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7)화 (96/1,192)

제97화

묵용감이 깜짝 놀라 물었다.

“황실 동물원에 있는 그 설조 말이냐?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초왕비를 모시고 동물원 구경을 하셨다면서요?”

“그래. 공작 한 마리를 저택에서 길러 보려 했는데 기르기가 까다롭더구나. 다시 돌려보내자고 하길래 간 김에 구경 좀 했지. 호랑이도 보고.”

묵용택이 술잔을 들어 그와 잔을 부딪힌 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게 문제였나 봅니다. 그날 형님과 왕비 마마가 다녀가셨을 때, 먹이를 잘못 먹어 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치료도 못 하고 죽어 버렸다지 뭡니까.”

묵용감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날 호랑이를 본 건 맞지만, 먹이는 관리인만 주었다. 우리는 전혀 손을 댄 게 없는데. 왜? 누가 쑥덕거리기라도 하는 것이냐?”

묵용택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은 늘 있는 법이니까요. 폐하께서 마음에 담아 두시는지를 알아야겠지요.”

“말이 어찌 와전된 것이냐? 내가 이상한 것을 먹여 설조를 죽였다?”

“형님이 아니라 초왕비랍니다.”

만약 자신을 두고 쑥덕거리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세간에 그의 악명은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천범까지 끌어들이다니,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식탁을 치며 소리쳤다.

“감히 누가 그딴 소릴 지껄인단 말이냐?”

깜짝 놀란 묵용택이 말했다.

“셋째 형님, 제게 화를 내실 게 아닙니다. 소문을 낸 사람은 분명 두 분을 가리키려 한 것이겠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조는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무려 황제 폐하께서 기르시는 호랑이었으니 사실상 일종의 어용御用인 셈이지요. 평소 설조가 재채기만 해도 노비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는데, 지금 그런 설조가 죽었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말은 황제 폐하께서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날 벌하실 거란 말이냐?”

“성군聖君이신 황제 폐하께서는 마음이 넓어 천하를 품는 분이시니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셋째 형님을 벌하진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누군가 매일같이 폐하의 귓가에 속삭인다면 폐하께서도 한두 마디 정도는 마음에 두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으니 문제 삼지 않으시겠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셋째 형님께서도 미리 대비는 하셔야 합니다.”

묵용택이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몇 해 전, 혼란스럽기만 했던 이 나라는 셋째 형님이 전쟁터를 누비신 덕에 지금처럼 평화로워진 것이지요. 폐하께서도 셋째 형님의 공로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셋째 형님을 언급할 때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만큼, 형님께서 이 나라를 위해 세우신 혁혁한 공로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위세가 너무 과한 것도 좋지는 않겠지요.

다시 말해서 저처럼 한량인 왕은 황실 동물원을 헐어 무너뜨린다 해도 폐하께서 그리 신경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셋째 형님은 다르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묵용감은 술잔에 담긴 술을 목 뒤로 넘긴 뒤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바보 천치는 아니다. 늘 군영에서만 지내다가 이제야 잠시 안락한 삶을 누린 것뿐이거늘. 조정을 위해 두 해 정도만 힘을 쓴 뒤 다시 폐하께 지방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을 드릴 생각이다. 고작 두 해 정도의 평안한 삶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 아니냐?”

“셋째 형님,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제가 형님과 자주 왕래를 하고 있으니 서로를 일깨우면 될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아우가 늘 형님께 곧장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안다.”

묵용감은 그와 술잔을 부딪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다 생각해 놓은 게 있지.”

수상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천범과 잠시 구경을 다녀왔을 뿐인데 설조가 죽다니. 세간에 퍼지는 소문은 분명 묵용택이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하게 부풀려졌을 것이다.

초왕비가 독을 탄 먹이를 주어 황제가 아끼는 호랑이를 독살했을 거라고. 또한, 그녀 배후에 있는 초왕이 도움을 주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도 대담한 짓을 벌일 수 있겠냐고 마구 떠들어 댈지도 몰랐다.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는 황제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였다. 태평성대가 찾아온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했다.

홀로 쓸쓸하게 지낼 때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땐 국경 관리직을 내려 달라고 청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천범이 곁에 있으니 늘 그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했다.

* * *

이튿날, 조회가 끝난 뒤 그는 궁에 남았다. 평소처럼 그를 대하던 황제는 그런 그를 골려 주었다.

“평소엔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안달인 듯하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이리 남아 있는 것이냐? 오늘 점심은 이 황제와 술 한 잔 기울이자꾸나.”

묵용감이 몸을 살짝 굽혀 답했다.

“저 또한 그리하고 싶었던 참인데, 폐하의 시간을 뺏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형제지간에 시간을 뺏을 게 무엇이 있겠느냐?”

황제가 그를 이끌고 안전으로 향했다.

“요즘 들어 밀린 정사를 돌보느라 너와 통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구나. 별일은 없었느냐?”

“별일 없었습니다. 천하의 평화를 수호함에 있어 사소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 하니 초왕비와의 관계가 날로 무르익는다 하더구나.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백천범의 얘기에 묵용감이 조금은 경계하며 말했다.

“역시 폐하께서는 참으로 따뜻하십니다. 저의 집안일에 관한 일까지 속속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요.”

“오해는 하지 말거라.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 너의 집안일까지 파악하려 하는 것은 아니니.”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날 네가 자신의 진공작을 가져갔다고 백 귀비가 짐을 찾아왔었다. 짐은 네가 초왕비에게 보여 주려 집에 가져갔다고 생각했지. 그 말인즉슨, 둘의 사이가 좋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측비를 들이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 초왕비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다 왕비가 좀 더 크거든 후사를 보거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부황께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니.”

묵용감이 그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종사를 돌보시느라 늘 바쁘신데 저의 보잘것없는 일까지 마음을 써 주시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허, 형제지간에 그 무슨 인사치레란 말이냐?”

황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짐을 위해 네가 세운 공이 얼마인데, 짐 또한 네게 관심을 가져야지.”

황실 동물원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폐하, 설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제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짐이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분부했는데도 네 귀에 들어갔구나. 그저 호랑이 한 마리가 죽은 것뿐이니 그리 놀랄 것 없다.”

묵용감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 그날 제가 왕비와 동물원에 간 것은 호랑이를 보러 간 것이 맞습니다. 당시 설조는 상태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간 뒤에 급격히 나빠졌다더군요.”

황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하거라. 이미 지나간 일이니.”

“폐하.”

묵용감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다음 이어질 말이었다.

“초왕비가 준 먹이를 먹은 뒤, 설조가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들었습니다. 그날 저도 계속 함께 있었지만 왕비는 설조에게 먹이를 준 일이 없었습니다. 설조가 먹었던 고기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떻게든 그날 일을 해명하려는 걸 보니 초왕비와의 사이가 정말 좋은가 보구나.”

“조정 안팎에 저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오명을 입는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도 저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초왕비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 계략도 꾸밀 수 없을 만큼 어린아이인데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네 성격은 짐도 물론 잘 알고 있지. 이 세상에 너보다 더 충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말은 짐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니 마음에 담아 둘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짐이 그런 사리 분별도 없이 어찌 천자天子의 자리에 앉았겠느냐?”

황제의 말에 그제야 마음이 놓인 묵용감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훗날 제가 왕비와 헤어지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 것입니까?”

깜짝 놀란 황제가 물었다.

“둘의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더냐? 어째서 헤어지겠다는 것이냐?”

묵용감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어린아이이니 저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돌보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요. 두 해 정도 지난 뒤에 왕비 마음에 드는 낭군에게 보내 줄 생각입니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짐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왕비를 아끼면서 왜 헤어지려는 것이냐?”

눈을 내리깔고 황금빛 벽돌에 비친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묵용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틀 뒤, 토번 사신들이 도착했다.

그들이 오는 길목에는 두세 리씩 거리를 두고 상황을 보고하는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묵용감은 수도 위수부대衛戍部隊의 수장으로서 직접 성 밖으로 향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머리에 자색 빛이 도는 금관을 쓰고 짙은 자색의 긴 도포를 입고 있었다. 도포의 아랫단에는 ‘복’ 자와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위풍당당한 그의 풍채에서 고귀한 분위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은 토번에서도 자자했다. 그런 그가 직접 마중을 나오자 사신들은 급히 그의 앞으로 와 몸 둘 바를 모르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묵용감은 인사치레로 그들에게 몇 마디 인사를 건넨 뒤, 긴 행렬을 바라보며 물었다.

“포도는 어디에 있소?”

사신들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초왕이 갑작스레 웬 포도를 묻는단 말인가?

하지만 초왕의 물음에 감히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가장 뒤쪽의 몇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왕야, 포도는 저쪽에 있습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마유 포도라는 것도 가져왔소?”

“그렇습니다.”

초왕의 관심이 지대하자 사신들은 공손히 그를 이끌고 뒤쪽 대열로 다가갔다.

“올해 마유 포도의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아 많이 가져오진 못하였습니다. 왕야께서 원하시면 아예 다 가져가시지요.”

말을 마친 그가 상자를 열라고 분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