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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6)화 (85/1,192)

제86화

그가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와 중문에 들어서니 마당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햇빛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묵용감의 얼굴엔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학평관이 즉각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백천범은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왔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반월문에서 회랑으로 꺾어 들자 백천범은 포도 시렁 아래에서 까치발을 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와, 알맹이가 잔뜩 열렸네, 가을이 되면 많이 먹을 수 있겠다!”

묵용감이 그녀 뒤로 다가가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치며 말했다.

“이리도 먹을 것을 탐내다니. 이제 막 작은 알맹이를 맺었을 뿐인데 그리 욕심을 낸단 말이오?”

그를 본 백천범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왕야, 잘 다녀오셨어요? 왕야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묵용감이 무심한 듯 말했다.

“왕비가 내게 줄 만한 것이 있긴 하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이 담겨 있는걸요.”

백천범이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내 묵용감에게 내밀었다.

“며칠 동안 급하게 만든 것이에요. 부디 받아 주시어요, 왕야.”

흠칫 놀란 묵용감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고, 그동안의 감정도 순간의 행복에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 하지만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트집을 잡았다.

“왕비가 만든 게 맞소?”

“예, 왕야. 마음에 드시는지요?”

묵용감이 주머니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붉은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지난번에 비해 솜씨가 확실히 좋아진 듯했다. 적어도 바늘땀이 일정했고 마구 엉켜 있는 곳도 없었다.

하지만 무늬가 조금 맘에 들지 않았다. 가동에게는 연꽃 두 송이, 사장풍에게는 원앙을 수놓아 주더니 그에게는 매화를 선물했다.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눈 속에 핀 매화를 본받아 더 강해지란 말인가? 더 높은 지위로 올라 매화처럼 꽃을 피우라는 의미인가?

그는 천하제일의 대장군이었다. 더 높은 지위는 황제밖에 없으니 그 자리를 탐하는 것은 대역죄였다. 하지만 그가 기뻐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계집아이를 보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다시 수를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지 솜씨가 제법이었다.

진홍색, 담황색, 다홍색 등의 색 조합도 예뻤고, 가지런한 바늘땀이 지난번 사장풍에게 준 것보다 훌륭했다. 그에게 주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몇 번 연습을 거친 후에 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묵용감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겨우 유월이니 포도가 익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지만 토번吐蕃 지역의 포도가 곧 진상될 것이니 그때 왕비에게 맛을 보여 주겠소.”

“토번의 청포도가 아주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길쭉하게 생긴 알맹이에 꼭 서리를 맞은 것처럼 껍질이 하얀빛을 띠는데 그렇게 맛이 달콤하다고 하던데요.”

“먹어 본 적 없소?”

“네, 귀비 마마께서 집으로 보내온 적 있어서 보기만 했어요.”

백천범이 손가락을 내보이며 설명했다.

“알맹이가 이렇게 크고 말 젖을 닮아서 마유 포도라고 부른대요.”

그녀가 손가락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왕야, 말 젖이 이렇게 생겼어요?”

그녀의 손짓에 묵용감은 어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다 문득 그날 목욕간에서의 일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백천범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왕야,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지신 거예요? 열이라도 나는 것이에요?”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으려 했지만 묵용감이 무뚝뚝하게 막았다.

“아무 일 없소. 날이 더워서 그렇겠지.”

“그럼 어서 목욕을 하시어요.”

백천범이 시렁에서 내려오자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순간 묵용감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얼 해도 어찌 이리 귀엽단 말인가…….

“왕야, 왜 저를 그리 빤히 보십니까?”

“…그저 나는…….”

그가 서둘러 시선을 포도 시렁으로 옮기며 말했다.

“여기에 그네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했소. 어떨 것 같소?”

“너무 좋죠! 저녁에 여기 와서 그네도 타고, 바람도 쐬고 일석이조겠네요.”

묵용감이 곧바로 학평관을 불러 그네를 설치하라 분부했고, 학평관은 공손히 그의 명을 받들었다. 학평관이 한쪽으로 물러서려는데 묵용감이 또다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튼튼하게 설치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왕비가 떨어졌다간 네 엉덩이에서 불이 날 줄 알거라.”

학평관이 몸을 잔뜩 숙이며 말했다.

“소인이 단단히 일러둘 테니 걱정 놓으십시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다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

묵용감이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예쁘게 꾸미는 게 좋겠다. 어린 여인들은 꽃이나 풀 같은 걸 좋아하니 그림을 그리는 자에게 도안을 보내라고 해라. 그중에서 왕비가 검토하는 게 좋겠다.”

“예.”

백천범이 겸연쩍게 말했다.

“왕야, 그리 복잡하게 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그네일 뿐인데요. 그네만 준비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직접 할 수 있습니다.”

묵용감은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학평관에게 손을 내저었다.

“우선 물러가 있거라. 다시 고민 좀 해 볼 테니.”

백천범이 손수 주머니에 수를 놓아 주었으니 자신도 이왕이면 직접 그네를 달아 볼 생각이었다. 분명 이 계집아이도 크게 감동할 것이었다.

감격할 백천범을 생각하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묵용감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묵용감의 표정을 목격한 학평관이 속으로 생각했다.

‘왕야께서 왜 저러신담?’

한쪽 입꼬리를 자꾸만 치켜세우는 게 꼭 중풍에 걸린 사람 같아 보였다.

백천범은 점심을 먹은 뒤 후원으로 돌아갔다. 이때마다 적잖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던 묵용감은 그녀가 반월문을 지나 시야에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는 방에 돌아와 백천범이 선물해 준 주머니를 다시 꺼내 보았다.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 또 빤히 바라보니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주머니를 허리춤에 건 뒤,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바라봐도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솜씨며 색이며 더 나무랄 게 없었다. 천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열심히 원단을 고른 게 느껴졌다. 게다가 전체적인 모양 또한 더 말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가 속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는데 갑작스레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에 주머니를 꽉 쥔 채 어디에 숨겨야 할지 몰라 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차를 들고 방에 들어온 녹하는 어색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기만 했다.

“왕야, 넋이 나가신 듯한 표정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잃어버리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이 손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나가 있거라. 지금은 수발을 들 필요 없다.”

녹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책상에 차를 두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방을 나섰다.

그는 백천범이 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쨌든 왕이었으니 밖에서 품격이 떨어지는 물건을 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머니는 언제나 묵용감의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낮잠에 들 때에도 그는 주머니를 베개 밑에 놓고 자꾸만 꺼내 보았고, 주머니 안에 은자와 어음 같은 것들을 잔뜩 넣어 두었다.

백천범이 처음으로 그에게 준 것이었으니 그는 감격스러운 기분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이 모습을 들킬 수 없으니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감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없는 그는 괴로움에 뒤척거리느라 잠에 들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주머니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쏟아 낸 뒤, 주머니를 손에 움켜쥐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편안해졌고, 그는 어느새 천천히 잠이 들었다.

* * *

묵용감은 이튿날 학평관에게 그네의 재료를 사오라고 분부했고, 직접 포도 시렁에서 분주하게 일했다.

물론 이 일은 백천범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회림각에 있을 때는 그네에 손도 대지 않았다. 다 완성된 후, 깜짝 선물로 보여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관 설계 또한 그가 직접 했는데, 그네 판 양쪽에 날개 형상으로 예쁜 깃털을 꽂기로 했다.

공작새의 깃털을 구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을 텐데……. 잠시 고민한 그는 황실 동물원에 가서 공작새 깃털을 구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몇 가닥 얻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양 밧줄에는 꽃으로 만든 끈을 길게 장식할 계획이었다. 아마 그네를 타면 큰 새가 꽃 사이에 앉아 있는 느낌일 것이었다.

귀여운 만두 모양 머리를 하고, 그네에 앉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작은 입으로 방긋 웃어 보일 모습을 상상하니 얼마나 귀여울지,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아마 정말 예쁜 장면을 만들어 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곧장 황실 동물원으로 향했다.

* * *

황실 동물원을 관리하는 사람은 궁에서 파견한 내관 정추기鄭秋豈였다. 내관은 원래 허리를 깊게 숙이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는 묵용감을 보자마자 웃는 낯으로 몸을 잔뜩 낮추고 알랑거렸다.

“초왕야께서 이곳을 다 찾아 주시다니요. 소인이 더 일찍 마중을 나왔어야 했는데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초왕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일어나거라. 오늘 본왕이 부탁이 있어 찾아온 것이니.”

“아이고, 왕야. 소인에게 부탁이라니요. 거두어 주시옵소서,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소인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묵용감도 긴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공작 깃털을 구했으면 하네.”

“…왕야, 공작 깃털은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묵용감이 얼굴을 굳혔다.

“본왕의 일에 궁금할 것도 많다!”

악명 높은 초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기에 정추기 또한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왕야,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소인이 잠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감히 왕야의 일을 물었나이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일어나거라.”

묵용감이 그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분부대로만 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

정추기가 서둘러 일어서며 물었다.

“깃털이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묵용감이 고민 끝에 말했다.

“공작 한 마리에 깃털이 얼마나 있느냐?”

“대략 이백 개 정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될 듯하다.”

묵용감이 말을 이었다.

“공작 한 마리마다 조금씩 뽑으면 되니 그리 어렵진 않겠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워도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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