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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5)화 (84/1,192)

제85화

사장풍의 단점을 찾은 묵용감은 말에 올라탄 뒤 여유롭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말을 탄 묵용감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자 영구와 가동은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그때 묵용감이 둘에게 물었다.

“본왕이 잘 때 코를 고는 소리를 들은 적 있느냐?”

영구와 가동이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동이 재빨리 그의 비위를 맞췄다.

“왕야께서 코를 고시다니요? 소인이 이렇게 오랜 시간 왕야 곁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왕야께서는 주무실 때에도 호흡이 일정하여 코를 고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영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평소에는 들은 적 없지만, 들은 적이 있긴 있었습니다.”

묵용감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본왕이 언제 코를 골았단 말인가?”

“소인 기억에 북쪽에서 전쟁을 치를 때였습니다. 왕야께서 계속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시다가 전쟁이 끝나고 초원에서 잠이 드셨을 때 코를 심하게 고셨습니다.”

“그건 본왕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이지.”

묵용감이 그를 훑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코를 골지 않는다.”

가동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코를 고는 것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어쨌든 자신의 주인은 코를 고는 걸 싫어하니 그 또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소인도 코를 골지 않습니다.”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그 반대지요. 하루라도 코를 안 골았던 날이 있습니까?”

* * *

초왕이 요즘 성문을 자주 찾는다는 소식이 황제에게까지 전해지자 황제가 초왕에게 잠시 남으라고 명했다. 황제는 먼저 안부 인사를 간단히 물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성문을 자주 둘러본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저 보수할 곳은 없는지 점검을 한 것뿐입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런 일까지 초왕이 직접 행차하다니! 구문제독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묵용감은 잠시 머뭇거렸다. 잘못 말했다간 사장풍이 관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했다.

“폐하, 꼼꼼히 살펴보니 성문을 견고하게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구문제독의 능력이 제법 뛰어난 듯합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칭찬을 다 하고. 구문제독이 일을 잘하긴 하는가 보구나. 허면 상을 내려야지. 괜찮은 자리가 나면 그자를 등용해야겠다.”

황제가 사장풍을 묵용감의 사람으로 오해해 일부러 선심을 쓰려는 것이었다.

“구문제독 사장풍이 일을 잘하긴 하지만 높은 관직을 맡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제가 보기에 몇 해 더 경험을 쌓은 후에 다시 고려하셔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 네가 중시하는 사람이니 네 말을 들어야지.”

황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지난번 짐이 한 말은 고민해 보았는가?”

황제가 또 그 일을 꺼내자 묵용감은 머리가 아파 왔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막 정실 왕비를 맞았는데 또다시 다른 여인을 맞이하라니. 숨 돌릴 틈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어째서? 어린 왕비에게 푹 빠져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비가 어떤 상황인지는 폐하께서도 이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자그마한 아이인데 푹 빠지다니요?”

“그러니까 짐이 노심초사하는 것 아니겠느냐? 지난번엔 백 승상의 꾐에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황후가 직접 고른 여인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늘 말했듯 불효 중에서도 후손이 없는 게 가장 큰 불효이니라. 셋째야, 태비 마마를 생각해서라도 황후의 말을 새겨듣거라.”

묵용감이 목을 가누고 창밖을 보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제 정신 좀 보십시오. 어제 태비 마마를 뵈러 간다 해 놓고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오늘은 꼭 뵈러 가야겠습니다. 안 그랬다간 거짓말쟁이라 여기실 테니까요. 그럼 이 아우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나오지 마십시오, 폐하.”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묵용감은 이미 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황제는 그저 고개만 내저었다.

측문으로 황후가 들어왔다. 멀리 사라지는 묵용감의 모습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이리 난처해하시는 걸 보니 초왕이 또 대답을 회피했나 봅니다.”

황제가 탄식을 쏟아냈다.

“저 애는 정말 방법이 없소.”

그가 그녀를 맞이하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오. 몸이 불편하질 않소, 좀 나아진 것이오?”

황후는 궁녀가 올린 그릇을 받아들었다.

“신첩, 황제 폐하께서 많이 피로하신 듯하여 보양식을 가져왔습니다. 동충하초와 구기자, 황기를 넣은 비둘기찜입니다. 뜨거울 때 어서 드십시오.”

황제는 음식을 받아 책상에 올려놓고 황후의 손을 잡았다.

“황후, 짐이 무슨 말을 해야 들을 것이오. 몸도 이렇게 아픈데… 황후는 편히 쉬어야 하오. 황후의 몸을 잘 돌보는 게 짐의 걱정을 덜어 주는 것이오. 얼마 전 좌당중左堂中이 새로 지어 준 약은 좀 어떻소?”

“아주 좋습니다. 폐하께 늘 염려를 끼쳐 드리네요.”

황후는 국자로 음식을 덜어 황제에게 전했다.

“폐하, 신첩의 작은 정성이니 드셔 보시옵소서.”

황제가 숟가락을 들자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측비를 들이는 일 말입니다. 셋째가 싫어한다면 너무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혹여 이상한 생각을 가지면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갈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 동생을 끔찍하게 여기신다는 것은 신첩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

황제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고개를 숙이고 음식만 먹었다.

* * *

묵용감이 장합전璋合殿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누군가 뛰쳐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자는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짓고 허리를 굽힌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태비를 곁에서 모시는 환관 황유도黃有道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전하. 안 그래도 마마께서 찾으시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태비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아들인 묵용감이 왔다는 소리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당장에라도 나가서 맞이하고 싶었지만,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묵용감은 어릴 때 어미인 자신이 아닌 황후 곁에서 자랐다. 조금 커서는 학당에 들어갔고, 그 이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며 여러 공로를 세워 왔다. 그녀는 어미로서 힘을 들인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들 스스로 친왕의 칭호를 쟁취한 셈인 것이다.

선황이든 지금의 황제든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다. 군신이라는 그의 호칭이 궁 안까지 전해지자 그녀도 매우 뿌듯했다.

묵용감이 궁에 들어오면 상을 내리려고 했지만 몇 년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뒤늦게서야 말수가 적은 아들이 어느새 위풍당당한 대장군이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건장한 풍채와 날카로운 눈빛, 대담하고 과감한 성격에 그녀 또한 감히 시선을 마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들이 문안 인사를 하러 올 때마다 늘 서먹하고 낯설었다. 어색한 이들 모자 사이는 그간 단 한 번도 친근했던 적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화기애애해 보일지라도 그녀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저 인사치레 뒤에 무슨 속내가 숨어 있단 말인가?

아들은 자신이 황보주아를 지키지 못한 것과 백 승상을 도왔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이 일로 가깝지 않던 둘 사이가 더 소원해졌다. 날마다 조정을 찾는 아들이었지만 그가 장합전에 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젊을 땐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만 눈이 멀었던 그녀는 나이가 들고 나서야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묵용감은 늘 똑같이 덤덤했다. 그와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지 그녀도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막 찻잔을 내려놓는데 묵용감이 금세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절을 올렸다.

“소자, 태비 마마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서태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앞에서는 그리 예를 차릴 필요 없다. 날 찾은 것만으로도 좋구나.”

그녀의 말에 씁쓸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정말 그가 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어제 오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일이 지체되어 오늘 뵈러 왔습니다.”

“네가 바쁜 건 나도 아는 바이니 건강만이라도 잘 챙기려무나. 곁에 세심히 돌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늘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 황후가 얼마 전 네 측비 문제로 날 찾아왔었다. 초상화를 보니 아주 단아하던데. 게다가 성격까지 괜찮다고 하더구나.”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황제 앞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장합전에서까지 이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서태비에게는 대답을 회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소자, 이미 왕비와 혼사를 치렀습니다. 곁에서 세심히 돌봐 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지요.”

서태비가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지 않느냐! 그자가 한 짓은 황후에게서 들었다. 황상에게까지 수작을 부리다니. 어찌 너에게 그리 부족한 계집을 보낼 수 있단 말이냐.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황상이 특별히 황후에게 측비와 서비를 고르라 한 것이다. 용감아, 황상의 그 갸륵한 마음을 거절해서는 아니 된다.”

마음이 답답해진 묵용감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비 마마. 소자가 이미 황제 폐하께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용감아, 어찌…….”

서태비는 모친으로서 그를 더 타이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눈앞의 아들은 온화한 얼굴을 했지만 언뜻언뜻 냉담한 기류를 조금씩 내비쳤다. 그녀는 그가 더 싫증을 내기 전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싫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왕비가 정말 세심히 돌봐 주고 있다는 말이지? 자신도 어린데 널 챙길 줄 아는 걸 보면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아이인가 보구나. 너도 그 애에게 푸대접해서는 안 될 것이야.”

백천범을 칭찬하는 말이 듣기 좋았는지 굳었던 묵용감의 표정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한참 뒤에 그가 대답했다.

“예. 태비 마마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소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서태비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빨리 돌아가다니…….

“그래, 내 염려는 하지 말려무나.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네 건강에 더 신경 써야 한다.”

묵용감은 예를 갖춘 뒤 문을 나섰다. 백천범 이야기를 꺼내니 왠지 그녀가 보고 싶었고,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모르긴 해도 집안에 걱정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제법 괜찮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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