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백천범과 묵용감의 사이가 또 한층 가까워진 듯했다. 백천범은 늘 회림각으로 달려갔고, 묵용감도 종종 후원으로 가서 그녀를 보곤 했다.
그가 남월각을 찾아갔을 때, 백천범은 수를 놓고 있었다.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는 그를 위해 놓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 뒤로 다가갔다. 온정신을 집중해서 수를 놓느라 그녀는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실수로 손가락을 찔려 짧게 탄식을 내뱉고 상처를 살펴보려는 찰나, 묵용감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가락을 낚아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였다.
“…….”
“…….”
백천범이 말했다.
“하하, 왕야… 전 괜찮아요.”
묵용감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그래, 괜찮으면 다행이오. 하던 것 마저 하시오. 나는 다른 곳을 좀 둘러볼 테니.”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온 그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허겁지겁 달린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후원을 거의 찾은 적 없던 그의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좀 더 앞으로 다가가니 청도각聽濤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빈 처소가 나타났다. 그제야 그는 이곳이 후원에서 가장 외딴 곳에 지어진 처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건물을 지은 직후에 와 본 뒤로 그동안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아 그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묵용감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순간에 이렇게 멀리 와 버렸다니. 심장에 손을 대 보니 그리 빨리 뛴 것 같지도 않았다. 방금 전 일로 스스로도 놀란 나머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이 행동이 너무 경솔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깊게 고민도 하지 않고 행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뭐 대단할 것도 없었다. 여동생을 지켜보다가 바늘에 찔린 손을 대신 봐 준 게 다였으니 말이다. 놀랄 일도 아니었고 놀라서도 안 될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회림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남월각을 지나칠 땐 애써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회림각으로 오니 그의 방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백천범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새 자신을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기홍에게 물었다.
“언니, 사부님 방에 안 계세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의 실망감이 극에 달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 가동을 찾고 있었다니. 그는 안 그래도 둘의 사이가 계속 신경 쓰였다. 자신이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도 아닌데, 이럴 거면 아예 당당히 밝힐 것이지…….
말로는 늘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하니 그 또한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해 놓고 이렇게 항상 붙어 있는 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기홍이 말했다.
“왕야께서 처소를 비우실 땐 가동 무사님도 안 계실 때가 많습니다. 보통 저택 안에서는 왕야 홀로 다니실 때도 많거든요. 영구 무사님한테 한 번 물어보시어요.”
“영구 무사님은 검술 수련 중이십니다. 영구 무사님은 누가 옆에서 지켜보는 걸 싫어해요.”
백천범은 조금 답답한 듯 발로 바닥을 몇 차례 누르며 말했다.
“사부님이 안 계시니 이만 가 볼게요.”
기홍이 말했다.
“왕비 마마, 여기서 식사를 들고 가시지요. 오늘 저녁에 왕비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생선구이를 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기홍을 껴안고 흔들거리며 말했다.
“우와, 역시 언니가 제일 좋아요!”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설마 제가 기르던 물고기는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죠.”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도 참, 마마께서 기르시는 송사리는 젓가락보다도 얇으니 요리를 했다간 잇새에 다 끼고 말 것입니다.”
성격 급한 백천범은 말이 나온 김에 항아리로 뛰어가 물고기 먹이를 주었다. 실수로 바닥에 먹이를 흘리자 노랑이가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쪼아 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노랑이를 꾸짖었다.
“이 먹보, 물고기 밥까지 먹다니! 배탈 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닭이 배탈이 난다고 상상하니 묵용감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결국 벽에서 떨어져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방금 수를 놓고 있던 것이 아니오?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오?”
그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사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솔직한 그녀의 말에 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가동은 찾아서 무엇 하려고? 무술을 연습하려 했소?”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볼일이 좀 있어서요.”
볼일이 있다……. 자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이내 뒷짐을 지고 서재로 향했다.
“녹하에게 먹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기홍이 서둘러 대답했다.
“왕야께 말씀드린다는 것이 깜빡 잊었습니다. 녹하는 오늘 휴가를 내고 잠시 외출하였습니다.”
그때, 백천범이 그의 뒤를 따라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왕야, 제가 먹을 갈아 드려도 될까요?”
“할 수 있겠소?”
“해 본 적은 없지만 본 적은 있으니 문제없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보시오. 손에 묻지 않게 조심하고.”
그의 서재에는 각종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서진書鎭부터 벼루, 붓, 화선지까지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만든 최상품이었다. 옥으로 만들어진 붓꽂이마저 그 정교함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평소 묵용감의 서재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백천범은 서재에 온 김에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을 구경했다.
묵용감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종이를 펼친 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들어 남아 있던 먹을 묻힌 뒤 글자를 써 내려갔다.
서재를 둘러보던 백천범은 책꽂이 앞에 서서 책 몇 권을 꺼내 들고 한 번씩 훑어보았다. 내용이 너무 어렵자 그녀가 다시 책을 꽂아 넣으며 물었다.
“왕야, 화본話本은 없는지요?”
묵용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어떤 화본을 읽고 싶은 것이오?”
백천범은 잠시 고민한 뒤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보통 화본으로 연극도 하니까요. 예전에 큰언니한테 여러 권 있었는데, 저는 못 보게 했거든요. 둘째 오빠한테도 있었는데 제가 두 권 정도 몰래 가져가서 엄청 화가 났었어요.”
“왕비를 혼내진 않았소?”
“죽어도 인정을 안 했더니 별수 없었나 봐요.”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저에게 못되게 굴었으니 그런 거 몇 개로 보상받은 셈 쳤지요.”
묵용감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던 그녀의 습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먹을 갈러 온 것이오, 책을 빌리러 온 것이오?”
백천범은 혀를 내밀어 보이며 그의 옆으로 가 얌전히 먹을 갈았다. 역시 좋은 먹이라 그런지 부드럽게 갈리며 아래쪽에서 매끈한 먹물이 배어 나왔다. 먹의 위쪽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은은한 향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먹 냄새가 아주 좋습니다. 왕야한테서 늘 좋은 냄새가 났었는데, 이 먹 냄새가 밴 것이었군요.”
그녀는 말을 내뱉으며 점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꼭 응석을 부리는 강아지 같이 그의 어깨 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가슴에 충격을 받은 묵용감이 심장이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잠시 넋을 잃었다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꾸짖었다.
“먹을 갈지 않을 거면 나가시오. 괜히 더 성가시게 하지 말고.”
백천범은 그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의 변덕스러운 성질 때문에 놀라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그의 성격을 반드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묵용감은 요즘 들어 자신의 감정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 끝에는 늘 백천범이 있었다. 그녀 때문에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형제애나 부모의 사랑 따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다.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그를 따르는 하인들뿐이었다. 황실에서 사는 유모나 내관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한 성품을 가졌기에 그에게 살갑게 굴진 않았다.
사실 묵용감만이 겪는 일은 아니었다. 황실에 사는 남자든 여자든 모두 그렇게 지내 왔다.
황실 귀족의 감정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더 단조로웠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너무 오래 억누르다 보니 어떤 일 때문에 특정 감정이 솟아오르면 그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런 그에게 친여동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여동생이 생겼다. 아껴 주기로 결심한 뒤 그녀를 예뻐하고 진심으로 보살펴 주다 보니 정말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미건조했던 그의 삶에 한 줄기 빛처럼 따스함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때는 선선한 바람처럼 그의 근심을 날려 주었고, 어떤 때는 몸에 좋은 보약처럼 정신을 차리고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 덕분에 자주 웃게 되고, 바라는 것 또한 생겼다는 걸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희망하는 건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백천범은 가는 물줄기처럼 서로 관심을 주고 함께 돕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저택을 떠날 때 혹은 새로운 사내에게 시집을 갈 때 이 상황을 깔끔하게 끝내야 했다. 지금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속도를 조금 늦출 필요가 있었다.
특히 매일 조급해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좋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보기 위해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업무가 많아 처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둘의 관계에 잠시 쉼표를 찍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조회를 마친 뒤 천천히 이곳저곳 순찰을 돌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말을 몰고 거닐다 보니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다. 문지기가 그를 알아보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왕야.”
묵용감은 인사를 받고 말에서 내린 뒤 높다란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파손된 곳은 없는지, 보수가 필요하진 않은지 등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타고 그에게 달려왔다. 말에서 내린 그가 곧장 묵용감에게 예를 갖췄다.
“왕야께서 왕림하신 걸 몰라뵙고 영접을 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왕야.”
묵용감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문제독 사장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