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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8)화 (97/1,192)

제98화

그들은 매년 특수하게 제작된 상자에 담아 신선한 특산품을 운송했다. 상자는 바닥에 얼음을 깔고 두꺼운 요를 덮는 구조였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싱싱한 과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녹색의 포도송이들이 바구니 안에 놓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 정도 크기의 알맹이가 투명할 정도로 맑았고, 표면은 서리가 내린 듯 하얀 자태를 뽐냈다.

“이게 바로 마유 포도입니다.”

“그렇구나. 이게 다인 것이냐?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보내 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만 골라왔구나.”

묵용감이 포도 몇 송이를 바라보았다. 공들여 준비한 커다란 상자에 고작 몇 송이밖에 들어 있지 않다니.

만약 궁 안으로 가져가면 이곳저곳에서 들고 가 금방 사라질 게 분명했다. 양이 많지 않으니 그가 가져가면 후궁들이 서로 불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며 소란을 피울 일은 없었다.

사신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마유 포도는 가장 맛이 뛰어난 품종입니다. 궁에 가져간다 해도 나눠 드리기 애매한 양이니 왕야께서 댁에 가져가 왕비 마마와 드셔 보시지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 궁에는 마마들이 많으니 나누기 어려울 테지. 본왕은 왕비가 하나뿐이니 사양 않고 가져가겠소.”

그는 중간에서 포도를 가로채 가동에게 서둘러 저택에 가져가라 분부했다. 그 후, 그는 사절단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 그는 사신들과 몇 마디 더 주고받고, 집으로 향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와 중문을 지나자 벌레를 찾아 쪼아 대는 노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노랑이가 있다는 것은 백천범이 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할 생각이었다.

반월문을 돌아서는데 연못가에서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백천범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몸집이 잔뜩 처져 있는 게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유 포도가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것인가?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다가온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울적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더니 이내 맑은 빛을 되찾았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자 묵용감은 무더위에 얼음물이라도 마신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어린 계집이 그의 팔을 감싸 쥐더니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어서 가요, 어서요.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요.”

묵용감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딜 간다는 것이오? 못 기다린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이고?”

백천범은 그를 이끌고 방 안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식탁 앞에 앉고 나서야 마유 포도가 바구니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끗한 물에 한 번 씻은 듯 더욱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그가 물었다.

“어째서 아직까지 먹지 않은 것이오?”

“왕야가 오시면 함께 먹으려고 기다렸지요.”

백천범은 한 알을 떼어 그의 입에 넣어 주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맛있어요?”

달콤하면서도 살짝 신맛이 감돌았다. 묵용감에게 포도는 대부분 이런 맛이었기에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맛있소. 아주 달군.”

그도 포도 한 알을 그녀에게 먹여 주었다. 어린 계집은 서둘러 입을 벌렸다. 그리곤 그의 손가락까지 먹어 버릴 기세로 날름 받아먹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손가락에 닿자 묵용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어서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이 또다시 솟구쳤다.

백천범은 맛에 한껏 취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입을 우물거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묵용감은 목이 어찌나 바짝바짝 타는지 연기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그가 녹하를 불러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녹하가 차를 올리자마자 찻잔을 들어 올려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입 안을 녹이는 듯한 뜨거움에 찻물을 다시 입 밖으로 뿜어냈다.

깜짝 놀란 녹하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왕야!”

그는 입 안 가득 통증이 밀려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천범은 곧장 포도알 하나를 그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내 하나로는 부족해 보였는지 다시 또 한 알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왕야, 포도는 차가우니까 잠시 머금고 계시어요.”

그가 이렇게 당황한 적은 없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감정을 도통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듯싶었다. 백천범이 그의 앞으로 달려와 그의 턱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왕야, 제가 한 번 볼 테니 입 좀 벌려 보세요. 혀에 물집이 생겼으면 약을 발라야 하니까요.”

그는 꼭두각시라도 된 듯 그녀의 말에 따랐다. 재빨리 포도를 삼킨 뒤, 입을 벌려 그녀에게 혀를 보여 주었다. 어린 계집은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려 후후 바람을 불었다.

그는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시원하면서도 뜨거운 그녀의 입바람을 맞고 있었다.

녹하가 소리 없이 나가 버린 탓에 두 사람만 남은 방 안은 유독 고요했다. 묵용감은 미친 듯이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북을 치듯 요란한 심장 소리에 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백천범이 다시 바람을 불자 그의 혀끝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 바람에 혀끝이 동그랗게 모은 그녀의 입술을 살짝 스쳤다.

그 순간, 묵용감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갑작스레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힘껏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화로 감추려는 듯 그가 호통을 쳤다.

“내가 아이도 아니고 괜스레 바람은 왜 부는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꾸지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왕야, 말은 할 수 있으시네요!”

사실 방금 전 차에 데었을 때는 입 안이 다 마비될 정도로 감각이 없었는데, 혼이 빠질 듯한 그녀의 행동 덕분에 아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다 큰 아가씨가 사내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입을 오므렸다 폈다 바람을 불어 대다니! 대체 뭐 하자는 것인가?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해도 그는 부족함 하나 없는 멀쩡한 사내였다. 이건 분명 그녀에게 책임이 있었다.

“혼자 드시오. 나는 먹기 싫소.”

말을 마친 그가 급히 방을 나섰다.

백천범이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이 많은 걸 혼자서 다 먹을 수는 없으니 다 같이 나눠 먹을게요! 왕야께서 상으로 주신 것이니까요!”

그는 그녀의 재잘대는 소리에도 점점 더 빠르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힘겹게 중간에서 가로챈 포도를 하인들과 나눠 먹겠다니.

그는 기둥 뒤에 멀찍이 서서 포도를 나눠 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학평관은 감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그녀는 억지로 그의 입에 한 알을 넣어 주었다. 왕비에게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사실에 놀란 학평관은 황급히 먼 곳으로 몸을 피했다.

영구도 먹기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역시나 그녀가 그의 입에 억지로 포도알을 쑤셔 넣었고,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 포도를 삼켰다.

그녀는 결국 잡일을 하는 무수리와 청소를 하는 머슴들에게까지 포도를 나눠 주었다. 한데 모인 회림각의 모든 하인들은 재잘대며 포도 맛을 평가했다.

한 번도 시끌벅적했던 적 없는 그의 회림각이 참으로 소란스러웠다. 포도를 가져올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그녀가 기쁘면 그걸로 되었다.

* * *

대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연꽃 받침에 두루미가 조각된 구리 향로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황제는 명황明皇의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한쪽에 서 있던 태감 고승해가 가늘게 목청을 가다듬고 이번 토번에서 진상한 목록을 읽고했다.

기나긴 목록을 일일이 외울 수는 없으니 황제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황제가 눈을 떴다.

“다 이곳에 있는 것이냐?”

“예, 황제 폐하.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예년과 별다른 점은 없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포도는 없느냐?”

“있습니다.”

고승해가 목록을 살피며 말했다.

“자구紫口와 마노瑪瑙, 미인지美人指 품종이 올라왔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밖엔 없는 것이냐? 늘 마유도 진상되질 않았더냐? 입맛 없는 황후가 그 포도만큼은 좋아하거늘.”

고승해가 다시 자세히 목록을 살펴보았다.

“폐하, 목록에는 없지만 적을 때 누락한 것은 아닌지 소인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황제가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함께 보내졌다던 미인은 잠시 저수궁儲秀宮에 머물게 하거라. 조만간 짐이 상으로 내릴 것이다.”

고승해가 대담하게 물었다.

“폐하의 곁에 두지 않으실 것입니까? 이번에 토번에서 보낸 미녀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한다 하옵니다. 그윽한 눈매에 높은 콧대는 물론이고 몸매 또한 늘씬하다고 들었습니다.”

황제가 손을 저었다.

“황후가 저리 안 좋은데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 우선은 잠시 저수궁에 머물게 하라. 진상품은 잘 정리하여 이전의 관행대로 나누어 갖도록 하고. 짐은 피곤해서 조금 쉬어야겠다.”

고승해는 재빨리 대답한 후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진상품은 등급별로 구분한 뒤 후궁들에게 순차적으로 돌아갔다.

황후 다음으로 신분이 높았던 백 귀비는 진상품이 들어오자마자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다 곧장 미간을 찌푸리며 물건을 가져온 소태감小太監에게 물었다.

“이것이 다인가?”

소태감이 공손히 답했다.

“예. 귀비 마마의 것은 모두 가져왔습니다.”

백 귀비가 바구니를 뒤집으며 물었다.

“포도는?”

소태감이 답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자구와 미인지, 마노가 진상되었습니다.”

백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픈 황후를 살뜰히 챙기는 황제 때문에 좋은 물건은 분명 다 황후에게로 갔을 것이다.

작년에는 마유 포도도 조금씩 나눠 주더니 올해엔 그림자마저 볼 수 없었다. 토번에서 과일이 올라온다기에 상큼한 마유 포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구경도 못 하게 될 줄이야.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일수록 더 손에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궁에 들어와 보니 황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너무 많았다. 황제 또한 늘 그녀를 옹호했기 때문에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삭이고 표정을 감춘 뒤 소태감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 사실 그 돈은 소식을 얻는 데 쓰이는 돈이었다.

소식을 알아온 소태감 마육馬六이 조심스럽게 몇 마디 덧붙였다.

“마마, 소인이 염탐을 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진상된 포도는 원래 마유 포도까지 총 네 종류였지만 초왕이 도중에 마유 포도를 가로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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