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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1)화 (90/1,192)

제91화

묵용감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되었다. 왕비에게 냄새가 밸 것이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닭의 모습에 백천범이 견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다른 걸 먹이면 안 될까요?”

정추기가 웃으며 대답했다.

“살아 있는 닭을 주면 눈요기가 쏠쏠합니다. 호랑이가 닭을 잡고 입 안으로 욱여넣는 모습이 아주 사납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 하겠어요. 그냥 손질한 고기를 줘도 똑같지 않을까요?”

정추기는 그녀가 살아 있는 닭도 던지지 못할 만큼 겁이 많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결국 손질된 고기로 바꿔 온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호랑이에게 던졌다.

배고팠던 호랑이들은 먹이를 앞에 두고 참혹한 전쟁이라도 치르듯 마구 뒤엉켰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백천범은 호랑이가 뛰어오를 수 없는 높이인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옆에 서 있던 묵용감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짓궂게 놀려 댔다.

“호랑이를 보러 가자고 한 게 누구였더라? 그런데 이리도 겁이 나는 것이오?”

그 말에 팔을 밀치며 그의 품을 빠져나온 백천범이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무서워했다고 그러십니까? 그저 너무 오래 서 있었으니 잠깐 몸을 풀었을 뿐입니다.”

초왕과 초왕비 사이를 처음 목격한 정추기는 깜짝 놀라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서 초왕에게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사람은 오직 초왕비밖에 없을 것이다.

호랑이를 한참 바라보던 백천범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흉악하기만 한 게 눈요기는커녕 원숭이 구경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결국 묵용감은 정추기에게 원숭이를 보여 달라고 지시했다.

동물원에 원숭이는 아주 않았다. 그들은 둥근 단이 쌓여 있고, 그 가운데 인공 산까지 만들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원숭이들 절반 정도는 산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절반 정도는 땅에서 고개를 숙이고 먹을 것을 찾는 듯했다.

백천범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인공 산꼭대기에 앉아 왕처럼 구는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팔로 묵용감을 찌르며 물었다.

“왕야, 저 원숭이 왕야와 닮지 않았어요?”

깜짝 놀란 정추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초왕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더 이상했던 점은 초왕이 화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하하 웃으며 살짝 꿀밤을 주곤, 새끼 원숭이의 벼룩을 잡아 주고 있는 엄마 원숭이를 가리키며 똑같이 왕비를 놀릴 뿐이었다.

“저 원숭이는 꼭 왕비 같소.”

“저는 저 원숭이로 할래요.”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엄마 품에 누워 있는 저 아기 원숭이 말이에요.”

백천범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마음이 미어졌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우면 어린 원숭이를 보고도 부러운 마음이 든단 말인가? 그가 그녀 곁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왕비가 저 작은 원숭이면 난 벼룩을 잡아 주는 저 원숭이로 하겠소.”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 저 원숭이는 암컷입니다.”

묵용감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수컷은 벼룩을 잡지 못한단 말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백천범의 목에서 벼룩을 잡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간지러운 걸 참지 못하는 백천범은 몸을 비틀며 그에게서 떨어졌다가 다시 손을 뻗어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은 하하 호호 웃으며 한동안 소란을 피웠다.

따라온 하인들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정추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군신 초왕의 사생활이 이런 모습이었다니! 그는 은밀한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 *

다음날, 정추기는 특별히 서복궁을 찾아 귀비에게 예를 갖췄다.

“귀비 마마, 기뻐하십시오. 마마의 진공작이 돌아왔습니다.”

백 귀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찌 돌아왔다는 것이냐?”

“초왕과 초왕비께서 공작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정추기는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말을 바꾸는 데 달인이었다.

“진공작이 충직했던 것이지요. 초왕의 저택에 보내진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날개도 펼치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영 볼품없자 초왕비께서 몹시 화가 나 곧바로 다시 돌려보내신 것이라 하옵니다.”

“영 볼품이 없더냐?”

“아니옵니다. 진공작이 똑똑해서 잠시 죽은 척을 했나 봅니다. 다시 돌아오니 금방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귀비 마마께서는 마음 놓으십시오. 며칠 떠난 사이에 털빛이 조금 바래긴 했지만, 소인이 잘 관리해서 예전처럼 예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백 귀비는 차를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초왕비가 원치 않는 물건을 내가 귀히 여겨야 한단 말이냐? 그 애의 손을 거쳤으니 더러워졌겠구나. 나도 더 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 보내거라.”

정추기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내라는 말은 죽이라는 의미였다. 황실 동물원에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진귀한 진공작을 이렇게 죽여야 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초왕의 저택에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뻔했다.

하지만 귀비의 명이었으니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귀비의 명을 받들었다.

그가 굳이 귀비를 찾아와 이 사실을 고한 것은 상이라도 내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상은커녕 진공작을 죽이라는 명만 받았으니. 후궁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지독했다.

인사를 하고 그만 나오려는데, 백 귀비가 또다시 그에게 물었다.

“초왕야가 이번엔 무엇을 달라 하였느냐?”

“마마께 아룁니다. 초왕야께서는 아무것도 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초왕비를 모시고 동물원 안을 구경하셨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호랑이와 원숭이를 잠시 구경하시고는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초왕비가 호랑이를 보고 갔다 하였느냐?”

백 귀비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먹이도 주었느냐?”

“예. 소고기를 주었습니다. 소인이 살아 있는 닭을 던지시라고 했지만 겁을 내셨습니다.”

“다른 것은 주지 않았느냐?”

“예. 주지 않으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정말 주지 않았느냐?”

정추기는 백 귀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께선 초왕비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주었다고 여기시는 것인지요?”

백 귀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진공작을 황실 동물원에서 기르는 동안 내가 정 내관을 푸대접한 적은 없겠지?”

“예, 물론이지요. 마마께서 늘 후하게 대해 주셨지요. 마마님의 은혜는 소인이 늘 가슴에 새기고 있사옵니다.”

백 귀비가 난지를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흰여우 가죽을 가져오너라.”

백 귀비가 자신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 한다는 생각에 정추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여우 가죽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백 귀비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 내관의 허리가 좋지 않다 들었네. 황실 동물원이 워낙 넓지 않은가? 게다가 추운 겨울에는 더 안 좋을 테니 가져가 허리에 감싸게. 얼마 전에 들어온 흰여우 가죽이네.”

“아이고! 제가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정추기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인이 까닭도 없이 이리 귀한 걸 받을 수는 없사옵니다.”

“까닭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백 귀비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호랑이 중에 황제 폐하께서 기르는 호랑이가 있질 않은가? 그 호랑이에게 상한 음식을 먹여 탈이 나게 한 뒤 초왕비가 준 음식을 먹고 그리되었다고 말해 주게.”

깜짝 놀란 정추기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귀비 마마, 그것은 조금 과한 듯하옵니다.”

“과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폐하께서 초왕과 관계가 좋으시니 초왕비가 음식을 잘못 주었다 한들 그리 뭐라 하시진 않을 것이네. 그저 한바탕 꾸짖으시는 게 다겠지.

괜한 걱정 말게! 나와 초왕비가 자매이긴 해도 친정에서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네. 지난번에 내 공작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 이번 일로 폐하께 꾸지람을 들으면 내 분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솔직히 말하면 그저 여인들 간의 사소한 일일 뿐이지. 게다가 잠시 탈이 나게 하는 것이지, 죽게 하는 것은 아니니 폐하께서도 그리 책망하시진 않을 것일세. 그러니 날 좀 도와주게.”

부탁 반 협박 반의 어조에 정추기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초왕에게 감히 미움을 살 수 없었지만, 백 귀비에겐 더더욱 그랬다. 방금 전 아무렇지 않게 진공작을 없애라고 한 걸 보면, 언제든 황제에게 고해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게. 그저 초왕비에게 작은 벌을 주려 하는 것이니. 혹시라도 그 애가 정 내관에게 잘못을 돌린다면 여기 내가 있지 않은가?”

정추기의 허리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황실 동물원에서 지내면서 부족한 점은 없었지만,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야외에서 오랜 시간 지내야 했다. 특히 겨울이 되면 한 번 순찰을 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허리에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 그가 여우 가죽이 탐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도 귀한 흰여우 가죽이었으니 못해도 금자 열 냥의 값어치는 될 것이었다. 게다가 호랑이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배탈이 나게 할 뿐이니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과한 욕심은 늘 인간을 패망의 길로 이끈다. 특히나 재물 욕심은 더더욱 그러했다.

* * *

그가 봉명궁을 찾았을 때, 황제와 황후는 막 저녁 수라를 물린 뒤였다. 그는 태감太監 고승해高升海에게 이 소식을 고했다. 호랑이가 탈이 난 것에 불과했으니 황제도 분명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고, 태감은 그에게 호들갑을 떤다고 욕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태감은 급히 황제에게 향했고, 잠시 뒤 정추기를 들여보내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추기는 갑작스레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저 자신이 과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 위안했다. 안에 들어선 그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야에는 선명한 노란색 황포를 입고,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제의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폐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오늘 오후 설조雪爪가 갑자기 무른 변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의를 불러 약을 먹여 보았지만, 증상이 완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겁이 나 소인이 이리 급하게 폐하를 찾아와 고하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엇을 잘못 먹은 게 아니겠느냐? 이리 사소한 일까지 고하러 오다니. 짐이 너무 한가해 보이기라도 하는 것이냐?”

정추기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지만 그런 척만 하는 것이었다. 인자한 황제는 늘 다른 이들에게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책망하는 말을 하긴 했어도, 죄를 묻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설조의 상태가 좋지 않아 소인이 크게 당황한 나머지 감히 폐하께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실은 딱히 상한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어제 초왕야와 초왕비께서 동물원을 다녀가셨습니다. 초왕비께서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다 드렸습니다. 소인이 살아 있는 닭을 먹이로 주려 했으나 초왕비께서 겁이 많으신 나머지 소고기를 던져 주라 지시하셔서 그리했을 뿐이옵니다.

헌데 여섯 마리가 다 같이 소고기를 먹었는데 유독 설조만 탈이 났습니다. 너무 기이한 상황에 소인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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