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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8)화 (77/1,192)

제78화

갑작스레 정신이 든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차갑게 그녀를 훑었다. 양려낭은 흠칫 놀랐지만 위축되지 않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왕야, 아프십니까?”

묵용감이 차갑게 말했다.

“나가시오.”

며칠간 보이지 않아 이미 떠난 줄 알았더니,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방 안까지 기어들어 온 것이다.

“왕야.”

양려낭이 돌연 그를 부르며 맞은편에 섰다. 상기된 그녀의 표정에서 두려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더니 허리를 묶은 끈을 풀기 시작했다. 옷이 살랑거리며 순식간에 두 갈래로 나뉘자 그녀의 선홍색 배꼽이 드러났다.

깜짝 놀란 묵용감은 잠시 상황을 주시했다. 그녀의 은밀한 모습에 매료된 게 아니라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이었다. 보아하니 의도가 너무나 뻔했다. 묵용감을 유혹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뒤에서 교활한 술수를 부리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던 묵용감은 그녀를 발로 넘어뜨린 뒤 큰소리로 가동을 불렀다.

“당장 이자를 끌어내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가동이 아닌 영구였다. 옷을 단정히 갖춰 입지 않은 양려낭의 모습에도 영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붙잡았다.

양려낭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 안은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구는 그저 묵용감이 내린 명에 따를 뿐,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지지 않았다. 아무리 가냘픈 모습으로 유혹한다 한들 영구의 마음은 절대 움직일 수 없었다.

양려낭의 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데 학평관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의 상황을 보고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보다 더 큰일이 벌어졌기에 곧바로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큰일 났습니다!”

묵용감은 속에서 또다시 천불이 났다. 안 그래도 양려낭의 일로 기분이 나쁜데 또 큰일이 났다니! 그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이 났다는 것이냐?”

학평관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것이… 왕비 마마와 가동이 정원에서 붙잡히셨습니다.”

“뭐라 하였느냐?”

묵용감은 더 이상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의 소매에 스친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왕비는 지금 어디 있느냐?”

붙잡히다니, 무엇을 하다 붙잡혔단 말인가? 그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고, 머릿속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의 안색에 겁을 먹은 학평관이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정원에 계십니다. 순찰을 돌던 친위병들이 함부로 압송을 할 수 없어 왕야께서 직접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묵용감이 도포 자락을 날리며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영구와 학평관도 서둘러 그를 뒤따랐고, 양려낭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여유롭게 옷을 갖춰 입고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 * *

마음이 조급했던 묵용감은 무술 공법까지 써 가면서 순식간에 정원에 도착했다. 어찌나 많은 횃불들이 있는지 꼭 대낮 같았다.

백천범을 보니 전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굳은 얼굴로 가동의 앞을 막아서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비라는 백천범의 신분 때문에 친위병들은 그저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왕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묵용감이 도착하자 친위병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가운데 길을 만들었다.

묵용감을 본 가동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 가동의 모습에 백천범이 매섭게 소리쳤다.

“일어나세요!”

가동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용감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신경 쓰이던 두 사람의 사이가 이 정도였다니.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갔다. 잘못된 짓을 저지르고 반성은커녕 이렇게 당당한 것은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뒷짐을 진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던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친위병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고했다.

“왕야, 야간 순찰을 돌다 인기척이 느껴져 자세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가동 호위무사와 왕비 마마께서 이곳에 계셨습니다.”

“둘이 무얼 하고 있었길래?”

“두 분이…….”

그가 난감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서로 안고 계셨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묵용감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고 곧장 그들에게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백천범을 힘껏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는 다리를 들어 올려 그녀 옆에 있던 가동을 있는 힘껏 내려 찼다. 가동은 그 충격에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망신, 망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백천범이 아무리 이름만 왕비라 할지라도 엄연히 자신과 혼사를 치른 몸이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지 늘 반성하는데,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나다니.

당장 가동을 죽여도 시원찮을 만큼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묵용감이 옆에 있던 친위병의 검을 뽑아 들고 칼끝을 가동에게 겨누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가동을 막아서며 말했다.

“왕야, 왕야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와 사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구 성을 내며 호통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함은 이자들이 모함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둘이 포옹을 하고 있었다는 게 사실인가?”

가동이 입을 열었다.

“왕야, 오해이십니다. 왕비 마마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셨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없으셔서 소인에게 잠시 기대신 것뿐입니다.”

묵용감의 칼끝이 여전히 가동을 향해 있었다.

“어째서 네놈에게 기대 쉬어야 했느냐? 정원에 이렇게 기댈 곳이 많은데. 나무에 기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냐?”

가동이 고개를 숙였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순간 비틀거리셔서 혹여 넘어지실까 봐 걱정이 되어 제 쪽으로 당긴 것입니다.”

그렇다 한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두 사람이 밀회를 가진 사실만으로도 이미 대역죄였다. 게다가 서로 껴안고 있는 걸 다른 이에게 들키기까지 했으니! 사실관계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는 없었다.

묵용감의 관자놀이가 더 심하게 지끈거렸다. 그가 손으로 통증이 오는 곳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들을 데려오너라. 본왕이 자세히 문초를 해야겠다.”

친위병들은 가동과 백천범을 회림각으로 압송했다.

* * *

방의 네 귀퉁이에 세워진 유리등이 모든 것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가동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고, 백천범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묵용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반성은 전혀 할 줄 모른단 말인가!

그는 당장에라도 그녀의 뺨을 호되게 내려치고 싶을 만큼 부아가 치밀었지만, 곱고 여린 그녀의 피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마음을 억눌렀다.

그가 주변을 물리고는 문과 창문까지 모두 잠갔다. 팔걸이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킨 그가 가동에게 말했다.

“본왕이 또 이 말을 해야겠구나. 정말 왕비가 좋거든, 내가 왕비를 폐할 테니 혼사를 치르거라.”

가동이 펄쩍 뛰며 말했다.

“왕야, 소인은 왕비 마마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이번만큼은 백천범도 깜짝 놀랐다. 그녀가 크고 까만 눈동자로 묵용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왕야, 저를 폐하실 것인가요? 이곳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해 주실 거라 하셨잖아요?”

묵용감이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소. 분수를 알고 본분을 지키면 이곳에서 계속 지내도 좋다고 했소. 하지만 지금 왕비를 보니 본분을 지키는 것 같진 않소. 그래도 지난날의 정을 생각해서 본왕이 살길은 마련해 주겠소.”

백천범이 말했다.

“본분을 지키지 않았던 적 없습니다. 전 앞으로도 이곳에서 계속 지내고 싶어요. 왕야께서 절 보기 싫으시면 남월각에서만 숨어 지낼게요.”

이곳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묵용감의 화가 좀 누그러졌다.

요즘 들어 그는 일희일비하는 일이 유독 많아진 듯했다. 그녀가 이곳에 남겠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가동을 따라가겠다고 하진 않으니 이곳에서 지내게 할 수밖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가동을 따라갈 것이오? 이곳에 남을 것이오? 저 애를 따라가겠다면 함께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이고,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소.”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 저와 가동 호위무사님은 사제지간일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왕야가 믿으시든 믿지 않으시든 저는 부끄러움 하나 없이 결백합니다.”

참 대단한 결백이었다. 초왕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지는 못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번 한 번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 처음 발각된 것을 참작해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가동에게는 벌로 채찍 서른 대를 내리니, 가서 받고 오너라.”

가동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명을 받았지만 백천범은 아니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벌을 내리시려면 분명한 죄명이 있어야 합니다.”

묵용감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래, 넘어가기로 해 놓고 왜 벌을 주려 하는가? 그리하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도리어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하지만 벌을 주지 않자니 그의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백천범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왕야, 화가 너무 많이 나시면 제 뺨을 있는 힘껏 때리셔도 좋아요.”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애의 벌을 대신 받으려는 것이오?”

“아닙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 벌을 받을 필요는 없지요. 그저 왕야께서 화를 내지 않으시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저를 때리셔서라도 화 좀 푸시어요.”

묵용감이 물었다.

“왜 내가 화를 내지 않길 바라는 것이오?”

“왜냐면 왕야는 제가 소중히 여기는 분이니까요. 비록 저는 왕야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저 백천범에게 왕야는 가족이거든요.”

묵용감이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더니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만 가시오. 너도 나가거라.”

백천범과 가동이 나간 뒤, 묵용감은 방 안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을 거닐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정원에 도착했다.

그는 백천범과 가동이 잡혔던 곳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멀리서 그를 뒤따르던 학평관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 돌아가자고 말씀을 올리고 싶었지만 감히 앞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에게 말을 걸었다간 가슴팍을 걷어차일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조용히 초왕의 뒤를 지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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