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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0)화 (79/1,192)

제80화

양려낭의 말에 깜짝 놀란 이강이 백천범의 모자를 벗긴 뒤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백천범을 본 적은 없었지만 누이에게 종종 그녀의 얘길 들었던 터라 대략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상황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네가 초왕비라고?”

백천범이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내가 바로 초왕비다. 그러니 어서 손을 놓거라! 안 그랬다간 왕야께 이 일을 고해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강이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정말 초왕비가 맞으면 때마침 아주 잘 만났구나. 이 몸이 안 그래도 성질이 나서 죽겠던 참인데 말이지.

초왕비, 네가 제 발로 황천길을 찾아왔구나. 역시 세상은 참으로 좁다니까. 우리 누이에게 절을 시키더니 이렇게 금방 내 손아귀에 잡힐 줄이야. 내가 널 어찌 할 것 같으냐?”

이강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 백천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를 입으면 그 해가 네 누이에게 갈 것이라고 초왕야께서 말씀하셨으니 스스로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어림없는 소리!”

이강이 마구 욕을 퍼부었다.

“이 몸이 다른 이들에게 뭐라 불리는지 아느냐?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여 마왕이라고 불리지. 그런 내가 초왕을 무서워하면 쓰나? 오늘 내가 누이의 원수를 갚아 줘야겠다. 당장 저 애를 끌고 오너라.”

이강에게 이제 양려낭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두 하인에게 어서 백천범을 잡아오라고 분부했다.

양려낭이 뒤에서 소리쳤다.

“뭣들 하는 짓이오? 당장 왕비 마마를 풀어 주시오, 당장! 왕비 마마를 당장…….”

그들 뒤를 쫓아 대문까지 뛰어 온 그녀는 가마가 점점 더 멀어지자 그제야 목소리를 낮췄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마왕의 손에 잡혔으니 초왕비께서 직접 살길을 찾아보시지요. 과연 왕비 마마의 몸이 닳고 닳은 뒤에도 초왕야께서 왕비를 원하시는지 제가 한번 봐야겠습니다.”

* * *

한편 학평관은 묵용감이 조정에서 돌아올 때쯤 백천범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인부들을 시켜 왕비를 찾아보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왕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묵용감이 저택에 도착하자 학평관이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묵용감은 어제 일로 다른 이들을 볼 낯이 없어 어디 숨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마음도 아직 편치 않았기에 당장 그녀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큰 애를 잃어버릴 일은 없으니 계속 찾다 보면 어디 있겠지.”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도 백천범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묵용감은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느꼈다. 아무리 거니는 걸 좋아한다지만 점심 식사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다니. 그녀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건 묵용감 또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학평관은 문제를 발견하고 급히 묵용감에게 달려갔다.

“왕야, 오늘 아침 양려낭이 저택을 떠났다고 하옵니다. 헌데 소인은 집까지 동행할 인부를 보낸 적이 없사온데 대문 머슴 말이 웬 파란 모자를 쓴 마른 머슴이 양려낭과 함께 저택을 나갔다고 합니다.”

학평관의 말에 묵용감은 곧바로 수저를 내려놓고 식탁을 치며 소리쳤다.

“당장 말을 준비하라!”

묵용감은 양려낭의 악한 심보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 제 발로 묵용감을 찾아와 그런 짓까지 벌인 여인이었다. 요즘 일어난 일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그녀를 내쫓았을 텐데! 며칠 더 머무르게 해 주었더니 이런 성가신 일들을 저지를 줄이야!

그가 가동을 불렀다.

“당장 양려낭이 사는 곳을 알아 오거라!”

학평관이 거의 들지도 않은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 이 일은 소인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왕야께서는 식사를 드시지요. 금방 왕비 마마를 모셔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날 선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손에 맡겨 놓으니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질 않았더냐. 네가 다시 데려오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학평관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막 대문을 나서려는 가동이 양려낭과 마주쳤다. 양려낭은 두 눈이 새빨개진 채로 왕야를 만나야 한다고 울먹였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가동은 곧장 그녀를 회림각으로 데려갔다. 마침 중문에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섰다. 양려낭이 묵용감 앞으로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왕야, 어서 왕비 마마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 악질이 왕비 마마를 데려갔습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무슨 악질을 말하는 것이냐?”

양려낭이 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악질의 정체는 소인도 잘 모르옵니다. 그저 길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어찌 생겼느냐?”

“그것이… 키가 좀 크고 얼굴은 까만 편입니다. 눈은 조금 작고 코가 큽니다. 그리고 입술이 두툼하게 생겼습니다.”

양려낭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번복했다.

“눈이 작은 편은 아닌 듯합니다. 코는 크고 입술은…….”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을 듣기 싫었던 묵용감이 말을 끊었다.

“그자가 왕비를 어디로 데려갔다는 것이냐?”

“그건 소인도 모르옵니다!”

묵용감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강이 한 짓이냐?”

양려낭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강이 누구인지요?”

“지난번 널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던 그자 말이다.”

양려낭이 눈을 잔뜩 찡그리고 한참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자가 맞는 것 같사옵니다.”

묵용감이 입술을 깨물며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매섭게 그녀의 가슴팍을 걷어차고는 학평관에게 분부했다.

“본왕이 돌아와서 다시 처리할 것이니 이 자를 잘 감시하거라!”

두려움에 말도 할 수 없던 그녀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말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에 올라타자마자 고삐를 쥔 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학평관은 묵용감의 발이 날아들 거란 걸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양려낭 이 여인은 자신이 감히 초왕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 또한 예의를 갖추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장 이 여인을 가두고 잘 지켜보아라.”

양려낭은 자신의 의도가 어디에서 들통났는지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그녀가 작게 흐느꼈다.

“안타까운 마음에 소식을 전하러 왔을 뿐인데, 왕야께서 제게 이런 대우를 하시다니요.”

학평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짠다고 왕야께서 모르실 줄 알았나? 왕야를 바보로 여겼군.”

양려낭이 억울해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그 사람을 몰랐을 뿐입니다.”

* * *

묵용감은 말을 몰고 곧장 백 승상의 집으로 향했다. 초왕이 말을 타고 질주해 오는 모습에 대문 앞을 지키던 머슴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초, 초왕이 왔습니다! 초왕이 왔습니다!”

식사 중이던 백 승상은 머슴의 말에 깜짝 놀라 젓가락까지 떨어뜨렸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이미 초왕이 말을 타고 대문을 넘은 뒤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정원까지 질주했고, 칼을 뽑아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두 동강 내 버렸다. 격노한 그의 칼 놀림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덜덜 떨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씨 부인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초왕야,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검을 뽑아 들다니요!”

백 승상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밥을 먹는 와중에 식탁을 둘로 쪼개다니! 이보다 모욕적인 일이 또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떨리는 몸으로 공손하게 예를 갖춰 말했다.

“왕야,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곧장 말씀해 주십시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묵용감은 그제야 말에서 내려서는 칼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공명정대한 사람은 말을 돌려 하는 법이 없지. 지난번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왕비에게 해가 되는 일은 곧 백 승상과 부인에게도 해가 되는 일이라고.

헌데 지금 이강이 왕비를 잡아갔소. 이 일을 내가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만약 왕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났다간, 당신들을 전부 다 산 채로 매장시킬 것이오!”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화가 난 백 승상이 이씨 부인의 뺨을 내려쳤다.

“죽고 싶거든 나가서 혼자 죽으시오! 괜한 사람 휘말리게 하지 말고! 사리 분별도 못 하는 망할 여편네 같으니라고. 그렇게 큰일을 저질러 놓고 반성은커녕 그딴 잔머리나 굴리다니. 왜 사는 것이오?”

백 승상에게 손찌검을 당한 이씨 부인은 한쪽 볼을 감싸 쥔 채 큰소리로 통곡했다.

“승상, 저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억울합니다!”

백 승상이 소리쳤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사람을 보내 찾지 않고! 그 짐승 같은 놈이 자주 가는 곳을 모두 샅샅이 찾아서 초왕비를 반드시 찾아내거라.”

저택 관리는 서둘러 이강을 찾을 인부들을 파견했다. 그간 이강을 위해 수도 없이 많은 뒤치다꺼리를 해 준 그였으니 이강의 행방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강을 찾을 인부들이 떠나자 영구가 친위병을 이끌고 백 승상의 저택을 포위했다.

저택 안에 있던 백 승상의 부인 몇 명과 공자, 아가씨들은 이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묵용감이 거리낌 없이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얼굴을 한껏 굳힌 그는 화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위엄 있어 보였다.

냉기 어린 그의 시선은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고,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었다. 저택 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다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차를 내오던 시녀가 어찌나 손을 떠는지 찻잔을 덮는 뚜껑이 찻잔 테두리에 부딪혀 쟁쟁거렸다. 시녀가 앞으로 다가오자 묵용감이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힘이 풀려 버린 시녀가 쟁반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차를 다 엎지르고 말았다.

시녀가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왕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의미를 알아차린 백 승상이 서둘러 시녀를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부들이 이강을 끌고 왔다.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누이의 모습에 조금은 이상함을 느낀 듯 상황을 살폈다. 누이의 뺨이 빨갛게 부어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소리를 질렀다.

“누, 누가 감히 누님께 이런 짓을 한 것이냐?”

백 승상이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도 똑같이 뺨을 내려쳤다.

“내가 그리했다. 어찌할 텐가?”

매형을 무서워했던 이강은 얼이 빠진 채 얼굴을 감쌌다. 그제야 의자에 앉아 있는 초왕을 발견한 그는 잔뜩 성이 난 초왕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초왕이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이강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매형은 무려 승상이었고, 조카는 귀비였다. 어차피 엇비슷한 지위였으니 불리할 게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누이가 불리한 위치에 있는 듯했다.

“이강.”

묵용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왕비는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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