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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9)화 (78/1,192)

제79화

이튿날 아침,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난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가동을 대하는 태도도 평소와 똑같았다.

그가 이럴수록 하인들의 마음은 더 불안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백천범에 대한 그의 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이런 모습이 영 찝찝했던 것이다.

가동의 옆을 지나치던 녹하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동은 어깨가 축 처진 채 억울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 뒤를 뒤따르며 작게 속삭였다.

“녹하 아가씨, 절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녹하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네요.”

“하늘에 대고 맹세도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왕비 마마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오직 당신뿐인걸요.”

다급해진 나머지 가동이 마음속에 있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깜짝 놀란 녹하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를 마구 때리며 말했다.

“이런 호색가를 보았나! 욕심이 아주 끝도 없구나? 잘 되고 있던 일이 다 깨지니까 이제 나한테 똥물을 뒤집어씌우려고? 난 그런 거 절대 용납 못 해!”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만큼이나 손도 매웠다. 여기에 화가 난 감정까지 가득 담아 있는 힘껏 가동에게 손찌검을 했다.

가동은 간직했던 말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넋이 나간 채 얼굴이 빨개지도록 맞고만 있었다. 피하지도 않고 그녀가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고 있다 보니 어찌나 아픈지 결국 가동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녹하야. 너에게만은 진심이야. 그동안 정말 눈치 못 챘어?”

가동에게 팔이 붙잡혀도 녹하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하, 눈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눈치는 무슨 눈치?”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데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가동이 재빨리 녹하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둘러 입구 앞을 지켰다. 묵용감이 방에서 나와 담담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아닙니다. 소인이 그저 녹하 아가씨와 몇 마디 나눈 것뿐입니다.”

가동이 힐끗 녹하를 바라보았지만 녹하는 냉정한 표정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묵용감이 갑작스레 웃으며 말했다.

“가동이가 여복이 많구나.”

그의 말에 녹하가 발끈했다.

“왕야, 소인은 가동과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묵용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가동은 고개만 숙인 채 자리를 지켰다. 묵용감도 아무 말 없이 아침 식사를 하러 옆방으로 향했다.

묵용감은 아침밥을 먹다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학평관에게 물었다.

“양려낭은 내보냈느냐?”

학평관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제 그렇게 큰일을 겪었는데 어찌 양려낭까지 신경 쓸 수 있었을까! 그가 몸을 잔뜩 숙인 채 대답했다.

“왕야, 어제는 경황이 없어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소인이 오늘 바로 내보내겠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내리깔고 죽을 떠먹었다.

* * *

양려낭은 아침 일찍부터 남월각을 찾았다. 며칠간 낙성각에서 숨어 지내던 양려낭은 백천범이 함께 회림각에 가자고 찾아와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먼저 백천범을 찾아온 것이다.

양려낭이 백천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택을 떠나려 합니다.”

백천범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결정했다니 다행이네요. 계속 더 머무르다간 왕야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녀의 말이 가시처럼 마음을 찔렀지만 양려낭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왕비 마마께서 소인을 이곳에 들여보내 주신 데다가 늘 관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간 편안한 삶을 지냈으니 왕비 마마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생에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이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백천범은 양려낭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직접 데려왔는데 별 성과도 없었을 뿐더러 이 저택마저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백천범은 월향에게 은을 가져오라 일렀다.

한사코 거절하던 양려낭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마음씨가 따뜻한 분이십니다. 소인이 왕비 마마께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혹여…….”

백천범이 월향과 월규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편히 말씀하세요.”

양려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인은 박복한 사람인지라 앞으로 홀로 살아가야 하지만, 그나마 쉴 수 있는 집은 있으니 바느질이라도 하면서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악질이 또다시 찾아올까 무섭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소인은 너무 두렵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언니를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리고 그 악질이 정말 언니를 찾아오면 제가 처리해 줄게요!”

양려낭이 곧장 무릎을 꿇고 고했다.

“왕비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인, 영원히 왕비 마마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천범이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저 왕야의 이름을 대면서 겁을 주려는 것뿐이에요. 초왕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양려낭이 말했다.

“그런데 혹 학평관 어르신이 왕비 마마의 외출을 막으시면 어찌합니까? 괜스레 큰 소란이라도 일어나 왕야께서 아시는 날에는 제게 곤장까지 내리실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소인을 싫어하시는데, 그땐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더는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거야 간단하죠. 왕야께서 모르게 하면 되니까요.”

양려낭은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처음 왔을 때처럼 갈 때에도 조용히 떠나는 게 가장 좋을 듯싶습니다.”

* * *

사람을 따돌리는 재주가 뛰어난 백천범에게 월향과 월규를 따돌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백천범은 어린 머슴의 옷과 푸른 가죽으로 만들어진 모자를 써서 변장했다. 양려낭의 뒤를 따르는 어린 머슴인 척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대문을 지키던 머슴도 오늘 양려낭이 저택을 떠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말 않고 길을 내주었다.

무사히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불안감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마당에 도착한 뒤에야 한숨 돌린 뒤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백천범은 몰래 빠져나온 게 재미있어서 웃음이 났다. 게다가 어제 일로 조금 울적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금세 기분이 전환되었다. 하지만 양려낭의 웃음은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양려낭이 백천범을 이끌고 옆길로 꺾어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골목 깊은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 세워진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왕비 마마, 여기가 소인의 집입니다.”

방 하나가 딸린 아주 작은 집이었다. 양려낭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더니 백천범을 불렀다.

“왕비 마마, 잠시 들어오시어요. 소인이 차를 내오겠습니다.”

백천범이 흥미로운 듯 집을 꼼꼼히 살펴보며 말했다.

“잠깐만 있다 갈 테니 내올 필요 없어요. 이제 집도 알았으니 나중에 자주 놀러 올게요.”

양려낭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누추한 집에 놀러 오시면 왕비 마마께서 불편하실 거예요.”

“아니에요.”

집을 한 번 둘러본 백천범이 평상 위에 앉아 말했다.

“이렇게 온전한 나만의 집이 있다면 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요.”

마당에서 물을 끓이던 양려낭이 갑작스레 소리쳤다.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오는 것이오?”

백천범이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하인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양려낭을 보고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오호라, 양려낭이 돌아왔군? 우리 공자님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악질들이 집으로 들어오자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다른 사내가 집으로 들어왔다. 적지 않은 나이에 까무잡잡한 피부, 화려한 자색 장삼을 걸친 경망스러운 사내였다. 한눈에 보아도 악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외모였다.

백천범의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자가 여길?

그는 백천범도 이미 알고 있는 이씨 부인의 친동생, 이강이었다. 이강은 늦둥이로 태어나 애지중지 키워졌고, 백 승상 덕에 어부지리로 막강한 권력까지 얻었다.

그의 아버지인 이덕해는 오품 관리에서 정이품의 예부 시랑이 되었고 누이인 이연은 고명 부인, 조카는 귀비까지 되니 이강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굴기 시작했다. 결국 이강도 이씨 부인과 별반 차이 없는 부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강은 백천범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어리고 반반해 보이는 머슴이 방문 앞에 서 있자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나를 따르지 않는가 했더니, 이미 애인이 있었구나?”

양려낭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 더러운 입 닫으시오. 다 당신 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아시오?”

이강이 그녀를 향해 옹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부채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 이 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듯한데, 그만 날 따르지 그래? 네가 사라진 뒤로 이 몸이 얼마나 기다렸다고.”

백천범은 묵용감이 늘 하던 대로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봐, 당신! 좀 떨어지시오.”

이강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어정쩡한 말투는 또 뭐야? 대체 너는 남자냐, 여자냐? 이봐, 꼬맹이. 뒷일 감당 못 할 거면 주제 파악이나 하고 썩 꺼져.”

행패를 부리는 데 익숙했던 두 하인이 곧장 백천범의 주위를 둘러쌌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였으니 그의 안중에도 들지 못한 것이었다.

잔뜩 주위를 경계하던 백천범은 잽싸게 한 발짝 물러난 뒤 허리를 굽혀 곧장 초식을 해 보였다.

이강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무예를 하는 자였구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그가 두 하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람한 덩치를 가진 하인들은 이강을 따라다니며 함께 못된 짓을 저질러 왔기 때문에 사람을 때리는 건 기본이었다. 그들은 늘 그래 왔듯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백천범에게 다가갔다.

백천범이 오랫동안 수련한 무술도 나름 쓸모가 있었다. 힘은 한참 부족했지만 민첩한 몸으로 두 하인을 피해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반격을 하지 못하니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움직임이 쉽게 눈에 띄었다.

어쨌든 주인을 보호하는 하인들이었으니 그들의 실력 또한 꽤 뛰어났다. 몇 번 만에 백천범의 기술을 간파한 그들은 허점을 공략해 순식간에 몸을 돌려 그녀의 팔을 꺾고 제압했다.

양려낭이 급히 외쳤다.

“조심하시오, 그분은 초왕비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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