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긴 했다. 녹하가 그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무슨 상황인지 설명했다.
녹하의 말에 묵용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공작이 날개를 펼치는 게 더 이상하리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공작 앞에서 재롱을 떤 백천범은 피곤해졌는지 요란스러운 동작을 멈췄다. 그 후,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아, 날개 한 번만 펴 주면 안 될까? 이것 좀 봐봐,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뛰어다녔는데 한 번만 펴 줘. 날개만 펴 주면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돼, 응?”
묵용감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목 뒤쪽을 쓸어 땀을 닦아 냈다.
“이것 좀 보시오. 또 이렇게 온몸에 땀이 나질 않았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가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백천범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빨간 얼굴과 입술을 하고 있는 백천범의 익살스런 모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귀신같이 이게 무슨 짓이오?”
백천범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예뻐요? 일부러 이렇게 꾸민 거예요. 공작이랑 미모를 겨루려고요.”
“미모는 무슨 미모. 귀신이 따로 없소.”
묵용감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그가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쥐를 잡아먹었다 해도 믿겠소. 공작이 놀라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오.”
백천범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나 보기 안 좋은지요?”
그녀가 작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입술이 묵욤감에게는 활짝 핀 진분홍색의 꽃처럼 보였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서 향긋한 향이 났다. 그녀에게서 나는 깨끗한 향기까지 더해지자 순간 묵용감의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몸을 돌려 기홍에게 말했다.
“왕비의 목욕 시중을 들고 옷을 갈아입히거라. 왕비에게서 나는 땀 냄새가 나한테까지 배겠구나.”
간혹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오랫동안 여인을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묵용감은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도 어디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건장한 사내였다. 그러니 여인과 가까이 붙어 있을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언급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그와 같은 왕손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여인을 접할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진왕은 열셋에 궁녀를 통해 일찍이 그쪽 문화에 눈을 떴지만, 초왕은 워낙 낯가죽이 얇았고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줄곧 전국을 누비며 전쟁을 치러 왔던 터라 여인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재는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는 황제를 도와 바쁘게 국정을 돌보고 있는 탓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또 그를 뒤흔들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슴에 남은 과거의 응어리 때문에 그 어떤 여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백천범 곁에 가까이 갈 때마다 몸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증상이 잦아지자 그는 여인을 찾아 몸에 쌓인 열을 식혀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까지 순수하게 지조를 지켰으니 주아에게 나름 떳떳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사람을 고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청렴결백한 그에게 기방은 불결했다. 그가 여인을 품기 위해서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결국 최선의 방법은 황제의 말대로 측비를 들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구부려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자 학평관이 조심스레 이 모습을 관찰했다. 왕야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까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평관아.”
초왕이 온화한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평관이 몸 둘 바를 모르며 허리를 잔뜩 숙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초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두어 번 더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이리 긴 시간 동안 외로웠던 적은 없었느냐?”
학평관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해졌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날마다 왕야의 곁을 지키니 조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가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네게 말해 봤자지.”
눈치가 빨랐던 학평관은 곧장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알랑거리며 말했다.
“왕야, 소인이 조금 부족한 점은 있지만, 어쨌든 남자는 남자이니 곁에서 보살펴 주는 처를 찾고 싶을 때도 있지요…….”
“본왕이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되었다. 그만하거라.”
학평관이 눈을 굴렸다. 초왕이 마음을 열고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내뱉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왕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
학평관이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인이 여인의 품을 그리워하지 않는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참으로 그립습니다. 비록 조금은 부족한 몸뚱이일지라도 그쪽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 방법이 있지요. 소인도 간혹 아리따운 여인을 보면 걸음을 걷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헌데 왜 장가를 들지 않은 것이냐?”
“소인은 저택 관리이지 않습니까? 초왕야의 저택이 곧 소인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혼인을 하면 밖에 집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데, 양쪽을 오가기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느 여인이 환관과 혼사를 치르고 싶어 하겠습니까? 있다 해도 기방에 있는 여인들이겠지요. 아마 그 여인들은 사람을 부릴 줄은 알아도, 고생은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은 제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이지요.”
묵용감이 말했다.
“환관이 되면 여인에 대한 흥미까지 사라지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군. 예쁜 아가씨를 보면 심장이 빨리 뛰고 손바닥에서 땀도 나고 그러는가?”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은 사내의 본능이옵니다.”
묵용감은 마음이 놓였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환관도 여인에게 반응을 하는데 패기가 넘치는 자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조금만 주의하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백천범은 아직 어리니 몇 해 더 지나 다른 이에게 시집을 보내면 더 이상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백천범의 혼사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사장풍이 떠올랐다. 백천범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앞으로 그의 매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글픈 생각이 든 초왕은 내일 사장풍을 찾아가 그의 성격을 알아보기로 했다. 정말 안 될 사람이라면 백천범에게 잘 설명하여 조만간 다른 사내를 찾아 줄 계획이었다.
* * *
이튿날, 조회를 마친 그는 구문제독의 관청으로 향했다. 서책을 정리하고 있던 사장풍은 초왕이 찾아오자 급히 나와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왕야, 오셨습니까?”
“본왕에게 이리 예를 차릴 것 없다.”
손을 내젓던 묵용감이 차마 내뱉지 못한 뒷말을 삼켰다. ‘곧 한 가족이 될 사이이니.’
“왕야께서 어인 일로 이곳을 다 찾아 주셨는지요,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까닭 없는 초왕의 등장에 사장풍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영문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일전엔 계속 성문을 찾더니 병사를 불러 단독으로 면담까지 한 그였다. 나중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병사에게 물어보니 죽어도 말해 줄 수 없다는 답변과 절대 사장풍의 욕은 하지 않았다는 맹세만 들을 수 있었다.
“별일 아닐세.”
묵용감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급한 일은 마쳤는가? 그랬다면 본왕이 술 한잔 대접하려 하네.”
사장풍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대답했다.
“왕야께서 술을 드시고 싶으셨군요. 응당 소인이 대접해야 하는 것인데, 이월二月 강변은 어떠신지요? 조용한 데다가 뒤쪽으로 큰 호수가 있어 연꽃을 감상하기에도 제격입니다. 왕야께서 괜찮으시다면 소인이 사람을 보내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래.”
묵용감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은 그리 덥지도 않고 멀지 않은 곳이니 너와 걸어서 가야겠다.”
사장풍이 앞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먼저 드시지요, 왕야.”
묵용감이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감히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던 사장풍이 그의 뒤를 따르자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 앞에서 그리 눈치 볼 것 없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너무 서먹해 보이질 않느냐.”
사장풍이 흠칫 놀랐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라니? 대체 초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공주와 혼사라도 치러 주시려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내가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니 사람들이 길가에 자리를 깔고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자 사장풍이 그에게 물었다.
“왕야, 장기를 두고 싶으십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젓고는 주머니에서 느릿느릿 은자 부스러기 하나를 꺼냈다. 이내 장기를 두는 한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자가 이기는 것에 걸지.”
초왕이 돈을 거니 지켜만 볼 수 없던 사장풍도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지난번 백천범이 만들어 준 게 아닌 시장에서 파는 주머니였다.
사장풍도 자신처럼 백천범이 만들어 준 주머니를 안쪽에 넣어 두었을 것이라 생각한 묵용감은 손을 뻗어 그의 주머니를 낚아챘다.
“솜씨가 아주 정교한 주머니구나. 어디에서 산 것이냐?”
그의 행동에 사장풍이 흠칫 놀랐다. 자신의 주머니를 가져가는 게 정말 그를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롱각玲瓏閣이라는 곳에서 샀습니다. 정교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주머니일 뿐이지요. 왕야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지.”
묵용감은 그가 눈치라도 챌까 봐 주머니의 끈을 더 단단히 조였다.
“본왕의 것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지. 밤까지 지새며 만든 것이라 하더구나. 보통 마음을 쓴 것이 아니지.”
엉뚱한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그의 모습에 사장풍은 더욱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과 초왕이 벌써 이 정도로 가까워졌단 말인가? 헌데… 누가 그리 마음을 써서 만들어 주었단 말인가?
백천범이 만들어 준 주머니를 차고 있지 않자 묵용감은 그의 마음을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장기의 승패를 기다릴 마음이 사라진 그는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향했다.
“사 제독은 정혼자가 없다고 하질 않았나? 헌데 본왕이 지난번에 보니 허리춤에 꼭 아가씨가 직접 만든 듯한 주머니를 차고 있던데. 사모하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