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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5)화 (74/1,192)

제75화

묵용감의 말에 묵용택이 흠칫 놀랐다.

황제는 초왕이 백 승상과 계속 싸우려 들지도 모르니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을 보낸 것이었다. 설마 했지만 묵용감의 말을 들어 보니 역시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셋째 형님, 그만두시지요. 이미 끝난 사건이니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그래도 귀비 마마의 모친인데, 더 이상 황제 폐하를 난감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건이 끝났다는 말에 백천범이 급히 물었다.

“판결이 어떻게 났는데요?”

묵용택이 대답했다.

“두 죄인이 모두 죽은 데다가 죽기 전 이씨 부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라며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셋째 형님께서 이 일로 대전에서 한바탕 성을 부리시는 바람에 황제 폐하께서 난감해하셨지요.”

크게 놀란 백천범이 꽤나 엄격한 말투로 묵용감에게 말했다.

“금란전에서 소란을 피우시다니요. 황제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죽을죄라는 것도 모르십니까!”

“이런 사소한 일로 목숨을 빼앗는 게 어찌 황제의 도량이라고 할 수 있겠소?”

묵용감은 그녀의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결국 이런 꼴이 되었으니 그녀를 볼 낯이 없었던 것이다.

“저는 사실 이것으로도 만족합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정말 이씨 부인이 처형이라도 당했으면 아버지께서 아주 난감하셨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지금 초왕야의 저택에 와 있으니 부인도 절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을 다시 언급하다 보니 묵용감은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학평관을 불러 몇 마디 전하더니 기홍에게 백천범의 머리를 빗어 주고 치장을 도와주라고 분부했다. 일분일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묵용택이 다시 그를 설득했다.

“셋째 형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시지요. 황제 폐하께서…….”

묵용감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입만 열면 황제 폐하, 황제 폐하! 그런데도 황제 폐하의 대변인으로 온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 말거라, 백여름을 어찌 하려는 것이 아니니. 시집을 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한 번도 친정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괜히 다른 말이라도 나올까 싶어 한 번 다녀오려는 것이다.”

“방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백 승상이 또다시 형님을 마주하면 간이 다 떨어지겠습니다. 대전에서 발까지 들어 올리실 정도니, 그자의 집에서는 칼을 뽑아 베어 버리실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묵용감이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네 셋째 형님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이냐? 내가 그리도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더냐?”

원래는 충분히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사랑의 늪에 빠져 버린 그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에게 심한 괴롭힘을 받았는데, 갚아 주지 않고서야 마음에 쌓인 분노가 어찌 해소될 수 있단 말인가?

되었다. 설득할 만큼 했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셋째 형님께서도 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시겠지요. 그럼 이 아우는 그만 떠들고 돌아가겠습니다. 어서 볼일 보시지요.”

묵용감은 학평관에게 진왕을 배웅하라 이른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기홍이 백천범의 머리를 빗겨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녀처럼 묶어 올린 머리에 보석이 박힌 비녀를 꽂으니 고귀하고 화려해 보였지만 백천범의 풋풋한 얼굴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묵용감이 머리 모양까지 지시하지는 않았어도, 귀한 대접을 받는 초왕비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그의 의도를 알아챈 기홍이 봉황처럼 화려하고 고귀하게 백천범을 치장해 준 것이었다.

* * *

묵용감은 외출할 때마다 기분이 저조한 편이었는데, 백천범을 데리고 백 승상의 저택으로 향하니 유난히 들뜬 기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친위병 때문에 흡사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천범이 타고 있는 가마는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틀에 자홍색 장막을 걸고, 천장에 노란색 비단을 늘어뜨린 뒤 그 위에 은장식을 얹은 가마는 지난번 백천범이 시집을 올 때 탔던 꽃가마보다 훨씬 더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다.

묵용감은 보석이 박힌 금관을 쓰고 있었다. 안에는 옅은 검정색의 얇은 비단 장삼長衫을 입고 겉에는 은색 장포長袍를 걸친 뒤 옥대를 맸다.

장포 원단은 금색과 은색 선이 교차하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왼쪽 가슴에는 사조룡이 수놓아져 있었다. 여기에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어두운 색 장화를 신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말에 탄 그는 가마 옆을 지키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 소식이 백 승상의 저택에도 전해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백 승상은 초왕야가 사람을 이끌고 자신의 집에 쳐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서, 어서 문을 닫아라. 통나무로 문을 받치고 빗장을 걸어 잠가라! 그 앞에 인부들을 세워 입구를 단단히 막아야 한다!”

이씨 부인이 못마땅한 듯 토로했다.

“아무리 초왕야라 한들 이렇게 대낮에 어찌 대신의 집을 쳐들어올 수 있단 말입니까? 고약한 놈 같으니.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참으로 볼만하겠습니다.”

백 승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멍청한 여편네만 아니었어도 대전에서 초왕야가 자신에게 발길질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멍청한 여편네는 반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화를 억누르지 못한 그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이씨 부인은 넋이 나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탄식만 내뱉을 뿐이었다.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린 뒤에야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를 질러 댔다.

“아이고, 나 죽네! 밖에서 당한 일을 마누라한테 화풀이를 하고 이렇게 업신여기다니. 가여운 고명 부인이 까닭 없이 따귀를 얻어맞고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할꼬! 아이고, 나 죽네. 머리라도 박아 죽어 버려야지! 억울해서 못 살겠구나…….”

피라도 짜낼 듯 잔뜩 핏발을 세운 그녀의 눈빛에 백 승상은 두피까지 부어오를 만큼 화가 났다. 그따위 천박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낯짝이 있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한 번 더 손찌검을 하려 하자 관리가 죽기 살기로 그를 막아섰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초왕이 곧 들이닥칠 테니 서둘러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궁에 서신을 전달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쓸데없는 소리.”

백 승상이 그를 호되게 꾸짖었다.

“서신을 보낸다 한들 당장 코앞의 초왕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초왕같이 비열한 놈은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한들 제압할 수 없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 멀리서 일정하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천둥이 치는 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에 그는 더욱 아무런 방안도 세울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본 이씨 부인도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초왕야가 저를 진짜 죽이진 않겠지요?”

“당신만 죽인다면야 다행이고말고. 나까지 해할까 봐 걱정이지!”

이씨 부인은 기막히다는 듯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그리 멍청히 서서 뭐 하는 것입니까? 어서 궁에 서신을 보내 황제 폐하께 살려 달라고 청하지 않고.”

백 승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야 초조하신가 보군. 무서운 것을 아는 사람이 감히 그딴 악랄한 짓을 꾸몄단 말이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라 아예 머리가 없는 수준이오.

초왕이 나를 증오하긴 해도 이번 일은 당신이 저지른 죄를 물을 것이오! 하여튼 둘 다 끝장이란 말이오!”

그가 갑작스레 마음을 바꾸었는지 관리에게 명했다.

“문을 열어 두어라.”

그의 말에 마음이 조급해진 이씨 부인이 말했다.

“어찌 문을 열 수 있단 말입니까? 초왕야가 우리 목을 베러 온단 말입니다!”

백 승상이 맥없이 말했다.

“목을 베려면 베라지. 이리 오랜 기간 대적하니 나도 지치는구려.”

그 자리에서 꼼짝 않는 관리에게 그가 또다시 호통을 쳤다.

“문을 열라니까! 초왕이 내 목을 베러 오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관리가 어쩔 수 없이 하인들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하자 이씨 부인이 끼어들었다.

“안 된다, 열면 안 돼!”

그녀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자 백 승상이 하인을 시켜 그녀를 막아 세웠다. 문을 열자마자 선두에 있던 친위병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두 줄로 나뉘어 배열을 맞춰 서더니 가운데를 넓게 비워 두었다.

묵용감이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고 가마는 곧장 마당으로 향했다. 이씨 부인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백 승상은 사교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환히 웃으며 다가와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초왕야께서 이렇게 찾아 주시니 누추한 집이 더없이 빛나는 듯합니다.”

묵용감은 그의 말을 받아 주지 않았고, 가마 옆으로 향해 직접 비단 장막을 올렸다.

“왕비, 나오시오.”

백천범이 그의 손을 붙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몸에 비단을 두른 것도 모자라 머리에는 보석이 한가득 박혀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백 승상과 이씨 부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백천범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사뿐히 절을 올렸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얼이 빠져 있던 백 승상이 뒤늦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묵용감이 한 박자 빨리 백천범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늘 온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왕비를 보여 주러 왔소. 시집온 후 한 번도 친정에 오질 못했으니 말이오.”

소란을 피우러 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초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니 곧바로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백 승상은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묵용감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백천범의 손을 잡은 채 목에 힘을 주고 대청으로 들어가 주인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백 승상과 이씨 부인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 격이었으니 이미 그의 기세에 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천범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묵용감의 상황에 맞추기 위해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친위병들이 즉각 그 뒤를 따르더니 살기를 내뿜으며 입구를 막아섰다. 위협적인 그들의 모습에 이씨 부인은 벌벌 떨기 시작했고, 백 승상도 조금은 두려웠다. 묵용감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는 겨우 미소를 지으며 백천범에게 말을 걸었다.

“친정집에 오는데 어찌 이리도 많은 사람을 대동한 것이냐? 누가 보면 싸우러 오는 줄 알겠구나.”

묵용감이 헛기침을 했다.

“왕비가 친정에서 늘 괴롭힘을 당했다고 들었소. 그리하여 빈틈없이 보호하고자 호위병을 조금 데려왔소. 모두 왕비의 호위병이라 왕비가 가는 곳을 뒤따르는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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