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5)화 (94/1,192)

제95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주인은 묵용감 또한 황족일 거라는 생각에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왕야께서는 연당蓮堂에서 술을 드시고 계십니다. 소인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더니 급히 앞으로 나서 길을 안내했다. 묵용감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큰 보폭으로 앞으로 향했고 영구와 가동도 그의 뒤를 따랐다.

연당은 호수 위에 지어진 커다란 정자로, 이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였다. 사방에 걸린 발에는 얇은 비단 장식이 더해져 있었고, 그 위에 풍경을 달아 바람이 불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쪽에는 병풍과 연회석이 놓여 있었고 한편에 간이침대까지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은밀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풍을 펼쳤고, 대범한 사람들은 병풍을 아예 치워 버렸다.

그렇게 되면 주위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발뿐이었다. 하지만 구슬 발이나 대나무 발이 늘 그렇듯 형체까지 온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연당 주위를 둘러싼 많은 등불이 호수 가득 핀 연꽃을 비추고 있었다. 연당 밖에서 안을 훔쳐보려 해도 어렴풋한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상상력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고, 더욱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다.

안이 잘 보이지 않으니 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고, 이따금씩 밖으로 새어 나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더운 공기가 더욱 뜨겁게 달궈져 밖에 있는 사람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찾아온 묵용감의 모습에 진왕이 크게 놀랐다. 평소 이런 곳을 꺼려하던 초왕은 지금껏 한 번도 기방에 발걸음 하지 않았건만. 어찌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좋지 않은 느낌에 진왕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것입니까?”

묵용감은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 앉으라는 뜻을 내비쳤다.

기방을 즐겨 찾던 묵용택은 양쪽에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어린 기녀가 고쟁을 타며 시가를 읊고 있어 꽤 어수선했다.

두 기녀는 묵용택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한 명은 운아雲兒, 다른 한 명은 연아姸兒였다. 붙임성이 좋은 운아는 진왕의 지인이 오자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묵용감에게 재빨리 애교 섞인 눈짓을 보내더니 아리따운 목소리로 반겼다.

“오셨습니까, 나리.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소인이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오자 향료 위를 뒹굴다 오기라도 한 듯 짙은 향내가 코를 찔렀다.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묵용감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운아는 전혀 거리낌 없이 섬섬옥수로 그에게 팔짱을 끼고는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

“나리, 어찌 피하시는 것입니까? 소인이 잡아먹는 것도 아닌걸요.”

묵용감은 여인이 이렇게 치근덕대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팔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착 달라붙은 그녀는 아예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키득거렸다.

“나리, 처음 오시는 거죠? 낯설어하시는 게 너무 티 납니다.”

묵용택은 난처해하는 묵용감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셋째 형님, 이왕 오신 거 여인들 체면을 봐서라도 이곳의 법을 따르시지요.”

묵용감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것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손 쓸 틈도 없이 치근덕대니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주 친절한 아가씨구나.”

운아의 팔을 빼낸 묵용감이 자리에 앉았고, 그런 그에게 운아가 술을 따라 주었다.

“나리께서는 제가 이러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설마 도도한 여인을 좋아하시는지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말이 많구나.”

묵용감의 표정이 좋지 않자 묵용택이 다시 운아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셋째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저 너와 술이라도 한잔하러 왔지.”

묵용감이 작은 술잔을 집어 들었다. 빛깔도 투명하고 향이 짙은 게 꽤 좋은 술을 파는 듯했다. 그가 한입에 술을 비웠다.

“괜찮은 술이구나.”

“그럼요. 여인들은 더 괜찮습니다.”

묵용감과 이런 곳에서 함께 술을 마실 기회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묵용택은 그를 제대로 대접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운아를 달갑잖아 하자 묵용택은 기방 주인을 불렀다.

“조용한 애로 데려오너라. 우리 형님이 재잘대는 여인에게는 영 관심이 없으셔서 말이지.”

기방 주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곧장 사람을 부르러 향했다.

가동과 영구는 조용히 문밖에 서 있었다. 밖이 어두웠던 탓에 나무 기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린 기녀는 아직도 고쟁을 타며 창을 읊고 있었다. 열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편안한 곡조를 뽑아내면서 평이한 창을 읊었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제법 정취가 느껴졌다.

묵용택이 오로지 여인들을 만나러 기방에 오는 줄로만 알았던 묵용감은 고상한 멋도 즐기는 그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방 주인이 날씬한 몸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아가씨를 데려왔다. 아주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참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기방 주인은 그녀를 수낭秀娘이라고 소개했다. 조금은 낯을 가리는 편이니 우선은 술시중을 들다가 맘에 안 들면 다른 여인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묵용택이 그녀에게 묵용감 곁으로 가서 앉으라고 말했다. 수낭은 아직 입도 열지 않았는데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주인의 말처럼 낯을 꽤 가리는 성격인 듯했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만큼은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넓은 소매 사이로 어여쁜 손을 뻗어 묵용감의 잔을 채워 주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리, 안주로 포도 좀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묵용감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묵용택 양옆의 여인들은 그를 마구 껴안으며 입으로 포도를 먹여 주었다. 그런 모습이 익숙했는지 수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묵용감은 조금 당황했다. 묵용택이 이렇게 제멋대로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앞에서는 단정할지라도 뒤에서는 방자하게 구는 모습이 평범한 도령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무심결에 사장풍을 떠올렸다. 그 또한 이런 사람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아 보여도 기방에 발을 들이면 묵용택보다 더 방자하게 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늑대로 보일 만큼 대부분의 사내들이 그러했다.

묵용감은 점점 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어찌 백천범을 그런 자들에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깊은 근심에 빠진 묵용감의 입 앞에 수낭이 포도 한 알을 가져다 댔다.

“남쪽에서 막 올라온 싱싱한 포도입니다. 드셔 보십시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온 손님이 입을 열지 않자 가만히 들고 기다린 것이다. 여러 번 온 뒤에는 그 또한 익숙해질 일이었다.

묵용감이 결국 포도를 받아먹고는 몇 차례 씹어 삼켰다. 도통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입 주변에 포도즙을 잔뜩 묻힌 묵용택이 그에게 물었다.

“셋째 형님, 괜찮지 않습니까? 기방이라는 생각만 하시지 말고 즐겨 보십시오. 다 얼마나 좋습니까?”

묵용감은 포도를 보자 문득 무슨 일이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올해 토번에서 진상품이 올라오는 시기가 예년보다 조금 늦어진 것이 아니냐?”

묵용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으로 시기를 계산해 보는 눈치였다.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며칠 안으로 오겠지요. 형님께서 웬일로 이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까?”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포도를 먹고 있질 않느냐, 토번 포도가 유명하다던데 한번 먹어 보려 했지.”

묵용택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셋째 형님께서 언제부터 그리 과일을 좋아하셨답니까? 이 아우는 몰랐습니다.”

묵용택이 콧방귀를 뀌었다.

“바깥일엔 관심도 두지 않고 매일같이 이런 곳에서 머무는데 네가 뭘 알겠느냐?”

그의 꾸지람에도 묵용택은 크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저는 별로 중요치 않은 왕이질 않습니까?”

술을 한 잔 들이켠 묵용감은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수낭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그에게서 꼭 접근을 불허한다는 분위기가 풍겨졌기 때문에 수낭은 감히 가까이 붙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가까이 오라고 하니 그의 말에 따라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에게서는 운아와 달리 짙은 향내 대신 희미한 난초 향이 감돌았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수낭이 천천히 그의 품에 안겼다.

묵용택은 그런 그의 모습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셋째 형이 여인에게 눈을 뜨기 시작했단 말인가? 이미 그가 기방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란 그였다. 그런데 이젠 기녀를 다루기까지 하다니.

한창 혈기가 왕성한 사내들이었으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경험이 부족했던 만큼 셋째 형의 동작이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범을 보였다. 운아를 껴안은 그가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운아는 애교 있게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고, 그가 자신을 품기만 기다리는 듯 가만히 묵용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범을 보이기로 한 묵용택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곁눈질로 슬쩍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수낭을 품에 안은 채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묵용택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내들에게 이쪽 분야는 일종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셋째 형은 너무 경험이 없는 탓에 그 본능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는 자신의 시범이 형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 올려 운아의 얇디얇은 치맛단을 재빨리 내리자 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속살이 드러났다.

그가 손을 뻗어 운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또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묵용감을 슬쩍 바라보았다. 기방에서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넌지시 알려 준 것이었다.

묵용감은 묵용택의 행동에 반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은 참하고 온순했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진 못했다.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곳까지 와서 아리따운 여인을 품에 안았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했다.

그가 수낭의 얼굴을 한 차례 꼬집었다. 윤기 나고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지만 기분은 영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