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7)화 (86/1,192)

제87화

정추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왕야, 만일 공작 한 마리가 필요하신 거라면 소인이 저택으로 보내 드린 뒤 상부에 보고를 하면 그만이지만, 깃털만 필요하신 데다가 양도 그리 많이 원하시니 소인이 미처 다 구할 수 없을 듯하옵니다.

공작은 궁의 마마님들이 좋아하시는 동물이라 평소에도 정성을 다해 기르고 있습니다. 깃털을 한 가닥만 뽑아도 곧바로 눈에 띄지요. 소인이야 왕야께 얼마든지 드리고 싶지만 그것은 좀……. 왕야께서 아예 한 마리 가져가셔서 깃털을 뽑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깃털을 구하려고 공작을 죽이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황실 동물원에 있는 동물은 황족이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품종 또한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던 날, 백천범이 두루미를 좋아했던 모습이 떠오른 묵용감은 깃털을 뽑는 대신 아예 공작 한 마리를 저택에서 기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천범은 분명 공작도 좋아할 것이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구나. 괜찮은 걸로 한 마리 골라 봐야겠다.”

“예, 왕야.”

정추기와 묵용감은 공작새를 기르는 곳으로 향했다.

공작 정원에는 수많은 공작새들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청공작이었지만, 진공작과 백공작도 있었다. 아름다움으로만 따지자면 희귀한 진공작이 으뜸이었다.

딱 한 마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묵용감은 한눈에 진공작에게 마음이 갔다. 그가 손가락으로 진공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좋겠다.”

정추기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왕야, 저것은 귀비 마마의 공작입니다. 다른 걸 고르시는 게 어떠신지요?”

궁에 귀비는 한 명밖에 없었다. 백 귀비.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본왕은 저 공작으로 데려가야겠다. 우리 집 왕비에게 주려는 것이니 친언니인 귀비도 개의치 않아 할 듯하구나. 지금 저택으로 가져갈 것이니 저 진공작을 잘 잡아 두거라.”

초왕이 당장 가져가겠다고 하니 정추기가 궁에 전갈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 소인이 이 진공작을 왕야께 드리긴 합니다만, 혹여 귀비 마마께서 죄를 물으시면 왕야께서 부디 소인의 목숨을 지켜 주시옵소서.”

“겁낼 게 뭐가 있단 말이냐, 내가 있거늘.”

묵용감은 그의 말이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서두르거라. 본왕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정추기는 하는 수 없이 인부를 시켜 진공작을 포획한 뒤, 우리에 담아 초왕의 저택으로 보냈다.

묵용감은 운송 인부들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백천범이 공작을 보고 기뻐할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가동이 조용히 영구에게 말했다.

“이번 일로 왕야께서 백 귀비의 원한을 사실 듯한데.”

영구는 초왕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께선 겁날 게 없으시잖아요.”

“근데 조금 웃기지 않냐? 생각해 봐. 다른 사람과는 다 원한을 지시면서 왕비 마마께는 이렇게 잘해 주시다니? 왕비 마마 때문에 직접 황실 동물원까지 가셔서 진공작을 데려가시고 말이야.

영구야, 왕야가 누구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잖아. 왕비 마마를 진짜 여동생처럼 여기면서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시는 걸 보니……. 우리도 왕야와 의형제를 맺어서 형제가 되면 엄청 출세할지도 몰라.”

영구는 모자란 사람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잠시 가동을 바라보더니 그의 말에 대꾸하는 것도 사치라는 듯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동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왕야도 참 불쌍하신 분이야. 황족으로 태어나셔서 가족들 사랑도 잘 못 받으시다가 여동생이 생기니깐 진심으로 아껴 주시고 말이야.

난 어릴 때 여동생이랑 많이 싸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많이 후회되더라고. 시집가면 고생도 많이 할 텐데, 친정 식구들만큼은 많이 아껴 줘야지. 나중에 집에 가면 동생한테 좋은 비단으로 옷 좀 지어 주려고.”

영구는 그를 바라보더니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택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초왕과 이 바보 같은 가동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가끔 주변인이 다 아는 일을 당사자만 못 알아차릴 때가 있다. 초왕은 당사자라 그렇다 쳐도 가동은 그를 따르면서도 이렇게 어리석다니! 이러고도 일급 호위무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눈치가 형편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묵용감은 학평관에게 곧장 왕비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백천범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뻐서 깡충거렸다. 역시 아이는 아이인지라 회림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있는 힘껏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뒤따르던 월향과 월규가 왕비를 불렀다.

“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 넘어지십니다.”

백천범은 속력을 줄이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난 괜찮으니 너희는 천천히 와, 넘어지지 말고!”

그녀의 말에 월향은 저절로 웃음이 났다. 이렇게나 규율을 지키지 않는 주인을 따르는 것은 즐거움과 근심 모두 끊이지 않는 일이었다.

수발을 잘 들지 못하면 왕야에게 혼쭐이 났고, 최선을 다해 모신다고 해도 왕비는 늘 제멋대로 굴었다.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려운 왕비였다. 시녀들은 시간을 갖고 천천히 그녀에게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뛰어들면서 물었다.

“공작은요? 어디 있어요?”

이마에 땀을 잔뜩 흘리며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찌 이리 덤벙거리며 뛰어오는 것이오? 옆에 따르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렇게 뛰어오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는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절대 뛰지 마시오. 열사병에 걸려 기절할 수도 있소.”

얌전히 선 백천범이 작은 얼굴을 들어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공작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공작은 그가 데려온 것이었으니 공작을 빨리 보고 싶다는 것은 그를 빨리 보고 싶다는 것이기도 하리라. 묵용감은 마음대로 백천범의 말을 해석했고, 그렇게 단정 지었다.

* * *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 귀비는 치가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또 초왕이 수작을 부렸다. 지난 일을 다 앙갚음하지도 못했는데, 이번엔 자신이 아끼던 진공작을 멋대로 데려가 버린 것이다! 이미 그에게 충분히 업신여김을 받은 그녀였으니, 그를 향하는 화도 보통이 아니었다.

황제의 일과를 따져 보니 지금쯤은 조회를 마치고 황후를 보러 갔을 시간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니 그 약골의 건강도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황제는 날마다 황후를 찾아가니 그곳에 가면 그와 마주칠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자신을 단장하고, 하인을 불러 귀한 인삼을 포장한 그녀는 궁녀 난지蘭芝를 데리고 황후의 궁전, 봉명궁鳳鳴宮으로 향했다.

역시 황제는 황후 곁에 있었다. 백 귀비는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아리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전에 귀한 인삼이 들어왔는데, 기력을 회복하는 데 제격이라 하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황후 마마가 생각나 특별히 가져왔습니다. 마마께서 건강하셔야 신첩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가져왔으니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고맙네.”

황제는 백 승상의 체면을 봐서 백 귀비에게 줄곧 예의 있게 대했다.

“귀비가 이리도 황후를 걱정해 주니, 짐도 마음이 놓이는구려. 이렇게 큰 인삼은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귀비에게 큰 빚을 졌소. 갖고 싶은 것은 없소? 짐이 상을 내리겠소.”

백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 어찌 신첩에게 이리 예를 갖추십니까? 신첩은 그저 진심을 다했을 뿐인데, 폐하께서 이러시면 신첩이 꼭 상을 바라고 한 행동 같아집니다. 궁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어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한 가닥 근심은 남겨 두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가 물었다.

“귀비의 표정을 보니 근심이라도 있는 것 같소.”

한쪽에 서 있던 궁녀 난지가 입을 열었다.

“마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단번에 귀비 마마의 근심…….”

백 귀비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입 다물거라.”

황제가 말했다.

“내버려 두시오. 난처한 일이 있으면 짐이 처리해 주겠소.”

백 귀비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폐하, 그리 난처한 일은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계신데 감히 누가 신첩을 업신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가 말을 아낄수록 황제의 궁금증은 더 커져 갔다. 결국 황제가 난지에게 물었다.

“귀비가 입을 열지 않으니 네가 말해 보거라.”

난지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더듬거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큰일은 아니옵고, 그러니까 며칠 전에 귀비 마마께서 황실 동물원에서 기르시던 진공작을 누군가 데려갔습니다. 저희 귀비 마마께서 아주 아끼시는 공작인데 누군가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실 동물원에서 기르던 게 어찌 없어질 수 있단 말이냐? 감히 누가 겁도 없이 가져간 것이냐?”

난지가 퍽 난처한 모습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 오만방자한 놈이 누군지 당장 고하지 못할까!”

깜짝 놀란 난지가 우물거렸다.

“초왕야이십니다.”

애초에 황제에게 고자질을 하러 온 백 귀비였으니, 이제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초왕과 신첩의 부친 간에 원한이 있습니다. 지난번 그 일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신첩의 친정으로 친위병을 데려갔을 정도지요. 어찌나 무서운 기세였는지 백성들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쑥덕대느라 유언비어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초왕의 모습이 화, 황제 폐하보다 더 위엄 있다며…….”

“그건 사실이 아닐세.”

황후가 정색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 앞에서 근거도 없는 말을 귀비가 함부로 떠들다니! 초왕이 어떤 사람인지는 폐하께서 더 잘 아시네. 초왕이 세운 공로를 따져 보면 가끔 교만하게 구는 것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지.

게다가 그 일은 궁에도 이미 소식이 다 전해지질 않았는가? 귀비의 삼촌이 초왕비를 잡아가 초왕이 귀비의 친정으로 찾아간 것이라고 말일세. 초왕이 백 승상과 원한이 있다고는 하나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먼저 일을 그르치지는 않는 사람이네.”

백 귀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첩이 어리석은 말을 하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물었다.

“초왕이 무엇 하러 공작을 가져갔단 말이오?”

“초왕비에게 보여 주려고 가져가셨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황제가 씩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