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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4)화 (83/1,192)

제84화

백천범이 묵용감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왕야, 허리 좀 굽혀 주세요. 손이 안 닿아요.”

묵용감을 바라보던 그녀가 불쑥 칭찬을 늘어놓았다.

“왕야, 정말 키가 크시네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다는 말은 왕야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그녀의 칭찬에 묵용감이 의기양양한 말투로 대꾸했다.

“뭐, 형제들과 비교해 봐도 내가 제일 큰 편이었소. 황제 폐하도 나보다 한 뼘쯤은 더 작으시지.”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이렇게 크시니 저도 열심히 커서 왕야의 어깨까지 닿고 싶어요.”

묵용감이 그녀를 훑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어깨까지 닿긴 어려워 보였다. 이제 겨우 가슴 언저리에 닿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갑작스레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내 어깨만큼 키가 크니 기분이 어떻소?”

백천범은 이곳저곳 살펴본 뒤 헤헤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시야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그녀가 말을 내뱉자 따뜻한 숨결이 그의 목 주변에 닿았다. 깨끗한 향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묵용감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럼 어서 크시오. 크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테니.”

“많이 먹으면 빨리 클 수 있을 거예요.”

백천범이 자신의 허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요. 방금 절 들어 올리셨을 때 무겁지 않으셨어요?”

묵용감이 말했다.

“가볍게 흩날렸을 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소.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본왕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왕비가 날아갈까 봐 걱정이오.”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여기저기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흠칫 놀랐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다니. 이곳에서 지내는 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인가?

“어디를 그리 가고 싶소?”

“가고 싶은 곳은 많죠.”

백천범이 손가락으로 세어 가며 묵용감에게 말했다.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강남江南 지역이에요.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도 어마어마하게 많대요. 그리고 집들도 다 예쁘고, 오봉선烏蓬船을 타고 연방蓮房도 딸 수 있고…….”

“좋소, 내가 데려가지.”

“네?”

백천범이 깜짝 놀라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조금 과한 욕심을 부린 듯하여 겸연쩍게 웃었다.

“왕야, 신경 쓰지 마시어요. 그저 말만 해 보는 것뿐이니까요.”

“내가 했던 약속 중에 어디 말뿐이었던 게 있소? 나중에 시간이 생기거든 꼭 데려가 주겠소.”

그가 갑작스레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왕비가 했던 약속은 어째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오?”

오랫동안 참아 왔지만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불씨를 끌 방법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왕야께 약속을 했었나요?”

묵용감이 입꼬리를 들썩이며 억울함을 드러냈다.

“주머니에 수를 놓아 준다고 하지 않았소?”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 일은 서로 진 빚을 갚은 셈 칠 테니 보답할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게다가 제 솜씨가 좋지 않다고 하셔서 왕야께서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안 만들었죠.”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애당초 자신에게 만들어 줄 생각조차 없었다니! 바늘에 찔려 피가 난 것도 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였다니?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는데…….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오. 그까짓 것.”

초왕은 자신의 손수건을 빼앗아 들고는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백천범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멀쩡하다가 또 왜 저리 변덕을 부리실까?”

* * *

이 일로 묵용감은 며칠이나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니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주머니 하나에 이렇게 감정이 휘둘리다니.

그는 단지 백천범이 조금 철이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는데 이 계집아이의 머릿속엔 온통 자신의 사부와 사랑하는 사내뿐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한 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였고, 사랑하는 사내는 그녀의 마음을 가져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 둘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그녀를 질책할 수는 없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이제 지나간 일이니 마음을 다잡아야 했지만, 사장풍의 인품은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성문을 찾았다. 그의 잦은 등장에 문지기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들이 보고를 올리면 사장풍이 곧장 달려와 묵용감을 수행했다.

사장풍도 이상하게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초왕과 자신의 사이는 지금까지 평범하기 짝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이렇게 날마다 찾아오시다니……?

그가 묵용감을 보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야, 요새 발길이 잦으신데 성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소인은 아직 부족하여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왕야께서 일깨워 주십시오.”

묵용감이 크고 웅장한 성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향이 어디인가?”

사장풍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히 대답했다.

“소인은 가동과 동향입니다. 하북河北 창주滄洲에서 자랐습니다.”

“그렇군. 가족은 어떻게 되나?”

“부모님과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이 있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동생이 둘이라면 나중에 시누이들과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는가? 여동생들은 시집을 갔는가?”

“부모님은 작은 가게를 하십니다. 여동생 하나는 시집을 갔지만 다른 하나는 아직입니다.”

그래도 한 명은 출가를 했으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백천범이 이 정도의 갈등조차 피하지 못한다면 아예 시집을 보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괜스레 너무 먼일까지 생각한 탓에 그의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다. 시집을 가기에는 아직 어리니 열여섯, 열일곱쯤 되었을 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집안에 정혼자는 있느냐?”

사장풍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소인, 어려서부터 집을 나와 정혼자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시집온 백천범이 진짜 아내는 아니었으니 언제든지 자유롭게 보내 주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게다가 사장풍을 보아하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을 듯했다.

초왕의 질문에 답하던 사장풍은 그가 자신에게 중매를 서 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질문을 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초왕야가 맺어 주는 여인은 좋은 조건을 갖췄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다. 만약 좋은 가문의 여인과 혼사를 치른다면 그 또한 구문제독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야, 소인에게 그런 걸 물어보시는 것은 혹시…….”

묵용감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한번 물어본 것일 뿐, 아무 일도 아니다. 바쁠 텐데 가서 볼일 보거라. 병사들이 수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감히 초왕을 두고 떠날 수 없던 사장풍이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바쁘지 않습니다. 병사들이 왕야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봐 염려되니 소인이 직접 모시겠습니다.”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네가 있으니 저들이 수행할 기회도 없는 것이지. 그저 편하게 대할 테니 어서 가거라. 저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걸 보니 찔리는 게 있는 듯하구나.”

묵용감이 저리도 몰아세우니 감히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풍은 자신을 더 의심하기 전에 병사를 불렀고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사장풍이 떠난 뒤 묵용감이 병사에게 물었다.

“제독과 친분이 있는가?”

초왕과 가까이 대면한 게 처음이었던 병사는 온몸을 덜덜 떨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예, 제독 나리께서 자주 순찰을 오시기 때문에 대부분 다 가깝게 지냅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똑바로 서거라.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거짓을 말했다간 본왕이 끝까지 찾아내서 곤장을 내릴 것이다.”

“예.”

병사가 불안에 떨며 말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왕야. 소인이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풍의 성격은 어떠하냐?”

병사가 답했다.

“…아주 좋습니다. 한 번도 저희들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온순하신 편입니다.”

“부녀자들처럼?”

병사가 허둥대며 손을 휘저었다.

“그, 그건 아, 아닙니다. 제독 나리는 아주 엄격하시기 때문에 부녀자들 같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매우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들에게 술을 대접한 적은 있었느냐?”

병사가 곰곰이 생각을 되짚었다.

“없습니다.”

“인색하군.”

“인색하시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다른 병사의 어머니께서 심하게 아프셨는데 제독 나리께서 은자를 들고 병문안을 가셨습니다. 다들 인정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희는 야간에도 보초를 서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무예 실력은 어떠하냐?”

“아주 뛰어나십니다. 혼자서 세 명을 상대하실 정도입니다. 짬이 날 때 서로 실력을 겨뤄 보는데 아무도 나리를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묵용감이 뒷짐을 진 채 먼 곳을 주시했다. 미간이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결점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정말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란 말인가?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구문제독의 단점을 한 번 말해 보아라.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

병사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정말 제독 나리의 단점을 말해야 한다면, 나리 스스로에게는 너무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신발 한 켤레를 깁고 또 기워서 삼 년 동안 신고 계십니다. 버리기가 아까우신 듯합니다.”

묵용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단점이라니?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하면 참으로 청렴한 장병이라며 황제 또한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

“이게 단점이란 말이냐? 감히 본왕을 기만하는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병사가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참 생각한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난 게 하나 있습니다. 제독 나리께서 주무실 때 코를 좀 고십니다.”

오, 이것은 큰 문제였다. 부부가 함께 잠을 자는데 한 명이 코를 심하게 골면 다른 한 명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잠귀가 밝은 백천범은 분명 밤을 지새울 게 뻔했다. 그건 안 될 일이었기에 사장풍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끝내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어낸 그가 병사에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오늘 내가 너에게 물은 것들은 외부에 전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사장풍의 귀에는 더더욱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예, 왕야.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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