”

소태감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답했다.

“초왕비께 아룁니다. 저쪽에 있습니다.”

소태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나무 그늘 아래였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가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마에 들어가기 전 그녀가 몸을 돌려 소태감에게 외쳤다.

“귀비 마마가 일어나면 다시 알려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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