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3)화 (82/1,192)

제83화

묵용감이 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리 예를 차릴 것 없다. 그저 잠시 둘러보러 온 것이니 옆을 지킬 것 없다.”

사장풍은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그의 뒤를 따르던 가동에게 눈을 깜빡였다.

고향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함께 군대에 지원했었다. 몸놀림이 뛰어났던 가동은 초왕의 부하로 발탁되어 호위무사가, 사장풍은 맨 밑바닥부터 한 단계씩 올라와 임안성의 아홉 개 성문을 감독하는 구문제독이 되었다.

묵용감이 성문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영구는 그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 뒤를 따랐다. 사장풍은 가동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동이 소맷단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왕비 마마께서 지난 일에 대한 보답이라며 직접 수를 놓아 주신 주머니야, 받아.”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에 놀란 사장풍이 주머니를 요리조리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왕비 마마께서 직접 만드신 거야? 바느질 솜씨는 그저 그러시구나.”

가동이 눈을 번뜩였다.

“감사한 줄 알아. 왕야께도 안 드린 걸 너한테 먼저 주신 거니까. 이거 만드신다고 손가락을 다 찔리셨다고.”

“정말? 그렇게 힘들게 만드신 거라니.”

사장풍은 주머니를 허리에 걸고 손으로 가볍게 튕기며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드려. 정말 재미있는 분이라니까. 은자를 주셨다면 전혀 신기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손수 수를 놓아 주실 줄이야. 이 안에 담긴 마음은 말할 것도 없겠어. 앞으로 왕비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시거든 나한테 말만 해.”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일은 무슨 일. 왕야께서 빈틈없이 지켜 주시니 앞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걸.”

사장풍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예전에는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싫어하셨잖아. 지금은 왜 저리 바뀌신 건데? 반하기라도 하신 거야? 그건 아닐 텐데. 그렇게 자그마한데 왕야께서 마음에 차시겠어?”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여동생 삼아 앞으로 잘 보살펴 주시겠다고 하셨거든. 백 승상에게 원한이 있으시니까 그자가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해 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

“그래?”

사장풍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왕비 마마는 백 승상의 따님이잖아? 아버지가 딸을 싫어할 리가?”

“말하자면 끝도 없어. 몇 번이나 친위병을 이끌고 전투태세를 갖추신 것도 모자라서 황제 폐하 앞에서도 소란을 피우셨을 정도라니까. 너도 들었지? 친위병을 잔뜩 끌고 백 승상의 저택에 가신 일 말이야. 그것도 다 왕비 마마를 위해서 그러신 거라고.”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왕야가 병사들을 이끌고 백 승상의 저택에 쳐들어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두 분이 맞붙으셨어?”

가동이 말했다.

“아휴, 백 승상은 우리 왕야의 적수도 아니지. 그자가 감히 왕야를 공격이나 할 수 있겠냐?”

묵용감은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바라보다 사장풍의 허리춤에 걸린 주머니를 발견했다. 자신에게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장풍에게 주려고 만들었다? 그날 가동을 찾아온 건 사장풍에게 주머니를 전해 달라 부탁을 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밀려왔다. 이렇게 되면 가동과의 관계는 별로 의심할 필요 없었다. 사장풍에게까지 주머니를 주었으니 가동과는 별일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백천범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사장풍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은 도움만 받아도 갑절로 갚으려 하는 백천범이 자신을 구해 준 사장풍에게 마음을 다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란 그가 사장풍을 유심히 관찰했다.

잘생긴 청년이었다. 큰 키에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개가 사람을 압도할 정도였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구문제독의 자리에 올라 명성까지 얻었으니 누구보다 미래가 밝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생각할수록 조바심이 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괜찮은 자란 말인가? 부리부리한 눈을 보니 별로 영리해 보이진 않았다. 큰 키는 조금 뻣뻣해 보였다.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개? 동월국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초왕인 자신보다 더 뛰어난 기개를 가진 자는 없었다. 군신이라는 명성은 무수히 많은 전쟁과 맞바꾼 칭호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일개 구문제독이 뭐라고, 초왕의 명성과 비할 수나 있단 말인가?

그는 친왕 중 으뜸이자 황제마저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이 정도 명예는 천하에서 오직 그만이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기백이 넘치는 그를 어린 계집아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자신은 그야말로 최고의 신랑감이 틀림없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 답답해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사장풍이 말을 건네려 했지만, 묵용감은 차갑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재빨리 말에 오르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사장풍이 가동을 붙잡으며 물었다.

“왕야께서 왜 그러시지? 내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던 건가?”

가동이 웃으며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럴 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 요즘 들어 심기가 불편하신지 조금 변덕을 부리시더라고. 왕비 마마마저도 늘 꾸중을 들으시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말을 마친 가동은 말에 올라타 전력을 다해 묵용감을 뒤쫓았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장풍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변덕이 심한 분이랑 지내시다니, 왕비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시겠군.”

* * *

분명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는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학평관에게 왕비의 소식부터 물었다.

“왕비는 오지 않은 것이냐?”

학평관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사람을 보내 곧장 모셔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손을 내젓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그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오늘은 밥도 먹으러 오지 않는 것이냐?”

“아마 오실 것입니다. 소인이 어젯밤 왕비 마마께서 기홍 아가씨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새로운 요리를 맛보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잠시 뒤면 오실 듯합니다.”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몇 걸음 가지 않아 또다시 입을 열었다.

“물을 준비해 두어라. 목욕을 해야겠다.”

“예,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곧장 씻으실 걸 알고 미리 물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소인이 가서 더 빨리 준비를 끝내라고 분부하겠습니다.”

잽싸게 그의 곁을 벗어난 학평관은 녹하가 아닌 차씨를 찾아 남월각에 가서 왕비 마마를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왕야의 표정을 보니 사달이 나기 전에 왕비를 불러 노여움을 풀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목욕을 마친 묵용감은 정원에서 제기차기를 하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를 발견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반짝이는 눈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제기를 차고 있었다.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몸을 휘날리는 게 참 예뻐 보였다.

계속 바라보던 묵용감의 표정에 점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가 발끝으로 돌멩이 하나를 치자 그녀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당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금방 범인을 알아챈 백천범이 작은 손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왕야, 왜 방해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잘하고 있었는데요!”

백천범이 자신을 밀치자 묵용감은 온몸에 모공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방금 목욕을 끝낸 데다 뜨거운 햇빛 아래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어쨌든 기분이 한껏 상쾌했으니 누군가에게 밀쳐져 비틀거린다 해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피하는 자세를 취하며 크게 하하 웃었고, 웃는 그의 모습에 백천범도 더 거리낌 없이 대했다. 그녀가 주먹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막자 여인과는 싸우지 않는 묵용감이 자연스레 도망치기 시작했다.

결국 저택 안의 모든 사람이 어린 왕비에게 쫓겨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초왕의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학평관도 가느다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고서야 어찌 저럴 수가……?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보고 또 보았다. 저 사람이 어려서부터 모셔 왔던 자신의 주인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그 군신이 맞단 말인가?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던 초왕이 어린 왕비와 함께 있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의 뒤를 쫓던 병아리 한 마리도 조급한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곧장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백천범은 속도를 줄이지 못해 그대로 묵용감과 부딪혔다. 그가 재빨리 두 팔을 펼쳐 그녀를 안았고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에 땀이 흐르도록 뛰다니, 어서 가서 씻고 좀 쉬어야겠소.”

백천범이 그의 가슴을 짚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소매를 들어 땀을 닦으려 하자 묵용감이 곧바로 꾸짖었다.

“어느 아가씨가 이렇게 땀을 닦는단 말이오? 칠칠치 못하게.”

그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더니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턱을 받치고 꼼꼼하게 땀을 닦아 주었다.

백천범이 게으른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왕야께서 제 땀을 닦아 주신 날을 잊지 않고 평생 기억할게요. 큰오빠처럼 제 머리를 빗겨 주신 것도요.”

묵용감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머리를 빗겨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빗겨 주셨잖아요. 왕야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 왕야께서도 땀이 나시는데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말을 하자마자 그녀가 또다시 소매를 들어 올렸다. 묵용감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왕비는 손수건도 없소?”

백천범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급히 나오느라 챙기는 걸 깜빡했습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왕비가 잊었다고 시녀들도 잊은 것이오? 이따 학평관에게 제대로 교육 좀 시키라 해야겠군.”

“아이참, 시녀들 잘못이 아니에요. 안 그래도 챙겨 줬는데 제가 깜빡 잊은 것뿐이에요.”

그녀가 그의 손에 있던 손수건을 뺏어 들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이걸로 닦아 드릴게요.”

묵용감이 헛기침을 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천범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헛기침 같은 게 자주 나왔지만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 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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