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초왕비는 귀비의 여동생이 아니오? 지난번에 보니 아직 어린아이라 장난기도 많을 것 같더군. 귀비의 여동생이 가져간 것이니 그리 아까워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게다가 이를 통해 백씨 가문의 자매 사이도 돈독해지고, 초왕의 체면도 세워 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질 않소? 초왕이 왕비와 마음이 통한다면 백 승상과의 원한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 귀비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백 귀비는 피가 거꾸로 솟을 것처럼 분했지만,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이며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더 넓게 보아야 했는데 신첩의 시야가 너무 짧았습니다. 폐하 말씀을 들어보니 그 공작은 초왕비에게 주는 게 좋겠습니다. 신첩이 괜스레 작은 일로 번거롭게 해 드렸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폐하.”
“아끼던 것을 빼앗기면 잠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이제 마음을 바꾸었으니 그만하면 되었소.”
황제가 황후를 보며 말했다.
“황후가 힘이 없는 듯하니 귀비는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소.”
백 귀비는 이를 악물었다. 귀한 인삼을 가져온 대가가 이것밖에 안 된다니! 손해를 봐도 한참이나 손해를 본 것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뒤 말했다.
“예, 신첩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 귀비는 난지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심하게 식식거리는지 몸이 다 들썩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서둘러 그녀의 서복궁瑞福宮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백 귀비가 떠나자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귀비도 참, 감정을 전혀 억누르질 못합니다.”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황후는 이 일로 마음 졸이지 마시오. 짐이 생각해 둔 게 있소.”
황후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지금 같은 시기에 다른 이는 몰라도 초왕만큼은 믿으셔야 합니다. 초왕이 아니면 폐하의 세상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짐도 알고 있소.”
황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다만 아무런 보고도 없이 이렇게 제멋대로 가져간 것은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소. 어쨌든 황실 동물원의 모든 것은 황궁 소유인데 말이오. 먼저 짐을 찾아와서 달라고 했다면 짐이 흔쾌히 주었을 것 아니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것은 귀비의 계략에 넘어가신 것입니다. 고작 공작 한 마리로 폐하의 형제 관계에 흠집을 내려 찾아온 것이니까요. 신첩이 보기에 초왕은 백 귀비의 공작인 걸 알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그 공작을 가져갔겠습니까?
게다가 초왕이 초왕비와 마음이 통하고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은 작은 아이긴 해도, 뛰어난 구석이 있어 초왕의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인을 만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요. 폐하께서 보시기엔 어떠신지요?”
그녀가 황제의 손을 감싸며 온화한 미소로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눈에는 그저 허약한 황후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사랑스럽게 품에 안았다.
“황후 말이 맞소. 짐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었소. 초왕과 초왕비가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측비와 서비를 들일 필요도 없지. 그들만 좋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황후가 황제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 이리 생각하신다는 걸 초왕이 안다면 분명 기뻐할 것입니다. 초왕은 늘 폐하께 충성을 다해 왔으니 절대 사이가 멀어지시면 안 될 것입니다. 초왕이 있어야 폐하의 세상이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짐도 알고 있소.”
황제가 고개를 숙여 황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황후가 어서 나아야 짐의 마음이 안정될 것 같소.”
* * *
진공작 덕분에 백천범이 회림각에 찾아오는 횟수가 크게 늘면서, 묵용감이 조정에서 돌아오면 거의 매일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가 회림각에 있으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생기가 넘쳤고, 모든 게 다 평화로웠다. 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인들은 쉽게 그의 기분을 읽어 냈고,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학평관의 눈에 어린 왕비는 작은 태양 같았다. 그녀가 회림각에 있으면 하늘이 맑았고, 없으면 그늘이 졌다.
초왕이 냉담한 표정을 지을 때면 하인들도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냉담하기만 하면 다행이었지만, 간혹 왕비와 말다툼을 한 날에는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쳤다.
회림각의 노비들은 어린 왕비를 조상 모시듯 극진히 대했다. 혹여 잘못된 행동을 했다간 초왕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하인들 몫이었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었던 백천범은 진득이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늘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뛰어다니는 탓에 계집종과 머슴들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야 했다.
하지만 어린 왕비를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다들 허리를 잔뜩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백천범은 그런 하인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아무도 따르지 말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수많은 별에 에워싸이는 달 같은 상황을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백천범은 이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초왕비였지만, 스스로를 진짜 왕비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녀는 늘 예전처럼 행동하고 싶어 했다.
노랑이의 뒤꽁무니를 쫓던 왕비가 넘어지자 깜짝 놀란 하인들이 벌떼처럼 다가와 그녀를 바로 일으켰다. 그들은 속을 끓이며 괜찮냐고 물어 왔다.
하인들은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무릎을 주물러 준 뒤, 왕비의 얼굴까지 다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만약 왕비의 얼굴에 상처라도 났다간 초왕이 벌로 곤장을 내릴지도 몰랐다.
백천범은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발을 구르며 노랑이와 다시 겨루고 싶어 했다. 적어도 달리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힘을 합세하여 그런 왕비를 막아섰고, 결국 기홍이 간식으로 과자를 가져온 뒤에야 그녀의 마음을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이 더워져 배탈이 나기 쉬우니 왕비에게 음식을 많이 먹이지 말라는 초왕의 명에도 주의해야 했다.
간식을 먹는 동안 공작이 생각난 백천범은 뒤뜰로 향했다. 귀하게 자란 진공작은 환경이 바뀌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날개를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구석에 쓸쓸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백천범은 과자를 먹으며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공작아, 날개 좀 펼쳐 봐. 그럼 맛있는 걸 줄게. 벌써 이틀이나 되었는데 한 번도 날개를 안 펼치다니, 여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백천범은 그릇에 남은 부스러기를 털어 먹고는 여전히 부족한지 다시금 그릇을 핥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녹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왕비 마마, 그러시면 안 된다고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황궁 연회에 가셔서도 황제 폐하 앞에서 그리하실 것입니까?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왕비 마마의 체면만 깎이는 것이 아닌 왕야의 체면도 깎아내리는 거라고요.”
백천범의 지위가 나날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기홍과 녹하는 처음 그대로 왕비를 대했다.
직설적인 녹하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왕과 왕비는 다른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왕이 일 순위, 왕비가 이 순위였다. 자신의 주인인 왕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백천범도 예전과 다름없이 그녀를 무서워했다.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울 때면 그녀는 늘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요. 꼭 기억해 둘게요. 밖에서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집에서는 가끔 신경을 못 써서 그런 것뿐이에요. 걱정 말아요, 언니.”
녹하가 빈 접시를 받아들며 말했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온몸에 땀이 났다고 꾸짖으실 게 분명하니 이제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언니, 공작이 날개를 펼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보고 싶어요.”
녹하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공작은 아름다움을 겨룰 때 날개를 펼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곳에는 겨룰 미모가 없으니 저러는 게 아닐까요?”
백천범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왜 없겠어요.”
말을 마친 백천범은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뒤를 쫓던 녹하의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불쌍한 왕야, 어쩌다 이런 말괄량이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 * *
이제 회림각에는 백천범만의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여벌의 옷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린 날에는 목욕을 한 뒤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가장 화려한 색의 옷으로 바꿔 입고 화장대에 앉아 연지를 발랐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 분야에 영 재능이 없었다. 무조건 화려하게만 칠하다 보니 입술은 쥐를 잡아먹은 것처럼 붉었고, 볼은 경극 무대에 오르는 사람처럼 새빨갰다. 얼굴 가득 하얀 분까지 찍어 바른 그녀는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뜰에 도착한 그녀는 치맛자락을 펼친 채 공작 앞을 어슬렁거렸다.
“이것 좀 봐, 얼마나 예쁘니?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예쁘니까 겨루지도 못하겠지? 못 믿겠으면 이리 와서 한번 봐 봐. 네가 그렇게 예쁘다며, 내가 보기엔 다 허풍 같은데? 내가 제일 예쁘지…….”
그녀는 계속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기괴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멀찍이 서 있던 하인들은 결국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택에 돌아온 묵용감은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리자 학평관을 바라보았다. 학평관은 초왕의 질문을 미리 눈치채고 먼저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뒤뜰에서 공작과 놀고 계십니다. 오늘도 아주 잘 지내셨습니다. 어디 부딪히거나 넘어지신 적도 없고 간식으로 과자를 조금 드셨습니다.”
묵용감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공작을 데려오니 확실히 정말 좋아하는 눈치였다. 저택 후원은 부지가 넓으니 공작 공원을 만드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는 점점 더 빠른 발걸음으로 뒤뜰로 향했다. 하인들이 무리를 지어 무엇인가를 구경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발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기뻐 날뛰는 백천범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