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6)화 (95/1,192)

제96화

묵용감이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만 가 보거라.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아도 된다.”

수낭이 곧장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나리, 소인의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너 때문이 아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런 것이다.”

그가 손을 내젓자 자연스레 위엄 있는 모습을 자아냈다. 그에 수낭은 긴말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묵용택은 그런 묵용감이 이상하기만 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분명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알 수 없는 행동만 보였기 때문이다.

“셋째 형님, 기녀들이 주는 술을 드시러 온 것은 맞으십니까?”

묵용감은 직접 술을 따르고는 고개를 젖혀 목 뒤로 넘겼다.

“방금 그 애는 안 되겠다. 좀 더 능숙한 애는 없는 것이냐?”

묵용감이 운아를 그의 곁으로 밀며 말했다.

“형님께서 재잘댄다고 싫어하셨지만 운아가 재주 하나는 좋습니다.”

운아는 끈적한 눈빛으로 묵용감의 환심을 사려 했다.

“나리, 소인이 곁에서 모셔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다른 사내와 불같이 즐겨 놓고, 뒤돌아서서 바로 그의 술시중을 든다고 하니 조금은 혐오스러웠다. 묵용감은 손을 내저으며 묵용택에게 말했다.

“다른 아이로 데려오너라.”

묵용택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런 것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던 묵용감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었단 말인가? 게다가 데려온 기녀들에게 줄줄이 퇴짜를 놓으면서 또 새로운 애를 데려오라니.

결국 묵용택은 손을 흔들어 모든 기녀들을 물렸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셋째 형님, 무슨 일이신지 제게 말씀해 보시지요. 이 아우가 형님의 짐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으신 것인지요?”

그 이유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친형제라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혈기가 왕성한 나머지 몇 차례나 이불을 더럽힌 사실을 털어놓느니 홀로 끙끙 앓는 게 더 나았다.

십 대일 땐 두 차례 정도 그랬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 당시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 때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스물이 넘은 지금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그는 기홍과 녹하에게마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도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기녀들이 주는 술을 받으러 온 것일 뿐,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서 괜찮은 애로 데려오너라. 오늘은 나도 한번 방탕하게 놀아 봐야겠다.”

묵용택은 재미있다는 듯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오늘 이 아우가 아주 괜찮은 아이를 소개해 드리지요. 참으로 좋은 장소를 고르셨습니다. 이곳에서 시원하게 즐기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곧장 기녀를 고르러 떠났고, 묵용감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술을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이전에 있던 기녀들보다 더 출중한 외모였다. 이마에 화전花鈿을 그려 넣은 그녀는 운아처럼 부담스럽지도, 수낭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가 적절하면서도 우아했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묵용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뛰어난 외모보다 더 환하게 반짝였다. 가히 절세가인이라 부를 만한 미모였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초왕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손에 쥐어진 술잔을 가로챘다.

“나리, 조금만 드십시오. 술은 몸에 해롭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많이 더우실 텐데 겉옷은 벗어 두십시오. 지금이 바람을 쐬기 가장 좋은 때이니 소인과 저쪽에 앉아 잠시 바람을 쐬는 게 어떠신지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간이침대였다.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 * *

밖에 있던 묵용택이 가동에게 물었다.

“오늘 형님께서 무슨 충격이라도 받으신 것이냐?”

가동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라면 아마 너무 오랜 기간 수양을 쌓은 덕에 더 이상은 본능을 억누를 수 없어 이곳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묵용감은 본디 여색을 밝히는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보주아가 죽은 뒤 이쪽은 더더욱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결혼도 하려 하지 않자 묵용택은 가끔씩 셋째 형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무려 초왕야에게 의지할 여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초왕이 힘겹게 한 발짝 내디뎠으니 묵용택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각각 음과 양의 속성을 지닌 남녀가 만물의 이치를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셋째 형이 이 분야에 눈을 뜨기만 한다면 억눌린 감정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고 황보주아를 위한 지조 따위도 더 이상 지키지 않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달빛이 비치는 밤, 기분 좋은 바람에 호수를 가득 메운 연잎이 끊임없이 살랑거렸고, 연잎 사이로 커다란 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한 분홍색이 꼭 하당월색의 여인들처럼 요염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이 발을 두드려 사르륵 소리가 이어졌고, 맑은 풍경 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묵용택이 목을 빼 안쪽을 바라보며 혼자 되뇌었다.

“분명 성공하셨겠지.”

가동이 말했다.

“진왕야, 그리 보셔도 보이지 않으니 그만두시지요.”

묵용택이 말했다.

“뭘 모르는 소리. 이 향을 맡으려는 것이지. 보고 싶어도 보이질 않으니 네 몸이 근질근질한 것 아니더냐?”

가동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조금 그렇습니다.”

그가 영구에게 물었다.

“너는? 보고 싶지 않아?”

영구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묵용택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궁금할 법한데, 보고 싶지 않다?”

영구는 그의 말을 외면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택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내기라도 걸까? 너희 왕야가 언제쯤 나올지 걸어 보는 게 어떠냐?”

영구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 않겠습니다.”

가동은 내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묵용감이 한바탕 꾸지람을 할까 봐 걱정이었다. 가동은 영구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질까 봐 무서운 거야?”

“무서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영구가 말했다.

“왕야께서 언제 나오실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묵용택이 놀라 물었다.

“그걸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그가 고른 여인은 요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 간 절세가인이었다. 게다가 능수능란한 솜씨까지 갖춘 탁월한 여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오지 않는 이 상황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허면 내가 너와 내기를 해야겠구나.”

묵용택은 몸을 뒤적거려 금자 한 덩이를 꺼내더니 가동에게 건넸다.

“네가 심판을 보거라.”

가동이 목을 빼고 열심히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사방에 걸린 발 위에 불빛만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째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질 않는담?”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기방 여인들은 여러 가지 방면에 두루 능했는데, 신음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리의 높낮이와 장단까지 고려한 탓에 듣기만 해도 금세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묵용택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엿듣는 것은 못된 짓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공공연하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미낭媚娘의 목소리는 기녀들을 통틀어 가히 최고라 일컬을 정도인데 어째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두 사람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누군가 발을 걷고 밖으로 나와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늘거리는 자태가 한눈에 봐도 여인이었다.

묵용택은 황급히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옷매무새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고 머리 모양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영구의 추측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끝났구나.”

미낭이의 안색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몇 차례 볼멘소리를 내고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묵용택이 막아섰다.

“대체 일을 치른 것이냐, 못 치른 것이냐?”

미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깊은 좌절감이 느껴졌다. 기녀가 된 후로 그녀에게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오늘 그 첫 번째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건장한 풍채로 봐서는 다른 취향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돌부처가 아닐 수 없었다.

가동이 금자를 영구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가 이겼어.”

영구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려 금자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가동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영구에게 물었다.

“영구야, 너는 왕야께서 저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않으실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영구가 말했다.

“왕야께서는 저 여인을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그런 일을 할 때 꼭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 초왕야께서는 진왕야와는 다르시니까요. 좋아하지 않는 여인과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가동은 영구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자신의 일이라고 바꿔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녹하에게 미안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녹하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여인과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묵용택이 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은 홀로 식탁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묵용택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묵용택이 그에게 물었다.

“셋째 형님, 어째서 일을 그르치신 것입니까? 이번에도 맘에 안 드십니까?”

묵용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가 원하던 여인은 아니었다. 평소 그렇게 억누르려 해도 억눌러지지 않던 감정을 이곳에서 분출하려 했건만. 하지만 그가 마음먹은 대로 분출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한바탕 소란을 겪으니 묵용택도 흥이 사그라졌다. 두 형제는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묵용택은 갑작스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묵용감에게 말을 걸었다.

“셋째 형님, 설조가 죽었다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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