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옆에서 듣고 있던 황후는 이 건에 초왕을 끌어들이려 하는 정추기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면 좀 더 지켜보면 될 일이지 어찌 초왕과 초왕비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냐?”
“소인은…….”
정추기의 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초왕비께서 음식을 가지고 계신 걸 보았습니다. 호랑이에게 먹이를 줄 때, 왕비 마마께서도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소인 생각에는 왕비 마마께서 그 음식을 던지신 것 같습니다.”
황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같습니다’라니! 그리 했다면 그리 한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어찌 그리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황제가 황후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황후, 노여움 푸시오. 정 내관의 말을 더 들어 봅시다.”
정추기가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모든 걸 수포로 만들 수는 없으니 할 말은 해야 했다.
“폐하, 소인 초왕비께서 음식을 던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던졌느냐?”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자그마한 덩어리였습니다. 하필 설조 쪽으로 던지시는 바람에 설조가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왕비가 준 음식에 설조가 탈이 났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래. 초왕비는 아직 어리니 때때로 장난기가 심하겠지. 깊게 고민하지 않고 준 것일 테니 별일 없을 것이다. 다시 가서 상태를 지켜본 뒤 약을 먹이거라. 적당한 약이 없으면 황궁에 있는 약을 가져가도 좋다. 짐이 며칠 뒤에 가 볼 테니 잘 보살피고 있거라.”
“예, 잘 알겠사옵니다.”
정추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의 임무는 끝난 것이었다. 초왕비가 상한 음식을 주었다고 해도 별로 책망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백 귀비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황후가 말했다.
“초왕비가 아직 어리긴 해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니 함부로 음식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돌아가서 다시 잘 살펴보아라. 괜히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추기는 황후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 후, 이제 막 물러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른 환관이 들어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했다.
“황제 폐하, 동물원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설조가 일각 전쯤 죽었다 하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정추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황제는 어느 때보다 진노했다.
“뭐라, 설조가 죽었다 하였느냐? 누가 전갈을 보낸 것이냐? 어디 있느냐? 당장 들라 하라!”
환관이 전갈을 보낸 사람을 불러왔다. 황실 동물원의 부 관리인인 내관 마예馬銳였다. 마예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느 양심 없는 자가 음식에 독을 타서 설조가, 설조가 죽었습니다!”
황후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탈이 난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어찌 이리 바로 죽을 수 있단 말이냐?”
“예, 오후에 묽은 변을 보길래 약을 먹였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니 증상이 점점 더 심해졌고, 설조가 갑자기 눈을 뒤집고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급히 수의를 불렀지만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하도 기이해 소인이 수의에게 사인을 검사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수의 말이 설조의 몸에서 맹독이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소인도 너무 놀란 나머지 이렇게 황급히 폐하께 사실을 고하러 왔습니다.”
격분한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누가 짐의 동물을 독살했단 말이냐? 당장 형부刑部의 상서尙書와 대리사경을 궁으로 들라 하라!”
황후가 급히 그를 말렸다.
“폐하,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신첩도 폐하께서 괴로우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새끼 때부터 기르신 호랑이니 자식 같은 존재였겠지요. 하지만 초왕과 왕비에게까지 죄를 물으면 일이 너무 커집니다. 부디 다시 고려해 주시옵소서.”
황후의 말에 황제는 분노를 천천히 가라앉힌 후 냉정을 되찾았다.
“초왕과 초왕비를 궁에 들라 하라.”
“다들 물러나거라. 본궁이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황후는 하인들을 물린 뒤, 수심 가득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초왕과 초왕비를 궁에 들라 하신 것인지요. 초왕비가 음식을 주었다 하더라도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어린아이라 장난스럽게 한 짓이었을 것입니다.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왕비를 죽이시려는 것입니까?
초왕비가 초왕의 정비라는 사실,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만약 초왕비가 한 짓이 아니라고 판명 나면 그들을 불러 죄를 묻는 게 얼마나 난감한 일이겠습니까?”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꼿꼿이 앉아 있던 황제는 한쪽에 놓인 구리 향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후는 어찌하는 게 좋겠소?”
“신첩 생각에 이번 일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왕은 폐하의 형제이자 신하입니다. 그동안 초왕은 전국을 누비며 영토를 확장하고, 크고 작은 반란을 잠재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호랑이 한 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해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초왕이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성 밑까지 쳐들어온 반란군이…….”
“알겠소.”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짐에 대한 황후의 마음을 몰랐다면 황후와 초왕의 사이를 의심할 뻔했소. 늘 초왕을 이렇게 치켜세워 주니 말이오.”
황후가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폐하, 어찌 이런 농을 하십니까? 폐하를 향한 신첩의 일편단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황후, 노여워 마시오. 짐의 생각이 짧았소.”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후가 너무 앞서갔소. 짐이 어찌 호랑이 때문에 초왕비에게 벌을 내린단 말이오. 초왕을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초왕비의 부군이 그 유명한 군신 아니오. 짐도 감히 초왕에게 밉보일 순 없지!”
황제와 황후는 결국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기로 했고, 흰여우 가죽을 탐낸 대가로 정추기의 목숨만 날아갔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백천범의 열다섯 생일이 되었다. 저택 곳곳에 초롱을 달고, 오색 천으로 장식하여 집안의 경사를 알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백천범은 머리에 진주 비녀를 꽂았고, 입술에는 연지를 발랐다. 어찌나 옷을 겹겹이 입었는지 뚱뚱한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마를 덮은 그녀의 앞머리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정원에는 향로가 놓인 낮은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앞에 방석이 놓여 있었다. 백천범은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향을 들고 달에게 공손히 절했다.
다른 규수들은 보통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 때 달에게 절을 올렸다. 이미 혼사를 치른 그녀에게 기홍은 다른 걸 빌어도 된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녀는 다른 규수들처럼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초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왕 또한 자신을 여동생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그녀를 다른 사내에게 시집보낼 거라는 걸 백천범도 알고 있었다.
동월국에서는 여자가 열다섯 살이 되면 머리에 비녀를 꽂는 의식을 했고, 남자는 스무 살에 상투를 틀고 관을 썼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을 지닌 일종의 성인식이었다.
초왕이 그녀를 잘 보살펴 주긴 했지만 이곳은 그녀가 평생 지낼 곳은 아니었다. 만약 좋은 인연이 나타나 시집을 간다면, 새롭게 정착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며 평생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었다.
절을 마친 그녀는 향로에 향을 꽂고, 손을 씻은 뒤 화장대 앞에 앉았다. 기홍이 그녀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 주었다.
이미 혼사를 치렀지만 다들 그녀를 그저 귀여운 아이라고 여겼다. 매일같이 앞머리를 휘날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열다섯 생일이 되었으니 흩날리던 앞머리도 깔끔히 올려 매끄러운 이마를 드러냈다.
머리 모양도 조금은 달라졌다. 만두같이 양쪽으로 돌돌 감아올린 머리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엿한 소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달거리까지 시작했으니 아이까지 가질 수 있는 몸이었다.
백천범은 구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드디어 어른이 되다니! 그녀는 줄곧 미래를 동경해 왔다. 그녀를 아껴 주는 남편과 말 잘 듣는 아이, 따뜻한 집까지…….
거울 안에 갑작스레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과 거의 붙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묵용감의 모습에 백천범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거울에 비친 두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열다섯 생일을 맞이했으니 어른이 되었군. 앞으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하고, 길을 걸을 때에도 뛰어다녀선 안 되오.
또 웃을 때 이를 보여서도 안 되고, 노랑이를 안고 돌아다녀서도 안 되오. 땀이 나면 곧장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크게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을 때에는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야 하오.
만약 왕비가 행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이 내가 왕비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슬픈 기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 입을 삐죽거렸다.
“왕야, 꼭 제 유모 같으십니다. 내일 당장 저를 시집보낼 것도 아니시잖아요. 저는 여기서 더 오래 지내고 싶다고요.”
묵용감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에서 늘 그렇듯 깨끗한 향기가 났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 말을 내뱉을 때 그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꼭 내일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서운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백천범을 여동생으로 삼았을 뿐, 그의 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 두고 머리도 빗겨 주고, 땀도 닦아 주며 온 마음을 다해 살뜰히 보살폈던 그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은 백천범이 열다섯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저 아이처럼 보살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열다섯이라는 문턱을 넘은 데다가 마음에 드는 사내까지 점찍어 두었으니 그녀가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언제든 보내 주어야 했다.
씁쓸한 기분에 휩싸인 그는 어느 때보다 더 가슴이 시큰거렸다.
묵용감은 몸을 일으키고 눈을 깜박였다. 어디서 이렇게 슬픈 감정이 밀려드는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위풍당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는 시신이 넘쳐나고 피바다가 된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르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 된 영문인지 씁쓸한 감정이 마구 솟구쳤다.
“…따라오시오. 왕비에게 줄 게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