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친정에서 감히 누가 이 아이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백 승상은 저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천범아, 예전에 이 아비가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네가 억울한 일을 당했었구나. 다 이 아비 잘못이다. 네 어머니가… 사리 분간을 하지 못해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말아 다오. 이제 왕야께서 널 지켜 주시니 누구도 널 괴롭힐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시집을 갔으니 성질을 죽이고 왕야를 잘 섬겨야 한다. 왕야께서는 이 나라의 영웅이시니 늘 일이 바쁘시지. 그래서 간혹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그래, 널 돌보시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해해야 한다.
왕야와 이 아비 사이에 오해가 조금 있으니 네가 중간에서 조금 어려울 테지. 천범아, 이 아비는 괜찮다. 시집을 갔으면 응당 지아비를 따라야 하니 아비 때문에 왕야와 네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던 묵용감이 말을 끊었다.
“백 승상. 입은 삐뚤어져도 말을 바로 해야 하지 않겠소? 무엇이 오해라는 것이오? 또 중간에서 어렵다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백 승상을 오해한 것이 있소? 오해가 아니라 피맺힌 원한이겠지.
나에게 시집을 왔으니 왕비는 이제 나의 사람이오. 이제 당신들과는 관련 없단 말이오. 그런데 그런 왕비가 어려울 일이 뭐가 있단 말이오? 나와 거리가 생길 일은 더더욱 없소.”
그가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왕비, 그렇지 않소?”
백천범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왕야께서 제게 아주 잘해 주시니 왕야와 거리가 생길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녀가 백 승상에게 말했다.
“아버지, 마음 놓으십시오. 왕야 곁에서는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잘 되었구나. 이 아비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
“좋소.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묵용감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내 오늘 왕비를 데려온 것은 당신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기 때문이오.
오늘 이후로 감히 왕비를 해하려는 썩은 놈이 있거든 이 몸이 그자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오! 저택 안에서든 밖에서든 왕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그대로 갚아 줄 것이란 말이오, 아시겠소!”
백 승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왕야,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왕비에게 해가 되면 저희에게도 해가 되는 법입니다. 저희를 너무 과하게 업신여기시는 것이 아니십니까?”
“어쩔 도리가 없소.”
묵용감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이 원흉인데 원흉을 막지 않으면 어딜 막아야 한단 말이오? 왕비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당신들에게만 당했으니 당신들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소?
왕비가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도록 보호해 주는 게 좋을 것이오. 안 그랬다간 본왕이 안부 인사차 저자들을 보낼 테니.”
저자들이란 문 앞에 서 있는 친위병들이었다.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몸에 살기가 어린 얼굴을 가진 사내들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묵용감이 이씨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이씨 부인은 대청에 든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묵용감이 자신을 부르자 몸을 덜덜 떨던 그녀는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아 그 옆의 백천범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이씨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리자라도 된 양 거만한 표정을 보이자 이씨 부인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도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왕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간의 일들은 그저 악랄한 노비들이 저지른 짓이지, 저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입니다.
왕비로 간택된 것만큼 가문의 영광이 또 어디에 있다고 감히 왕야의 저택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왕비의 불행은 저희의 불행이나 마찬가지인데 왕야께서 조금 과하십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되받아쳤다.
“당신들에게는 본왕이 과해야겠소. 그래서 뭐 어찌할 것이오?”
뭘 어찌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무리를 데려와 잔뜩 힘을 주니 간담까지 서늘했다.
묵용감은 호위병을 동원해 저들에게 경고하려 했을 뿐,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려던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처신들 똑바로 하시오!”
백 승상은 역귀 같은 묵용감이 드디어 돌아가려는 줄 알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묵용감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 승상, 자리 좀 비켜 주시오. 본왕이 이씨 부인에게 할 말이 있소.”
서둘러 묵용감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던 백 승상은 긴말 않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설사 초왕이 부인을 죽이려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멍청하고 악랄한 늙은 여편네를 진즉에 떨쳐 버리고 싶었지만 고명 부인인 데다 귀비의 친모이니 어찌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초왕이 홧김에 멍청한 여편네를 해한다면 그 또한 바라던 바였다.
이씨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승상, 저를 두고 가시다니요!”
문 앞을 지키던 친위병들이 곧장 그녀를 막아섰고, 백 승상은 그 틈을 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겁에 질려 다리에 힘까지 풀린 이씨 부인은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동안 저질렀던 짓에 대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엄청난 공포심에 휩싸였다.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그녀가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크고 높은 팔걸이 나무 의자에 앉아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분명히 악인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 예전엔 이씨 부인이 이곳에 앉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지만, 지금은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야말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에 앉아 있는 이씨 부인의 모습에 백천범은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이 어찌 할 생각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정말 이씨 부인을 해하려 한다면 그녀는 그를 말려야 했다. 이미 끝난 일에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일로 초왕야가 또다시 난감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씨 부인은 두려웠지만 고명 부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있는 데다 백천범 앞에서만큼은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지도,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묵용감은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무언의 압박감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 부인은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었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지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때 묵용감의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특별한 일로 부인을 남으라 한 것은 아니오. 예전에 부인이 우리 왕비를 과하게 괴롭혔다 들었소. 그 때문에 열넷이 된 왕비의 체구가 이리도 작질 않소. 다 부인이 저지른 짓 때문이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왕비에게 정중히 삼배를 올리시오. 한 번 절할 때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예전 일은 다 지나간 일이다’하고 외는 것도 잊지 말고.”
그의 말에 이씨 부인과 백천범 모두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놀란 것도 잠시, 금세 평정심을 되찾은 백천범은 악랄한 이씨 부인이 그간 저질렀던 일과 견주어 보면 왕야가 제안한 일은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씨 부인에게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려 승상의 아내이자 고명 부인, 귀비의 친모인 그녀가 어떻게 저 어린 계집아이에게 절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별짓 다 해도 죽지 않아 분하기만 한 백천범에게 도리어 절까지 해야 하다니? 하! 어림도 없었다.
이씨 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할 마음이 없나 보군.”
묵용감은 여전히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방금 백 승상의 태도를 보질 않았소? 그가 부인을 두고 간 게 무슨 의미겠소? 아마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만일 내가 백 승상을 죽이거든 황제 폐하께서 난리를 치시겠지. 하지만 부인같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여인을 죽이면 어찌하실 것 같소?
황제 폐하께서도 아무 말 못 하실 테지. 부인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본왕은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으니 알아서 고르시오.”
초왕은 군신이었다. 누구도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황제마저도 그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든 상태였다.
그런 그가 이씨 부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정말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 분명했다. 살기 위해서는 백천범에게 절을 해야 했지만, 그 또한 죽는 것만큼이나 싫은 일이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적잖이 난감했다.
묵용감은 더 이상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결정은 하시었소? 셋까지 세겠소. 그 전에 초왕비에게 절을 올리지 않으면 본왕은 부인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판단할 것이오. 그리되면 내년 오늘이 첫 번째 기일이 되겠군.”
말을 마친 그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몸을 부들부들 떨던 이씨 부인이 공포에 휩싸인 얼굴을 들어 올렸다.
“둘.”
이씨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다. 난감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셋.”
이씨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에 멍하니 있던 그녀는 다시 숨을 들이킬 힘조차 없어 보였다.
그때,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뭣들 하느냐!”
이씨 부인의 몸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털썩 무릎을 꿇은 그녀가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뒤이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 곁으로 뛰어오던 두 명의 친위병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미 머리를 조아린 이상 이씨 부인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또 한 번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친위병들이 마치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만큼이나 무서웠다. 이렇게 죽음과 가까웠던 적이 없어 그녀는 두려움에 체면조차 모두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