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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7)화 (76/1,192)

제77화

진지하게 세 번째 절을 올린 그녀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란 말도 잊지 않고 또박또박 외웠다.

묵용감이 백천범을 바라보며 물었다.

“왕비, 만족하시오?”

이씨 부인이 절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기대가 되었지만, 다 받고 나니 별거 아닌 기분이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야, 집으로 돌아가요.”

이곳에 온 뒤로 묵용감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좋소. 집으로 갑시다.”

자리에 일어난 그가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잡았다. 그리곤 진흙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씨 부인을 그대로 지나쳐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 * *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기 시작했다. 나무에 매달린 매미가 성가실 만큼 끊임없이 울어 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묵용감이 기홍에게 물었다.

“왕비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데, 왕비가 온 것이냐?”

“예, 왕야. 가동 호위무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은 마당에서 초식을 연습하고 계십니다. 요즘 왕비 마마께서 꽤 진지하게 수련을 하시더니 동작 하나하나가 제법 그럴싸해 보입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그 짧은 팔다리로 해 봤자 흉내만 내는 것일 테지.”

그가 갑작스레 무엇인가 떠오른 듯 기홍에게 물었다.

“왕비가 주머니에 수를 놓는다고 하던데 다 놓은 것이냐?”

“예. 연꽃 두 송이를 놓으셨는데 소인이 보기에도 예뻐 보일 만큼 아주 잘하셨습니다.”

묵용감이 괜스레 핀잔을 했다.

“잘하긴, 보나 마나 여기저기 뭉쳐 있겠지. 열 손가락을 전부 찔리는 걸 보면 바느질에 영 소질이 없는 듯하다. 이제 다 놓았다고 하니 더는 하지 말라고 전해라.”

“예. 소인이 월향이에게 왕비 마마를 잘 지켜보라 말해 놓겠습니다.”

묵용감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정자로 향했다.

저 멀리 백천범의 모습이 보였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칼자루를 쥔 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씩 휘두르고 있었다. 제법 진지해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난잡한 동작에 불과했고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가동이 동작을 멈추라고 외치더니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팔을 조금 더 위로 올려 주고 허리를 살짝 두드리는 게 자세를 낮추라는 의미인 듯했다.

백천범은 그가 알려 주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지만 어려운 동작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가동이 곧장 그녀를 붙잡았고, 그의 품에서 잠시 비틀거린 후에야 제대로 몸을 가누었다.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가동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백천범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크게 웃어 보였다.

따사로운 햇빛까지 더해지니 둘의 모습이 유독 친밀하고 다정해 보였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묵용감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제지간이라 한들 주인과 하인의 차이마저 까맣게 잊고 저런 행동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간 금방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백천범이야 어려서 잘 모를 수 있다 해도 대체 왜 가동까지 분수를 모르고 저리 날뛰는 것이란 말인가?

심기가 불편해진 묵용감은 그들에게 다가가 묵직하게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재잘대며 웃던 두 사람이 곧장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폴짝폴짝 뛰어 그에게 다가왔다.

“왕야, 일어나셨네요? 푹 주무셨어요?”

가동은 아무 말도 않고 살짝 부자연스럽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묵용감이 물었다.

“연습은 잘돼 가오?”

백천범이 대답했다.

“검술은 오늘 처음 배우는 거라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걸요.”

“권법은 다 익힌 것이오?”

“아뇨. 사부님이 검을 다루는 게 멋있어 보여서 저도 한번 해 보려고요.”

묵용감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아직 걸음마도 못 뗐는데 뛸 생각부터 하다니. 서두르다가 오히려 일을 망친다는 것도 모르오?”

꾸지람을 당하자 백천범이 혀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한참이나 연습을 한 탓에 그녀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혀 있었고, 새하얀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웃음기가 서린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의 불편했던 심기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다니, 이런 여동생이 있다는 건 제법 괜찮은 일이었다.

“이제 그만 하고 세수부터 하시오. 온몸에서 땀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백천범이 팔을 들어 올리더니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별로 안 나는걸요? 못 믿으시겠으면 한번 맡아 보세요.”

그녀가 자신의 팔을 묵용감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묵용감이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오지 마시오. 거기 있어도 충분히 맡을 수 있으니까.”

백천범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개띠이신지요? 어떻게 그렇게 냄새를 잘 맡으시는 거예요?”

뒤에 서 있던 가동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묵용감의 시선이 그를 한차례 훑고 가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당장에라도 묵용감의 발이 가슴팍에 날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범이 자그마한 입으로 내뱉은 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싶었지만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풀어지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을 백천범 또한 무서워할 리 없었다. 조금 잘 대해 줬다고 점점 더 제멋대로 구는 것인지 가만히 서 있는 묵용감에게 팔을 가까이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그런데 그만 그의 얼굴에 그녀의 팔이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가 곧바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앗, 왕야!”

참다 참다 폭발한 묵용감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마구 주무르며 말했다.

“감히 본왕에게 이리도 기어오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오?”

백천범이 아야 하고 앓는 소리를 질렀다. 자그마한 몸집이 인형처럼 묵용감의 손에 휘둘리자 방향도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왕야, 그만하시어요. 머리가 너무 어지럽습니다.”

묵용감이 화를 억누르고 동작을 멈췄다. 그에 백천범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왕야, 잠깐 사이에 이렇게 어지럽게 만드시다니, 정말 힘이 엄청나시네요.”

아기 고양이처럼 자신의 품에 기댄 그녀 모습에 묵용감이 두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성가시다는 표정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마음만큼은 뛸 듯이 기뻤다. 왜 백 승상의 집에서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를 싫어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느릿한 말투에 느릿한 걸음걸이를 뽐내는 양반집 규수들보다 백천범이 훨씬 더 나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잡초라고 여길지라도 그만큼은 귀중하게 여기고 날마다 아껴 주고 싶었다.

“됐소. 이제 그만 가서 세수 좀 하시오.”

그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가동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화려한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한 주머니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연꽃 두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정교하지 못한 실력에 몇 가닥은 뭉쳐있기까지 했다. 백천범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자신에게 선물로 수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한 주머니가 왜 가동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어 오른 묵용감은 콧방귀를 뀌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백천범이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왕야, 같이 가요!”

묵용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빨리 앞으로 걸어갔다. 백천범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가동을 보며 물었다.

“사부님, 왕야께서 왜 저러시는 거예요? 저 때문에 화가 나신 걸까요?”

가동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왕비와 농담을 주고받더니 왜 갑자기 성을 부리실까?

초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 때나 화를 내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할 뿐, 이유도 없이 마구 화를 내진 않았다. 이런 상황은 가동도 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아마 기분 나쁜 일이 생각나신 게 아닐까요?”

백천범이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왕야는 다 좋은데 너무 변덕이 심하세요. 괜히 화를 내실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왕야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어요. 사부님, 우리 계속 연습해요.”

가동이 물었다.

“왕비 마마, 힘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방금 오랫동안 쉬었으니까 한 시진 정도는 끄떡없어요.”

두 사람은 나무 아래에서 또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멀찍이 가던 묵용감은 백천범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연습을 시작한 둘의 모습에 그는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장에라도 둘을 잡아들여 호되게 벌을 내리고 싶은 심경이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 주고 또 복수도 해 주고, 편안한 거처까지 마련해 호화롭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약속한 선물마저 가동에게 줘 버리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가동에게!

그는 지난번 가동에게 벌로 채찍질을 내린 후, 그녀가 몰래 창문을 넘어 가동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이게 사제지간의 정이란 말인가? 이렇게 깊은 사제의 정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제 간의 정이 아니라면 그럼 설마…….

믿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자세를 잡은 백천범 앞에 선 가동이 보였다. 그는 허리를 굽힌 채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신체적 접촉도 없었지만 서로 마주보는 눈빛에, 그 눈에 담긴 웃음에 묵용감의 마음은 끝없이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았다.

* * *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묵용감은 늘 서예를 했다. 한 획씩 쓰다 보면 천천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서예도 영 신통치 않았다. 마음속에 불이라도 난 듯 마음이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 땔감이라도 쌓여 있는 듯 심화는 끊임없이 타닥거리며 불타올라 그의 마음을 더욱 번잡스럽게 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길게 탄식을 뱉었다. 그는 여전히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옆에서 먹을 갈고 있던 녹하도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가 찻잔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뒤였다. 그는 목을 살짝 축인 뒤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대나무 발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늘씬한 체구가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녹하가 뜨거운 물을 부어 주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그의 어깨에 가녀린 손을 올려놓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야, 피곤하시죠. 소인이 안마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적당한 세기에 능숙한 솜씨가 제법 괜찮았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백천범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숱한 여인이 이렇게 자신을 따르고 싶어 했다.

그가 거절하지 않자 마음이 놓인 양려낭은 두 손을 조금씩 아래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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