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이강이 백천범을 붙잡은 것은 누나 대신 자신이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백 승상이 또다시 그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이 금수만도 못한 자식, 어서 초왕비를 데려오지 못할까!”
이씨 부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흐느꼈다.
“강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서 왕비가 있는 곳을 말해 다오!”
이강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누나, 전 그저 누나 대신 복수를 해 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이씨 부인이 울음을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흐느꼈다.
“복수는 무슨 복수! 오늘 이 일이 더 견디기 어렵구나. 예전 일은 다 지나갔으니 우리 앞으로는 서로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자, 강아.”
눈물을 흘려 눈이 빨개진 누이의 얼굴과 잔뜩 성이 난 매형의 모습, 집을 둘러싼 수많은 친위병들을 보고 이강은 하는 수 없이 백천범을 숨겨 놓은 곳을 털어놓았다.
이강이 말한 장소에 도착한 묵용감은 병사들에게 잠시 대기하라 명한 뒤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천박한 이강은 어린 여자아이를 감히 기방에 가둬 두었다.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숨을 죽이자 흡사 빈집처럼 고요했다. 묵용감은 조용히 다락방으로 향했다. 분홍색 발을 걷어 올리니 커다란 붉은 침대에 누군가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천범이 틀림없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갔다. 하, 어린 계집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잠이 오다니.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몸이 움직이자 단번에 눈을 뜬 백천범은 그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몽롱한 정신에도 두 눈이 초승달이 될 정도로 환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입을 옹알거렸다.
“왕야.”
그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들 수 있단 말이오? 누구한테 팔려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가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구해 주러 오실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요.”
얼토당토않는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더 이상 모질게 말하지 못했다.
“초왕비만 아니었으면 본왕이 아니라 망령이 왔을 것이오.”
그녀가 가느다란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응석을 부렸다.
“왕야, 앞으로 왕야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게요. 제 본분도 잘 지키면서 지낼 테니까 저 좀 데려가 주시어요, 네?”
그녀 앞에서 묵용감은 그저 순한 호랑이에 불과했기에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 듯 입을 열었다.
“분명 왕비 입으로 한 말이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아무리 기다려도 구해 주러 오지 않을 것이오. 그 참에 새로운 초왕비를 맞이하면 그만이니.”
잘못을 인정한 백천범은 그의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백천범은 많은 수의 친위병들을 보고 그제야 얼마나 큰 소란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묵용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왕야, 저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이들을 이끄시고……. 정말 송구합니다.”
“왕비 때문이 아니오.”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원래 본왕이 이 정도 사람이오.”
입구 앞에는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를 가마 안에 앉히자 묵용감은 비어 있는 자신의 품이 순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회림각으로 돌아온 묵용감은 기홍과 녹하에게 백천범의 몸을 살펴보라 지시했다. 큰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가 학평관에게 양려낭을 데려오라 분부했다.
백천범은 이강의 두 하인과 싸움을 벌일 때 몇 대 맞긴 했지만 견딜 만한 정도였다. 다만 피부가 연약했던 탓에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홍이 사실대로 고하자 묵용감이 냉소를 지었다.
“털끝 하나만 건드려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법인데, 내 사람이 다쳤으니 이 빚을 어찌 갚게 한단 말이냐?”
쉽게 지난 과오를 잊는 성격이었던 백천범은 문 앞에 서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동에게 말을 걸었다.
“사부님, 새로 배운 초식을 써 봤더니 글쎄, 말도 마세요. 진짜 신통방통하더라고요. 두 사내가 멍하니 서서 절 잡지도 못하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그 둘 사이를 잽싸게 지나간 다음 앞으로 가서…….”
가동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녹하가 문발 옆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 묵용감의 말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그가 몇 차례 헛기침을 하며 태연한 척 말했다.
“왕비 마마, 대단하십니다. 이제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된 초식을 처음 선보인 백천범은 기분이 좋았는지 신이 나 몇 마디 덧붙였다. 그때, 묵용감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누가 그리 시끄럽게 떠드느냐?”
백천범은 혀를 슬쩍 깨물고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 묵용감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아주 거리낌이 없소.”
백천범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입을 열었다.
“유모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귀신도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저와 사부님은 결백한데 왜 서로 피해야 하는지요? 겨우 오해 하나로 사부님을 모른 척해야 하나요?”
저 당당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조만간 묵용감을 옹졸한 사람이라고 몰아세울 기세였다.
따져 보니 그 또한 조금 이상했다. 어젯밤에는 당장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밑도 끝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다 정말 그녀를 시집보내야 할 날이 온다면… 그 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양려낭이 방 안으로 끌려왔다. 줄곧 울고 있었는지 두 눈이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그녀는 백천범을 보고 또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소인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그 입 다물라!”
묵용감의 호통에 깜짝 놀란 그녀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백천범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양려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묵용감이 차갑게 말했다.
“네가 방자하게 꾸몄던 계략이 무엇인지 낱낱이 고하거라.”
공포에 휩싸이자 양려낭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왕야, 소인이 어찌 감히 계략을 짤 수 있단 말입니까? 소인을 의심하시다니… 억울하옵니다. 왕비 마마께 대한 소인의 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이옵니다.”
“그래요?”
백천범이 불쑥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왜 저를 정원으로 유인한 것인지요? 그리고 제가 왜 그렇게 어지러웠을까요? 제가 왕야께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저 언니에게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죠.
오늘 언니가 집으로 돌아간다기에 마지막까지 제 마음을 다하고 싶었어요. 그런 저에게 악한 마음은 품지 말았어야죠.”
“왕비 마마, 근거도 없이 그리 모함을 하시다니요!”
양려낭이 서둘러 해명했다.
“어젯밤 왕비 마마를 찾으러 정원에 가려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런 일이라 함은 네가 본왕의 침대에 기어오르려 한 짓 말이냐?”
양려낭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묵용감이 이런 말까지 꺼낼 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치심에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왕야의 침대에 오르려 했다니요?”
“…….”
묵용감은 괜스레 외도 현장을 들킨 것처럼 난처해했다.
그가 백천범에게 해명했다.
“저 자가 파렴치하게 군 것이지 본왕은 눈길도 주지 않았소. 이런 여인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는다 한들 본왕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오.”
양려낭은 분한 마음에 피가 솟구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사실을 밝히려고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백천범이 말했다.
“아하, 려낭 언니는 일석이조를 노렸던 거였네요. 우선 저와 사부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왕야를 유혹하러 갔었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두 가지 다 실패한 거고요.
왕야께서 언니를 좋아하셨다면 언니를 내쫓지도 않으셨겠죠. 그래서 제가 죄책감을 느낀 거였고요. 그런데 언니는 그런 제 죄책감을 이용했어요.”
백천범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와 사부님의 일도 언니가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왕야께서 정말 사부님과 제가 정을 나누는 사이라면 기꺼이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왕야께서는 절 여동생으로 삼아 진심으로 아껴 주셔요. 그런 일로는 절대 절 책망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렇죠, 왕야?”
고개를 돌린 그녀가 눈이 반짝거렸다. 믿음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요점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천범을 여동생이라고 생각해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만약 그녀에게 좋아하는 사내가 생긴다면 혼사까지 지원해 주는 게 마땅했다. 물론 인품이 괜찮은 사람인지 미리 그의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자가 가동이라면 믿을 만은 하지만 신분이 조금 낮은 게 흠이었다. 그저 한낱 호위무사에 불과했으니 좀 더 출세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고향 친구인 사장풍은 구문제독 자리에 오른 지가 언젠데…….
아무 대답 없는 묵용감의 모습에 백천범이 다시 한 번 더 그를 일깨웠다.
“그렇죠, 왕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러하오.”
그는 다시 매서운 말투로 양려낭에게 말했다.
“본왕이 외도라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나 본데, 아쉽게도 큰 오산이다. 나에게 외도는 아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그의 말에 양려낭과 학평관, 기홍과 녹하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양려낭은 머리가 똑똑한 편은 아니었다. 모든 계략이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표적이 된 이들은 금방 그녀의 술수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밤 백천범과 가동의 일은 양려낭이 꾸민 짓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백천범은 양려낭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악한 마음씨에는 약도 없었다.
백천범은 양려낭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지 않았고, 그저 묵용감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묵용감 또한 백천범의 마음이 편치 않을까 봐 따로 알리지 않았다.
그는 양려낭을 기방으로 보냈다. 권력을 위해 몸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니 그곳만큼 잘 어울리는 곳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이야말로 그녀가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