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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4)화 (93/1,192)

제94화

그때 검을 다시 넣어 두던 가동은 녹하가 자신 쪽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녹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로 걸어갔다.

가동이 급히 뒤쫓으며 말했다.

“녹하야, 왜 그렇게 날 피하는데?”

그날 가동이 얼떨결에 고백한 이후 녹하는 두꺼비라도 보는 듯 가동을 대했다. 가동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이야기를 나눌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주인이 자리를 떴으니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가동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녀를 뒤따랐다.

녹하의 키도 컸지만 가동도 만만치 않았기에 빠른 보폭으로 금방 녹하를 따라잡았다. 가동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왜 피하는 건데?”

“네 그 소름 끼치는 말 듣기 싫어서지.”

“좋아한다는 말이 왜 소름 끼쳐?”

가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미 내뱉은 고백이니 무슨 답변이라도 들어야 했다.

“당연히 소름 끼치지. 그날 돋은 닭살이 아직도 안 가라앉았을 정도니까.”

그를 흘겨보던 녹하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에 멈춰 섰다.

“아이고, 날마다 차고 다니는 것 좀 봐. 왕비 마마께서 헛수고하시진 않으셨네.”

녹하가 주머니를 언급하자 가동도 고충이 있는 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원해서 지니고 다니는 줄 아는구나. 왕비 마마께서 꼭 하고 다니라고 지시하신 거야. 하루라도 안 걸면 마음에 안 드냐고 늘 물어보신다니까. 솜씨가 그저 그런 걸 알면서도 왕비 마마께 말하기 난처하니까 가지고 다니는 거지. 아니면 네가 하나 만들어 주든가.”

녹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나 힘들게 수를 놓으신 건데. 왕비 마마의 손가락에 잔뜩 피가 맺힌 것도 못 봤니? 양심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왕비 마마의 마음은 나도 충분히 느꼈지. 그날 우두산으로 친구를 보내 왕비를 구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으니까. 왕비 마마의 마음은 알지만, 이렇게 실이 다 뭉친 걸 하고 다니니까 영구도 몇 번이나 비웃더라.

녹하야, 힘들겠지만 네가 하나만 만들어 주면 안 될까? 나도 나름 사내대장부인데 이걸 계속 차고 다니자니 조금 부끄러워서 말이야.”

“네가 부끄러움도 아니?”

녹하가 입을 삐죽거렸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마음을 다 바치시려는 왕비 마마를 저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이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동이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일 때문에 왕야께 벌써 몇 차례나 혼이 났다고. 왕비 마마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나도 왕야처럼 왕비 마마가 그저 여동생 같을 뿐이지.

녹하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왕비 마마가 이곳에 오시기 전부터 널 좋아했어.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야.”

조금 조급했던 가동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녹하의 따끔한 손맛만 맛봐야 했다.

“말로 하면 되지 손은 왜 내밀어?”

녹하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닭살이 조금 수그러지나 했더니 다시 돋은 것 좀 봐. 어서 네 갈 길 가. 앞으로 이 얘긴 절대로 다시 꺼내지 말고. 정말 못 들어 주겠네.”

말을 마친 녹하는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가동은 포기하지 않고 녹하의 뒤를 쫓았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확실하게 대답 좀 해 줘.”

녹하가 잰걸음으로 급히 걸어가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경고하는데 따라오지 마. 안 그럼 혼쭐을 내 줄 테니까.”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그녀였기 때문에 가동은 그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 * *

묵용감과 백천범은 연못가를 거닐었다. 한껏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자 잎사귀 하나가 백천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묵용감은 잎사귀를 떼어 주려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 전처럼 그가 자신을 꼬집을 거라 착각한 그녀는 곧장 반격 자세를 취해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피했고, 주먹을 뻗어 묵용감의 팔을 매섭게 강타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묵용감 역시 제법 통증을 느꼈지만, 그건 백천범도 마찬가지였다. 반동으로 주먹에 느껴진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감싸고 앓는 소리를 냈다.

묵용감은 성이 나기도 하면서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날 때려 놓고 오히려 왕비가 아파하는 것이오?”

백천범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먼저 몰래 공격하려고 하셨잖아요.”

“내가 무엇 하러 왕비를 공격한단 말이오?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이다니. 머리에 붙은 잎사귀를 떼어 주려고 했소.”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백천범은 그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 보니 역시나 잎사귀 하나가 만져졌다. 그녀는 떼어 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빨개진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왕야께서도 절 한 대 때리세요.”

그녀의 사과는 늘 이렇게 단순한 식이었다. 상대방에게 똑같이 돌려받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묵용감은 콧방귀를 뀌더니 자신의 주먹을 그녀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힘 조절을 제대로 못 하면 왕비가 죽을 수도 있소.”

백천범이 그의 주먹을 감싸 쥐며 감탄했다.

“왕야, 주먹이 엄청 커요. 이 정도면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입에 발린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녀의 속셈을 묵용감도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작은 얼굴을 위로 치켜들었다. 영웅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버드나무 사이에 서 있으니 꼭 병풍을 세워 놓은 듯 무성한 나뭇가지가 그들을 둘러쌌다. 갑작스레 얼굴이 붉어진 그가 서둘러 그녀의 손을 떼어 냈고, 몇 차례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어제 왕비가 좋은 낭군에게 시집을 가게 해 달라고 빌지 않았소. 어떤 사람을 원하는 것이오?”

백천범이 여전히 작은 얼굴을 그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왕야께서 저 대신 골라 주시려고요?”

“그렇소. 좋은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야 본왕도 마음이 놓일 듯하오.”

그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잘 때 코를 고는 사람은 안 되오.”

백천범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요? 사내들은 코를 많이 골잖아요.”

“나는 골지 않소.”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잠도 깊게 들지 못하면서 옆에 누운 사람이 코를 골면 잘 수나 있겠소?”

백천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그렇네요. 옆에서 코를 골면 잘 못 잘 것 같아요.”

“외모와 성격이 훌륭한 데다 번듯한 관직 덕에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충분한 녹봉까지 받으니 단점이 없어 보일 수도 있소. 하지만 잘 때 그렇게 코를 곤다고 하니 그자는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좋겠소.”

백천범은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야,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누구긴 누구, 사장풍이지. 이름도 별로였다. 장풍長風이라니, 자칫하다 이 자그마한 아이를 날려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소.”

그녀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묵용감도 굳이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왕비는 마음에 들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겠소. 급한 것도 아니니.”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 말씀대로 할게요.”

고분고분한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계속 마음이 두근거렸다.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최대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나는 저녁에 일이 있어 나가 봐야 하니 왕비는 이곳에서든 남월각에서든 알아서 잘 챙겨 드시오.”

말을 마친 그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고, 백천범은 그런 그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산책을 하자고 해 놓고 이렇게 훌쩍 떠나 버리다니. 왕야께서 또 변덕을 부리시는 걸까?

* * *

옷을 갈아입은 묵용감은 가동과 영구를 데리고 진왕의 저택을 찾아갔다. 하지만 묵용택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저택의 총 관리인이 웃으며 묵용감을 맞이했다.

“진왕야께서는 하당월색荷塘月色에 술을 드시러 가셨습니다. 아마 그곳으로 가시면 바로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왕을 꼭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지만, 묵용감은 진왕이 기방 하당월색에 있다는 말에 마음이 동요되었다. 요즘 들어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던 그는 여인을 찾아 몸 안에 쌓인 열을 분출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여인들을 불결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학평관도 여인을 찾아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는데 그라고 못 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말에 올라 곧장 하당월색으로 향했다.

하당월색, 참으로 고상한 이름이었다. 건물 뒤에 자리한 큰 호수에 붉은 연꽃이 가득 핀 시기였기 때문에 매일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들로 넘쳐났다. 하나같이 여인을 끼고 일렁이는 호수의 연꽃을 감상하며 흥을 즐기고 있었다.

묵용감이 도착했을 땐 마침 등불을 붙이고 있었다. 홍등이 높게 걸리자 야릇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묵용감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기방 출입이 잦지 않은 그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을 분칠하고 입술에 연지까지 번지르르하게 바른 늙은 기방 주인이 온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웃으며 다가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살갑게 그를 맞이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한동안 찾아 주지 않으셔서 취아翠兒가 나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취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참 뻔한 눈속임이었다. 그녀의 말이 성가셨던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차피 그의 말을 대신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럴 땐 가동이 앞장섰다. 그가 냉담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말거라.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뿐이시다.”

이곳에 사람을 찾으러 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방 주인이 웃으며 허리를 살랑거렸다.

“나리께서는 누구를 찾아오신 것인지요? 저희 집은 예쁜 아이들이 많지요.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금방 찾아 드리겠습니다.”

가동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왕야께서는 어디 계시냐?”

진왕야라는 말에 늙은 기생이 깜짝 놀란 눈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건네는 데 정신이 팔려 유심히 보지 못한 탓이었다.

다시 차림새를 훑어보니 평범한 대감의 모습이 아니었다. 점잖으면서도 귀티가 넘쳤고, 비범한 기세가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눈썹 언저리가 진왕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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