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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0)화 (89/1,192)

제90화

사장풍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초왕비가 선물해 준 주머니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차마 몸에 지니고 다니기 어려운 솜씨의 주머니라 따로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는 얼이 빠진 채 말을 더듬거리더니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지어냈다.

“아, 그때 그 주머니를 말씀하시는 것이었군요. 그것은 별 사이 아닌 아가씨가 만든 것인데 소인이 그냥 주워 온 것이었습니다. 이미 버렸습니다.”

“버. 렸. 다?”

묵용감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그걸 버렸다 하였느냐?”

손가락에 피가 맺힐 만큼 고생하며 만든 것인데 그걸 버렸다니! 당장 칼을 뽑아 들어 숨통을 끊어 놓아도 시원찮을 지경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노를 삼키던 초왕은 사장풍을 향해 몇 차례 손가락질을 하더니 잔뜩 굳은 얼굴로 곧장 자리를 떴다.

깜짝 놀란 사장풍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영구에게 금방 가로막혔다. 초왕이 진노했을 때 낯선 사람의 접근은 금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장풍은 가동에게 붙잡혔다.

“대체 내가 어떻게 했길래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신 거야?”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가동은 하늘을 올려 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마 왕야께서도 네 주머니가 왕비 마마께서 주신 거란 걸 아시는 것 같다. 그런 주머니를 버렸다고 했으니 화가 안 나시는 게 이상하지.”

“사실대로 말하면 왕야께서 더 화내실 줄 알았지! 왕비 마마께서 다른 사내에게 주머니를 만들어 주셨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

“그게 어때서? 왕야께서는 어차피 개의치 않으시는걸.”

가동이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이거 봐라. 나는 날마다 차고 있는데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니까. 왕야께서 화가 나신 건 왕비 마마가 고생해서 만드신 걸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야.”

사장풍이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맨날 달고 다니는 건데. 내일 당장 달게. 난 진짜 몰랐어. 왕야께서 정말 개의치 않으신단 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여동생으로 여기신다고. 늘 왕비 마마께 잘해 주실 생각뿐이셔.”

가동은 앞서가던 두 사람의 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지금 안 가면 왕야께서 내가 너랑 한패인 줄 아시겠다. 나 간다!”

사장풍은 쏜살같이 달려가는 가동을 멍하니 바라봤다. 패거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한패라니……?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초왕의 곁에서 몇 해 지낸 가동은 많이 변해 있었다.

관두자, 어차피 술도 못 먹게 되었으니.

사장풍은 천천히 돌아갔다. 초왕과 초왕비, 그들 곁의 가동도 참으로 이상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듯 흠칫 놀랐다. 가동의 말대로 초왕이 초왕비를 여동생으로 생각한다면, 공주와 혼인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설마 자신에게 초왕비를 시집보내려고?

아뿔싸! 사장풍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초왕 자신의 눈에도 차지 않는 여인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 한단 말인가? 가동도 있고 영구도 있는데 왜 하필?

자그마한 왕비를 데려다주던 그날,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그녀는 그에게 절대 몸을 기대려 하지 않았고, 몸에 기력이 다 빠진 뒤에야 겨우 몸을 기댔다. 자신의 품에 기댄 작은 몸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던 그였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사장풍은 너무나 괴로웠지만, 초왕의 눈에 든 자신의 출중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 * *

잔뜩 성이 난 채 걸어가던 묵용감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사장풍이 주머니를 버렸다는 것은 백천범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억지로 하는 일은 결과가 좋을 리 없으니, 이 일은 이쯤에서 손을 떼는 게 더 좋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머릿속을 휘감던 먹구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동이 따라올 수 있게 잠시 발걸음을 멈춘 그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새어 나왔다.

가동과 영구는 그런 초왕의 모습이 이상하기만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를 내더니 지금은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적응할 틈도 없을 만큼 빠른 그의 감정 변화에 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발을 내디뎠다. 길가에 바람개비를 파는 노점이 있자 그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하나 집어 들었다. 노점 주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나리, 하나 사시지요. 좋은 재료로만 만든 것입니다. 이 매끈한 대나무며 알록달록 부드러운 종이까지 말입니다. 집에 하나 가져가시면 아이들이 분명 좋아할 것입니다…….”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가동의 동작이 더 빨랐고, 그가 재빨리 동전 한 닢을 건넸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돈이 있으니 네가 낼 필요 없다.”

묵용감은 느릿느릿 은자 부스러기를 한두 개 건넸다.

“거슬러 줄 필요 없소.”

“…….”

가동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초왕이 물건을 살 때마다 흥정은 늘 가동의 몫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예 돈을 들고 다니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왜 저렇게 돈을 내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뜻밖의 횡재에 잔뜩 신이 난 주인은 묵용감에게 바람개비 몇 개를 더 쥐여 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몇 개 더 가져가시지요.”

묵용감도 그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바람개비는 쉬이 고장 나니 몇 개 더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저택으로 돌아오자 학평관이 중문에서 그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뒤뜰에서 공작을 보고 계십니다.”

매일 초왕에게 왕비의 소재를 보고하다 보니 이제는 습관이 된 듯했다.

묵용감 또한 자연스럽게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바람개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뜰에 가니 공작은 여전히 잔뜩 움츠린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물과 먹이가 놓여 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옆에는 턱을 괸 채 눈살을 찌푸린 백천범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답답하고 즐겁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오?”

그가 그녀 앞에 바람개비를 내밀며 말했다.

“오는 길에 누가 준 것이오.”

백천범은 바람개비를 하나 집어 든 뒤 빵빵하게 부풀린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종이가 빠르게 돌아갔지만 그녀는 웃기는커녕 오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 공작이를 원래 살던 곳에 데려다주는 게 좋겠어요.”

“데려다주라니?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오?”

“좋긴 한데 왕야께서도 한번 보셔요.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니까요. 이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돌아가서 짝꿍을 만나면 다시 기뻐할지도 몰라요.”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소?”

“황실 동물원에서 데려왔다고 하셨죠? 보고 싶으면 직접 보러 가면 되죠, 뭐.”

힘들게 데려오긴 했지만 왕비가 다시 돌려보내자고 하니 묵용감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는 곧장 학평관을 불러 진공작을 우리에 담아 다시 황실 동물원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백천범은 그제야 기운을 차리며 기쁘게 말했다.

“왕야,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거기에는 호랑이도 있다는데 너무 보고 싶어요.”

“무섭지만 않다면 가서 한번 보시오.”

묵용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가마를 준비하라, 왕비도 함께 갈 것이다.”

그의 말에 학평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곧 식사를 할 시간인데 어린 왕비가 외출을 한다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왕비가 배고파하기라도 한다면 초왕이 하인들을 호되게 꾸짖을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역시 왕비를 살뜰히 챙기는 기홍이 찬합을 준비해 월향과 월규에게 전해 주었다. 간식과 차를 담았으니 어린 왕비가 밖에서 배를 곯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초왕과 초왕비 일행은 황실 동물원으로 향했다.

* * *

정추기는 초왕이 오고 있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난번에 진공작을 내준 탓에 백 귀비에게 따귀를 맞은 그였다. 이번에는 무엇을 가져가려 한단 말인가?

초왕을 맞이하러 나와 보니 초왕 뒤에 가마 한 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내려놓자 초왕이 직접 발을 걷어 올렸다. 이내 마차 안에서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한껏 조심스러워하는 초왕의 모습에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생각났다. 정추기는 그 계집아이가 왕비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앞으로 뛰어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더 빨리 왕야와 왕비 마마를 맞이해야 했는데 송구하옵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일어나거라.”

묵용감이 담담히 말했다.

“지난번 가져간 진공작을 다시 돌려주러 왔다.”

다시 돌려준다는 그의 말에 정추기는 마음이 놓였지만, 이내 다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진공작을 돌려주고 또 무엇을 가져가려 한단 말인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초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랑이는 어디 있느냐?”

다리에 힘이 풀린 정추기는 하마터면 땅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세상에나, 공작을 돌려주고 호랑이를 맞바꿔 가려 하다니.

호랑이는 총 여섯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황제의 것이었다. 그 호랑이만큼은 눈독을 들여서도, 마음에 들어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지난번처럼 초왕이 호랑이를 가져갔다간, 초왕은 벌을 면할 수 있어도 정추기는 참형을 피할 수 없었다.

“멍하니 뭣 하고 있는 것이냐? 왕비가 호랑이를 보고 싶어 하니 길을 안내하거라.”

백천범은 태어나 처음으로 동물이 모여 있는 곳에 온 것이었다. 예쁘고 우아한 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녀는 곧장 맹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랑이는 이곳의 왕이었다. 더구나 한 마리는 황제가 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 관리를 받고 있었다.

호랑이를 사육하는 곳은 아래에 널따란 단을 만들고 십여 미터 정도의 높은 벽을 두 겹으로 세워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높이가 충분하여 호랑이가 뛰어오를 걱정 없이 안전했다.

백천범이 벽에 바짝 기대 아래에 있는 호랑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놈은 엎드린 채 꼼짝 않고 있었고, 어떤 놈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또 어떤 놈들은 가만히 앉아 백천범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정추기가 살아 있는 닭 두 마리를 가져와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 직접 던져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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