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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3)화 (92/1,192)

제93화

그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린 채 입구를 나서 포도 시렁에 다다랐다.

“내가 직접 만든 것이오. 맘에 드오?”

그가 손을 내리자 분홍색 그네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줄 위에는 꽃가지와 잎이 둘려 있었고, 손잡이 위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 방울 소리가 울리면 그녀가 그네를 탄다는 의미였다.

그네 판에는 사슴 가죽을 덧대 부드러우면서도 튼튼했다. 흑단목으로 만든 널빤지가 그네 판의 양옆과 뒷면을 감싸고 있었다.

양쪽 테두리에는 예쁜 깃털 장식이 날개 모양으로 둘려 있었고 뒷면에는 푹신한 솜이 덧대어져 있어 아주 편안했다.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맘에 들고말고요! 너무 좋습니다, 왕야.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아요!”

백천범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빠르게 뛰어 그네 위에 앉았다.

“왕야, 저 좀 밀어 주셔요.”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은 그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그가 그녀 뒤로 다가가 천천히 그네를 밀었다.

“떨어지면 안 되니 꽉 잡으시오.”

“왕야께서 계시니까 걱정 없어요. 떨어지면 왕야께서 절 받아 주실 거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소.”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가 대자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

그녀가 그의 마음을 꿰뚫듯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 절 아껴 주시는데 떨어져서 다치게 하실 일은 더더욱 없죠.”

묵용감이 가볍게 웃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그럴 일은 없었다. 만약 떨어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녀를 받아 낼 그였다. 받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의 몸 위로 떨어지게 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다치는 모습을 보진 않을 것이다. 정말 뼛속까지 아끼는 여동생이 아닐 수 없었다.

백천범은 잠시 후 그네에서 내려와 자신의 옷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왕야, 옷이 너무 불편해서 빨리 벗고 싶어요. 이제 시간도 다 지났죠?”

아직 의식을 치르는 시간을 채우지 못했지만 이마에 맺힌 반짝이는 땀방울이 그녀의 괴로움을 잘 보여 주었다. 묵용감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다. 윤기 나는 그녀의 이마는 꼭 백옥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웠다.

“불편하면 그만 갈아입으시오. 시간도 거의 다 되었으니.”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면 조금 더 참겠습니다. 그러다 제 소원을 안 들어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묵용감이 웃으며 물었다.

“보통은 열다섯에 좋은 낭군을 만나 혼인을 하게 해 달라고 빈다던데, 왕비는 무엇을 빌었소?”

“저도 그렇게 빌었습니다. 그건 규칙 같은 것인데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될 일이니까요.”

묵용감이 그녀를 놀렸다.

“이미 혼사를 치렀는데도 낭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단 말이오? 나로는 부족한 것이오?”

“웃지 마십시오, 왕야.”

백천범이 정색하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저를 여동생으로 여긴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할 텐데, 낭군이 없으면 어찌합니까?”

순간 묵용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자주 고민했던 문제였지만, 백천범 또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진지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시집을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아 보였다…….

“열다섯이 되어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왕비는 너무 작소. 좀 더 자라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 것이오.”

그녀의 가슴을 곁눈질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너무 작소.”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재빨리 눈치챈 백천범은 부끄러움에 성을 내며 그를 밀어냈다.

“작은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없을 것이오. 사내라면 누구든 큰 여인을 좋아하오.”

“왕야께서도 큰 여인을 좋아하십니까?”

“물론이오. 클수록 좋소.”

묵용감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대고 몇 차례 무엇인가를 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백천범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왕야께서 큰 여인을 찾길 저도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녀도 손짓으로 수박처럼 커다란 모양을 그려 보이고는 까르르 웃으며 자리를 떴다.

묵용감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다 어린 계집아이와 이런 얘기까지 나누게 되었단 말인가? 눈을 감자 그날 목욕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확실히 작긴 작았지만… 그래도 꽤 귀여웠는데.

* * *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밖으로 나온 묵용감은 가동과 백천범이 정원에서 검술을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제 열다섯 생일을 보냈지만,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몸집이 작은 계집아이였고, 쪽머리도 삐뚤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들이 어찌 보필하기에 머리 하나 똑바로 빗질 못한단 말인가?

그가 뒷짐을 지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막 동작을 마친 백천범은 묵용감을 발견하고 손에 장검을 든 채 신이 나서 달려왔다.

“왕야, 제 검무 좀 봐 주세요.”

묵용감이 말했다.

“그만하시오. 아직 팔이 검보다도 짧질 않소.”

백천범이 헤헤 웃어 보이더니 손을 돌려 검을 휘둘러 보였다. 이런 잔재주는 묵용감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칼끝을 잡았다. 그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내게 기습 공격을 하려거든 스무 해는 더 연습하고 와야 할 것이오.”

백천범이 허풍을 떨며 그를 칭찬했다.

“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왕야.”

옆에 있던 가동도 아부를 떨었다.

“맞습니다. 왕야께서는 동월국의 제일가는 무술 고수이시지요. 제 몸이 열 개라 해도 왕야께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놀란 백천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부님이 열 명이면, 저 같은 애 스무 명은 왕야께서 다 무찌르시겠네요?”

가동이 비웃으며 말했다.

“스무 명이요? 왕비 마마, 왕야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쉰 명은 될 것입니다. 아니, 백 명이라 한들 왕야를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심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 고수의 도도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백천범의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그녀는 가볍게 그의 팔을 만지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와, 이 팔뚝 좀 보세요. 엄청 단단해요.”

여름이라 얇은 옷을 입은 데다가 보드라운 작은 손으로 팔을 만지작거리니 묵용감은 금세 닭살이 돋았다. 알 수 없는 기분 탓인지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거렸다.

“근데 왕야가 이렇게나 대단하면 사부님과 영구 무사님은 무얼 하는 거예요? 왕야를 보호하는 호위무사잖아요?”

가동이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왕야의 이 귀한 옥체로 아무하고나 겨룰 수는 없으니 졸개들은 저와 영구가 처리하는 것이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얼른 더 많이 배워서 저도 왕야를 보호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이 듣기 좋았던 묵용감은 그동안 백천범을 아껴 준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녀 손에 있는 검을 뺏어 들더니 햇빛에 비춰 보며 말했다.

“이 검은 너무 길어 왕비가 쓰기에 적당하지 않소. 다음에 왕비에게 맞는 걸로 구해 주겠소.”

“와, 그럼 너무 좋죠. 사실 너무 무거워서 손목이 아팠거든요.”

“그건 왕비의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아 힘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 많이 좀 먹으시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많이 먹는걸요.”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녹하 언니 말이 계속 이렇게 많이 먹으면 머지않아 뚱뚱이가 될 거래요.”

묵용감이 웃으며 되물었다.

“뚱뚱하면 좋지 않소? 살이 찌면 기운이 넘치잖소.”

새하얀 그녀가 포동포동해질 모습을 상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볼을 꼬집으면 꼭 밀가루 반죽같이 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뚱뚱해지면 빨리 뛸 수 없잖아요.”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권법과 발차기 실력은 아직 별로지만,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건 문제 없거든요. 누구보다 빠르게 뛸 자신 있어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의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빠르게 도망치는 것도 자랑거리라니……. 어려서부터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치던 게 습관이 된 탓이었다.

“앞으로는 그리 목숨을 걸고 도망칠 필요 없소. 내 곁에 있는 한 왕비를 능멸할 사람은 없을 테니.”

“예. 왕야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의 소맷자락을 당기며 작은 얼굴을 들어 웃어 보였다.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꺼풀이 내려와 속눈썹이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백자같이 하얀 얼굴에 두 뺨만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마냥 해맑게 웃는 모습이 꼭 주인만 바라보는 발바리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 있단 말인가?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손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결국 묵용감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고 말았다.

그녀가 곧장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는 홀린 듯이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도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꼬집었다.

“왕야께서 절 자꾸 꼬집으시니 저도 왕야를 꼬집어야겠어요.”

가동은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었다. 어린 왕비가 점점 더 대담해지더니 이젠 감히 왕야의 얼굴을 꼬집기까지 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묵용감은 호통을 치려 눈을 부릅떴지만, 화는 나지 않았기에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그만하시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의미와 귀여워하는 감정이 뒤섞인 듯한 말투였다.

백천범은 히히 웃으며 검을 가동에게 돌려주고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묵용감은 조금 무기력해졌다. 나중에 그녀가 시집을 가면 자신의 낭군의 볼도 이렇게 꼬집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낭군은 어느 정도 상상이 되긴 했다. 바로 사장풍이었다. 그의 모습을 대입해 상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사장풍은 왕비가 준 주머니를 버릴 만큼 그녀를 싫어하니 낭군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솔직히 얘기하기로 결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다. 어쨌든 아직 어리니 신랑감은 천천히 골라도 되었다. 사장풍이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있을 것이었다.

“함께 저곳까지 좀 걸읍시다.”

그가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땀도 좀 식힐 겸 말이오.”

“좋아요.”

백천범이 흔쾌히 응했다. 월향이 올린 차를 마신 그녀는 입술을 닦고 묵용감과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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